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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출교 당시, 고려대 본관 앞에 설치된 천막농성장.
 2006년 출교 당시, 고려대 본관 앞에 설치된 천막농성장.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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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6년 4월에 고려대에서 출교를 당했다. 그때 막 통폐합된 고려대 병설보건대 학생들에 대한 학벌주의적 차별, 그리고 고려대 당국의 총학생회 불법화 시도에 대학 본관 점거농성으로 항의하다가 표적징계를 당했다. 그 뒤로 2년 가까이 본관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며 싸운 끝에, 2008년 3월 법원의 판결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얼마 전, 6월 초였다. 고대 의대생들이 동료 학생을 성추행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런 놈들이 의사가 되서는 안 된다. 의사가 되지 못하게 막는 방법은 출교뿐이다" 하는 이야기도 간간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 충분한 전후 조사를 한 연후에 징계 수위가 논의돼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나의 경우 별 조사도 없이 마녀사냥 속에 사건 발생 14일 만에 출교라는 초강경 징계를 당한 트라우마가 컸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고려대 당국이 여전히 상벌위원회를 열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후배들에게 간간이 들었다. 피해자가 받을 고통이 너무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같이 기말고사까지 봤다는 이야기를 들었는 땐 너무나 황당했다. 모든 성추행·성폭력 사건에선 피해자 보호가 최우선인데, 도대체 고려대 당국은 이런 상식조차 모른다는 말인가?

등록금 문제, 경쟁 교육 문제 등에서 고려대 당국이 비상식적이라는 것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사회적 지탄을 받는 성추행범들을 처리하는 문제에서조차 이럴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학교 다니는 내내, 그리고 출교당해 있던 내내도 그랬지만, 졸업한 후까지 고려대 당국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학생운동 출교까지 14일 vs 성추행범 퇴학까지 77일+α

가해자들이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중 한 명이 혐의를 부인하고 있으며 피해자의 모든 문자 메시지를 열람하겠다고 요청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놈들이 정말 파렴치범이구나. 출교를 요구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방학 내내 학교에 갈 때마다 출교를 요구하는 졸업생들의 1인시위 모습이 간간이 보였고, 지금 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그 1인시위에 동참하지 못했던 것이 부끄럽다.

6월 15일 오전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 정문 앞에서 김현익씨가 고대 의대 성추행 가해자 처벌을 촉구하는 릴레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6월 15일 오전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 정문 앞에서 김현익씨가 고대 의대 성추행 가해자 처벌을 촉구하는 릴레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홍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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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피해자의 언니가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나와서 그간의 속사정을 털어놓았다는 보도기사를 읽었다. 가해자의 부모는 "피해자가 문제가 있었다, 우리 아들은 잘못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문장을 읽자마자 무심코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했다. 성추행범들은 처음 피해자가 '다 기억난다'고 했을 때 미안하다고 한 게 아니라 '어떻게 알았냐, 우린 망했다' 하고 반응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인데 고려대 상벌위원회는 아마도 그 학생의 학적 자체를 말소하고 재입학이 불가능한 출교보다 수위가 낮고 재입학의 기회가 있는 '퇴학'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 같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내가 출교당했을 당시엔 '사건' 발생 12일 만인 4월 17일에 상벌위원회가 열렸다. 그리고 고작 이틀 만인 4월 19일에 출교가 통보됐다. 그런데 지금은? 77일이나 흘렀다. 그것도 최초 언론 보도일을 기준으로 할 때다. 지금 고려대 당국은 퇴학 방침을 정해놓은 듯 보이고, 마지막으로 성추행범들에게 소명기회를 주겠단다.

어이없는 것은 "2006년에 출교시킬 때 절차를 충분히 지키지 않아서 법원에서 패소를 했으므로, 이번에는 충분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을 이런 늑장 대응의 이유로 대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는 점이다.

법원은 "징계가 과하다", "피해자에 해당하는 학생처장이 상벌위원장이어서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 "학교 당국이 원인을 제공한 측면이 있다", "소명 기회가 충분치 않았다" 등의 이유를 출교 무효의 이유로 들었다. 지금과 유사한가? 고려대 당국의 '변명'보다는 '성추행범 부모가 권력자라더라' 하는 항간의 소문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다.

학생운동 탄압에만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징계권?

범행 사실이 명백하고, 반성의 기미도 없고, 오히려 피해자 탓을 하고 있는 이 파렴치범들이 의사를 직업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해서는 안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때문에 요구했던 것이 출교다. 의사가 환자를 마취해 놓고 성폭행하는 사건도 있었기 때문에 이런 요구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피해자의 언니가 출교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으로 볼 때 아마도 이는 피해자의 요구일 가능성이 크다. 징계 수위가 퇴학인 경우 성추행범들은 가장 빠른 경우 한 학기만에 복학을 할 수도 있다. 상벌위원회 성원들이 이를 모를 리 없을 텐데 퇴학을 방침으로 정했다는 것은 어이가 없다(물론 피해자가 졸업하기 전까지는 재입학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을 달았을지도 모르겠다. 고려대 당국이 그 정도로 세심할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말이다).

사실 이런 파렴치한 일이 학교에서 벌어지고, 이에 대해 징계를 요구하는 게  낯설다. 적어도 내 기억에는 내가 학교를 다닌 2002년부터 2009년 사이에 고려대 당국이 공론화했던 징계는 '도서관 몰카 사건' 단 한 건을 빼면 모두 다 등록금 투쟁 등 학생운동에 대한 징계였기 때문이다.

2004년에 고려대는 등록금 투쟁을 주도한 학생회장들을 징계하려다 실패했다. 2005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자 50명 징계를 공언했다가 실패했다. 그리고 결국 2006년에 7명 출교를 비롯 19명이 본관 점거농성으로 징계를 당했다.

나는 출교 당시 한 처장에게 폭행을 당할 뻔했었다. 그런데 오히려 고려대 당국은 내가 달려들었고, 자해공갈을 벌인 폐륜아라고 날조 공표했다. 이렇듯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사실관계까지 날조하며 적극적으로 징계하는 고려대 당국이, 성추행범들에게는 관대하기 이를 데 없다. 도대체 이게 대학인가(최근에 서울대도 본관 점거 학생들에게 징계를 엄포했다고 하는데 실현된다면 징계권 남용의 대표 사례가 하나 추가될 것이다)?

2005년 5월 2일 '이건희 삼성회장 명예철학박사 학위수여식'이 열릴 예정이었던 고대 인촌기념관 앞에서 학생들이 반대 시위를 벌이는 장면.
 2005년 5월 2일 '이건희 삼성회장 명예철학박사 학위수여식'이 열릴 예정이었던 고대 인촌기념관 앞에서 학생들이 반대 시위를 벌이는 장면.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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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벌위원회 앞에서 '출교 요구' 기자회견을!

다음 주 초면 아마도 상벌위원회 결정이 내려질 것 같다고 한다. 그간 고려대 당국의 실천을 봤을 때 '칼 같은' 뭔가가 있을 성 싶지 않다. 이 문제를 바로 잡으려면 학생들이 나서는 게 필요하다. 졸업생인 나도 뭔가 할 수 있겠지만 재학생들, 특히 학생회들이 움직인다면 효과적일 것이다.

출교 철회 운동 때를 예로 들어 보면, 상벌위원회 교수님들께 편지를 쓰기도 했다. 상벌위원회는 각 단과대 부학장으로 이뤄지는데, 학생회들이 (혹은 그냥 학생들도) 자기 단과대 부학장님께 공개편지를 쓰거나 찾아가기도 했었다. 상벌위원회가 열리는 장소 앞에서 팻말 시위를 하기도 했다. 18일에 성추행 학생들의 출교를 요구하는 학생들이 기자회견을 했던데, 상벌위원회 앞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현재 분명한 출교 요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출교 그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학생 운동에 대한 보복으로서 표적징계인 출교가 나쁜 것이기 때문에 꺼릴 것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 범죄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사람 신체를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는 의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퇴학으론 안 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레프트21>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고려대, #의대, #성추행, #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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