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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별나다고 생각했다. 열한 살 초등학교 5학년 여자 아이의 대답치고는. 그 쏘아붙이는 듯한 무뚝뚝한 말투도 그렇고 말이다.

"나는 피아노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학생 수가 고작 스무 명 남짓인 시골 초등학교라 하굣길 풍경 또한 단출하다. 학교 앞에 대기하고 있던 읍내 피아노학원 차 한 대가 아이들을 몽땅 다 태우고 가고 나면, 마을에서는 아이들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그런데 어느 날 유독 한 아이만 피아노학원 차를 안 타고 걸어가는 걸 봤다. 겨울 초입이라 날씨도 제법 추운데 말이다. 그래서 별 뜻 없이 인사말 삼아 물었다.

"야아…. 너는 피아노학원 안 다니냐?"

그런데, 어라? 대답이 심상치 않다. 피아노가 싫단다. 초등학교 여자 아이라면 그 누구 할 것 없이 한때 좋아하지 않은 적 없을 피아노, 그 피아노가 싫단다. 그것도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피아노란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물었는데, 예상 밖의 대답에 많이 당황하고 민망했다. 심지어 버스 타는 것도 싫단다. 걷는 게 좋단다. 날씨를 핑계로 승용차에 태워 동행해 보니, 초등학생이 걸어서 다니기엔 그 아이가 사는 마을은 돌아 돌아 맨 끝 골짜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초등학생치고는 정신세계가 많이 독특하단 생각만 했다.

학생 수 20명도 안 되는 폐교위기의 시골마을 초등학교이지만, 근래 '작은 행복학교 만들기'를 시도하면서 활기를 띠고 있다.
▲ 영광 묘량중앙초등학교 아이들 학생 수 20명도 안 되는 폐교위기의 시골마을 초등학교이지만, 근래 '작은 행복학교 만들기'를 시도하면서 활기를 띠고 있다.
ⓒ 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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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뀔 무렵 지역 신문사에서 전화가 왔다. 신년에 의례적으로 하는 띠동갑 별 새해 소망 인터뷰를 하고 싶은데, 초등학생 열두 살짜리 학생을 섭외해 달라는 거다. 무조건 된다 했다. 초등학생 때 신문에 인터뷰가 실린다는데, 그게 얼마나 어린 아이들에게 오래갈 추억이겠는가. 그것도 저 폐교 위기의 시골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말이다. 찾다 없으면 한 명 대타라도 만들어 인터뷰를 시키라고 공동체 식구들에게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웬일인가. 며칠 뒤 신문을 펼쳐들고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가슴이 먹먹해지고 말았다. 몇 달 전 그 아이, '피아노가 세상에서 가장 싫다'는 그 여자 아이의 얼굴이 떡 하니 있는 게 아닌가.

"엄마가 안 계신다. 아빠는 서울에서 돈을 버시고 시골에서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 새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피아노를 배우는 거다. 피아노 학원을 다닐 수만 있다면 누구보다 열심히 배워서 연말에 아빠와 할머니에게 멋진 피아노 연주를 해 주는 게 소원이다."

그랬었다. 그 아이는 한 달 8만원 돈 하는 피아노 학원비를 댈 수 없는 할머니 밑에서 '피아노가 세상에서 가장 싫다'며 속울음하고 살았던 것이다. 먼저 포기하고 절망하고 스스로 위로하며 혼자 감내하고 살았던 것이다. 버스비까지 아껴가며 그 먼 길 왕래했던 것이다.

남들 다 타고 읍내 나가는 그 피아노학원 차를 보면서 그 아이는 수 년 동안 얼마나 많이 서러웠을 것인가.

우리 공동체 식구들 모두 한동안 침묵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우리는 폐교위기의 작은 시골학교 살리기 운동을 하면서 어찌 이런 속사정도 몰랐다는 것인가. 당장 학원비를 지원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그조차 또 다른 낙인이 될 수 있었다.

묘량중앙초등학교 5-6학년 아이들, 밤 9시까지 학교를 개방해서 국선도는 물론이고 책읽는 모임까지 '밤에도 열린 학교'를 진행하고 있다.
▲ 도란도란 꿈을 키우는 아이들 묘량중앙초등학교 5-6학년 아이들, 밤 9시까지 학교를 개방해서 국선도는 물론이고 책읽는 모임까지 '밤에도 열린 학교'를 진행하고 있다.
ⓒ 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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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묘량중앙초등학교 발전위원회다. 주민들이 십시일반 회비를 내서 학교 아이들 방과 후 학원비를 마을공동체 전체가 책임지기 위해서다. 물론 기존에 학원비를 내던 학부모들은 모두 그 돈을 발전위원회 회비로 내기로 했다. 그래야 특정 아이들이 특별하게 주목받지 않고 모두에게 무상 적성교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피아노학원에선 단연 그 아이가 가장 열심이란다. 한눈파는 법 없이 몰두한단다. 그간의 간절함이 얼마나 깊었을지….

사회사업의 기본은 '가난한 자에 대한 존엄'을 지키는 일이다. 누구를 만나든, 예를 갖춰 대해야 한다. 특히 약자의 경우 더욱 그러해야 한다 했다. 누구의 말처럼 살아있는 한 끝까지 인간다움을 잃지 않게 살펴야 한다.

저마다 누구라도 가난 때문에 눈물짓지 않는 세상, 그런 현장으로 가꾸고 싶다.
구체적 현실과 마주하며 반성하고 각성한다. 현장은 늘 위대한 스승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라도닷컴 4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필자 강위원은 고향인 영광 묘량면에서 농촌공동체 '여민동락(與民同樂)'을 꾸리고 있습니다. 1990년대 후반 전남대 총학생회장과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꿈꾸었던 세상과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 펼치는 일들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농촌복지공동체를 꿈꾸며 '동락(同樂)'의 길을 열심히 찾고 있습니다.

- 여민동락공동체 홈페이지 바로가기(www.ymdr.net)



태그:#농촌공동체, #여민동락공동체, #여민동락, #농촌, #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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