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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탑은 보고 싶고, 경주에는 곧장 갈 수 없다면, 대구 동구 도동 제현사에 가시라. 제현사는 도동 측백수림 바로 맞은편에 있다.
▲ 제현사 다보탑 다보탑은 보고 싶고, 경주에는 곧장 갈 수 없다면, 대구 동구 도동 제현사에 가시라. 제현사는 도동 측백수림 바로 맞은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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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다보탑이 보고 싶다. 사진을 보거나 동영상이 아닌, 다보탑의 '실물'이 보고 싶다. 다른 점에서는 몰라도,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장점에서만은 그 어느 탑보다도 예술성을 자랑하는 다보탑 아닌가. 높이 10.4m로, 목조탑 이상 가는 정교한 조화미를 뽐내는 3층석탑, 국보 20호인 그 다보탑이 사무치게 보고 싶다.

게다가, 어린 아이가 다보탑을 오늘 꼭 봐야 한다고 졸라댄다. 숙제를 해야 하는데 반드시 다보탑의 사진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경주로 달려갈 형편이 못 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럴 때,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있는 제현사를 아는 사람들은 마음이 편안하다. 그 곳에 가면 '다보탑'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물은 아니다. 하지만 다보탑의 형태와 크기를 제대로 잘 지켜 되살려 놓았기 때문에 '꿩 대신 닭' 정도는 충분히 되고도 남는다.

특이하다. 사찰 안내판 중에서 이만큼 특이한 경우도 잘 없을 것이다. 다보탑 사진이 들어 있고, 제현사라는 글자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글자로 '도동 詩비 동산'이 홍보되어 있다. 이 안내판은 도동 측백수림에 닿기 직전 지점에 세워져 있다.
▲ 제현사 진입로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 특이하다. 사찰 안내판 중에서 이만큼 특이한 경우도 잘 없을 것이다. 다보탑 사진이 들어 있고, 제현사라는 글자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글자로 '도동 詩비 동산'이 홍보되어 있다. 이 안내판은 도동 측백수림에 닿기 직전 지점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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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는 길에 보이는 것들을 눈썰미 있게 담아내는 사람들은 도동 측백수림 가기 직전에 세워져 있는 '제현사 도동 詩비동산 100m' 이정표를 볼 수 있다. 제현사라는 절에 가면 시비동산이 있는데, 여기서 100m밖에 안 되니 한번 찾아오라는 얘기다. 100m? 아무리 갈길이 바빠도 그 정도 거리라면 엄두를 못 낼 일은 아니다. 아마 '100m'를 이정표에 써넣은 제현사 측도 사람들의 그런 심리를 짐작했을 터이다.

그 100m를 들어가 본다. 물론 실제로는 100m보다는 좀 더 멀다. 아마 300m 정도는 되고도 남을 성싶다. 하지만 100m나 300m나 그게 그거 아닌가. 여기서 100m란 '심리적 거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00m라 하든 300m라 하든, 여행을 다니는 사람에게는 그저 '짧은 거리'일 뿐이라는 말이다.

김소월의 '산유화'에 나오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라고 노래된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거리이니 '저만치'는 사실 별로 먼 거리가 아니다. 100m나 300m 밖에 있는 제현사가 그래 봐야 지척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꽃은 100m 떨어져 있으면 결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소월의 꽃은 그저 10m나 20m 둘레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평자들은 그 뒤에 나오는 '혼자서'에 주목하여 '저만치'의 심리적 거리를 아득하게 해석한다. '제현사 100m'와는 전혀 다른 의미인 것이다.

길게 늘어선 시비들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 절 입구에 들어서면 길게 늘어선 시비들이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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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시비 봐! 여기가 절 맞나?"

절 바로 앞 공터에 주차를 하고 제현사 입구에 서면 왼쪽 어깨 옆에 시비가 와서 닿는다. 그렇게 시비가 많다는 뜻이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펴보면 시비들이 마치 열병식을 하는 군인들처럼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춰 서 있다. 왼쪽으로 들어가 사찰 경내를 한 바퀴 빙 돌아가며 시비를 감상해 보자.

김종상 '어머니'
문병란 '희망가'
김지한 '온누리'
김규태 '고욤나무 그늘에서'
고은 '그 꽃'
임강빈 '허수아비'
문덕수 '손수건'
황금찬 '회초리'
박화목 '과수원길'
김춘수 '꽃'
서정주 '국화 옆에서'
박목월 '청노루'
조지훈 '승무'
한용운 '님의 침묵'
이순신 '한산도가'
신사임당 '어머님 그리워'
정몽주 '단심가'
김황희 '푸른 정신'
해월 '통도사'
문무학 '비비추에 관한 연상'
이재윤 '대조'
문인수 '달북'
김하나 '체조를 하다가'
도광의 '이런 낭패'
손명덕 '은방울꽃'
강영희 '달님'
이근배 '연가'
이일기 '그리움'
권기호 '不二'
구석본 '파도'
이태수 '새에게'
이하석 '장터목'
박복조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 버렸다'
엄기원 '별'
김완기 '우리나라 지도'
강윤제 '사과를 위한 고고학'
김구보 '달꽃을 가꾸는 아이'
하청호 '어머니의 등'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새삼 '제현사에는 시비가 정말 많구나!' 하는 감탄이 거듭 일어난다. 동시도 있고, 한시도 있으며, 현대시도 있고 고시조도 있다. 제현사가 대구의 사찰이라서 그런지 지역의 시인들도 곳곳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다보탑 좌우로 시비들이 정말 '줄을 지어' 서 있다. * 사진은 전경이 카메라에 들어오지 않아 세 장으로 나누어 촬영한 것을 대충 붙인 것이다. 실제 모습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제현사의 전경은 대략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여느 사찰과는 아주 판이하다. 입구에 들어서면 중앙에 다보탑이 보이고, 좌우로 시비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다. '팔각정' 형태인 절 건물도 정말 특이하다.
▲ 시비가 있는 절 다보탑 좌우로 시비들이 정말 '줄을 지어' 서 있다. * 사진은 전경이 카메라에 들어오지 않아 세 장으로 나누어 촬영한 것을 대충 붙인 것이다. 실제 모습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제현사의 전경은 대략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여느 사찰과는 아주 판이하다. 입구에 들어서면 중앙에 다보탑이 보이고, 좌우로 시비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다. '팔각정' 형태인 절 건물도 정말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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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역시 짧아야 한다"

많은 시화전을 보았고, 지금도 제현사에서 시비들을 감상하고 있지만, 시는 역시 짧아야 한다! 액자에 든 시화전 작품들이 아무리 보기에 좋아도 10행을 많이 넘어서면 읽기가 어려웠다. 의자에 앉거나 방에 드러누워서 시집을 읽는 것과는 독서 환경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비의 시는 실외에 세워진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시화전의 시보다도 더 짧아야 한다.

땡볕에, 아니 그늘이 있다 하더라도 단 하나의 시비도 아니고 작품이 여럿인 경우에 서서 긴 시를 읽기는 어렵다. 긴 시 앞에 서면 의욕이 벌써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역시, 시는 짧아야 한다! 그런 뜻에서, 제현사에서는 고은 시인의 '그 꽃'이 단연 압권이다.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얼마나 함축적인가. 이게 바로 시, 산문 아닌 시이다. 흔히 산을 오르면서 사람들은 올라갈 때 못 본 꽃을 내려갈 때 보는데, 그것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절창이 되었다!

올라갈 때는 빨리 산꼭대기에 닿아야지, 몇 시 몇 분까지 정상석 옆에 서서 기념 사진을 찍어야지, 누구누구보다 먼저 올라야지, 등등의 이유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목적과 목표가 있어 사람이 거기에 얽매이는 것이다.

그러나 하산할 때는 다르다. 여유가 있다. 자신과도 경쟁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다툴 일도 없다. 비로소 꽃이 보이고, 나무가 보이고, 산새의 울음소리도 귀에 젖어든다. 올라갈 때는 정상으로 난 최단거리 등산로만 밟았지만, 이제는 좁고 가녀린 오솔길도 문득 걸어보고 싶어진다.

인생이 바로 그렇다. 뭔가를 추구하여 맹렬히 나아갈 때는 주위를 돌아보지 못한다. 아니, 늙어서도 욕심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본인은 그렇게 의식하지 않지만 한발 비켜선 남이 볼 때는 그것은 비인간적인 삶이다. 고은은 그러한 인생의 비인간화를 단 열다섯 글자로 일갈한 것이다. 어찌 보는이의 가슴이 서늘해지지 않겠는가.

김황희 시비 뒤로 도동 측백수림이 보인다.
▲ 정몽주의 '단심가'와 김황희의 '푸른 정신' 김황희 시비 뒤로 도동 측백수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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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현사는 다보탑과 저 많은 시비들 말고도 또 한 가지 볼거리가 있다. 바로 대웅전이다. 물론 근래에 지어진 건물이라 국보도 보물도, 아니 지방문화재도 아니지만, 그래도 제현사의 대웅전은 사뭇 눈길을 끈다. 그 특이한 모습 때문이다.

제현사의 대웅전은 팔각정이다. 세상에 이런 대웅전이 또 있을까. 처음에는 그 건물이 종무소 정도인 줄 알고 두리번두리번 대웅전을 찾았지만, 없다. 허허, 이런 일이! 대웅전이 팔각정이라니! 44년 전인 국민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가서 팔각정을 보았는데, 그걸 여기서 다시 보나?

다보탑의 재현, 많은 시비들, 팔각정 모양의 대웅전을 보여주는 제현사는 재미있는 사찰이다. 절이 아닌 듯 여겨지는 제현사, 시를 두루 읽으면 제법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저 눈으로 훑어만 보고 지나친다면 20분 정도면 둘러볼 수 있다. 이쪽 방면의 답사 여정은 도동에서 측백수림과 문창공영당, 평광동에서 '광복 소나무'를 둘러봐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 제현사 한 곳을 추가하면 좋으리라.


태그:#다보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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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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