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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언니'의 수다는 매력적이다. 그녀의 결단은 단호했고 행동은 거침이 없다. 막걸리처럼 걸쭉한 언어로, 기꺼이 자신을 희화화할 줄 아는 열정의 몸짓으로, 자신을 향한 의심의 시선들을 무장해제시킨다. 적어도 이 순간 그녀는 최고의 배우다.

 

경계의 벽을 허문 자리, 그 한복판에 왕언니가 서 있다. 이제 막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한 그녀는, 자신만이 느끼는 세상에 대해 거침 없이 쏟아낸다.

 

바로 '페미니스트저널 이프'의 엄을순 대표가 쓴 <을쑤니가 사는 법> 이야기다. 

 

촌스러운 이름 때문에 겪어야 했던 정체성의 혼란('을쑤니라 불러 다오')에서부터 중년의 남편에게 풍선을 선물하는 낭만('꽃보다 풍선'), 밥솥에서 권력이 나온다며 전업주부로서의 지난 삶에 대한 자위('권력은 밥솥에서'), 혼자 된 엄마의 성(性)에 대한 딸의 무심함('엄마의 딜도'), 서구우월주의에 빠진 정신 나간 외국인 운전자에게 맞장 뜨는 용기('영어로 욕하며 싸워 봤수?'), 저출산 문제 등 사회 문제에 대한 통쾌한 풍자('저출산에 개값 오를라')까지, 왕언니의 수다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이어졌다.

 

'수다'라는 것이 그렇듯, 왕언니의 이야기 주제는 사방으로 흩어지기 일쑤다. 새로운 화두를 던지는가 싶으면, 이미 다른 주제로 화제는 바뀌어 있다. 하긴, 그동안 쓴 칼럼들을 모아 재편집해서 풀어놓은 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왕이면 이야기 맥락에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더 좋았을걸! 다소 산만하기는 해도, 입심 하나는 제법 세다.

 

왕언니의 이야기는 여자들이라면 한 번쯤 겪었을 법한 평범한 이야기들이다. 사건이 평범하다고 이야기가 후지다는 것은 아니다. 일상은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 위대하다는 걸 우린 몸소 느끼며 살아가도 있다. 그러함에도 이러한 느낌이 드는 건, 그녀의 이름 앞에 붙은 '페미니스트'라는 단어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왕언니의 진짜 매력을 다른 각도로 보여주고 있다.

 

왕언니는 평범하고 익숙한 사건들을 자기만의 독특함으로 새로운 역사로 바꾸어놓는다. 질투가 날 만큼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왕 언니.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녀와 나를 견주게 된다. 심지어 모방 심리가 은근 작동하기도 해, 머릿속으로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 나를 놓아 보고 그녀처럼 멋들어지게 행동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경의 감정과 동시에 또 다른 불편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쩜 저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삶이 저토록 명쾌할 수 있는 걸까?"

 

이런 감정의 정체는 뭘까? 초라한 내 일상에 대한 보상심리로 상대를 흠집내려는 것은 아닐까? 그럼, 질투? 잠시 내 안에 일어나는 감정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래, 그래서 그런 거구나! 나는 좀 더 그녀를 알고 싶은 게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이야기 말고, 좀 더 내밀한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책 기획 의도와 전혀 다른 독자의 이기심이지만!).

 

왕 언니의 이야기는 매력적이지만, 속 깊은 이야기는 아직 꺼내지 못한 느낌을 지울 순 없다. 말은 성대한데 알맹이는 뒤로 감춘 듯한 느낌!

 

왕언니의 이야기엔 구수한 냄새가 난다. 오랜 세월 묵은 장처럼 상처마저 발효시켜 새로운 긍정 에너지로 바꾸는 그 힘! 그래서 난 그녀의 수다, 그녀의 뻗치는 생의 에너지가 좋다.

덧붙이는 글 | <을쑤니가 사는 법>(엄을순 씀, 이프 펴냄, 2011년, 13800원)


을쑤니가 사는 법

엄을순 지음, 이프(if)(2011)


태그:#서평, #엄을순, #신간도서, #을쑤니가 사는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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