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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RH-B형 혈소판을 제대 수혈받지 못해 사망한 정유운 혈액암 환자 사연을 소개한 'RH-혈액형의 외로운 전쟁'편을 방송했다.
 10월 24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RH-B형 혈소판을 제대 수혈받지 못해 사망한 정유운 혈액암 환자 사연을 소개한 'RH-혈액형의 외로운 전쟁'편을 방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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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우(44)씨는 대학진학을 준비중인 19살 아들 유운이를 지난 4월 20일 하늘나라로 보냈다. 평소 건강했던 아들 유운이는 지난 3월 '퇴행성 T세포 림프종'이라는 혈액암 진단을 받고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35일 동안 치료를 받았다.

혈액암 진단을 받으면 혈액을 응고해 지혈시키는 혈소판 수치가 급격히 떨어지는데, 유운이는 정상수치(10만~15만)의 1/10 수준인 1만보다 더 낮아서 자연출혈로 사망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때는 혈소판 수혈 외에는 다른 치료방법이 없다.

문제는 다른 의약품과 달리 혈소판은 인공생산이 불가능해 누군가의 헌혈이 없으면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더욱 유운이는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0.3%에 불과한 RH-혈액형을 가지고 있었다.

1000명 중에 약 3명이 RH-혈액형이고 혈액형이 A형, B형, AB형, O형 4가지 종류임을 감안할 때 RH-B형인 유은이가 자신에게 혈소판을 줄 수 있는 한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1000명 이상에게 부탁을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헌혈율이 5%임을 고려하면 2만명 이상에게 부탁을 해야 하고, 총 35일간 하루 2명의 혈소판 수혈을 받으려면 140만명 이상에게 부탁을 해야 한다. 이게 과연 가능할 일인가?

고액의 치료비·장기간의 간병·혈액 구하기... 삼중고

혈소판 등 혈액이 부족할 때마다 혈액암 환자와 그 가족들은 직접 헌혈자를 구하기 위해 군부대, 경찰서, 대학교, 길거리 등으로 뛰어다녀야 했다.
 혈소판 등 혈액이 부족할 때마다 혈액암 환자와 그 가족들은 직접 헌혈자를 구하기 위해 군부대, 경찰서, 대학교, 길거리 등으로 뛰어다녀야 했다.
ⓒ 안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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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암 환자가족들은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의 치료비를 마련해야 하고 환자와 함께 장기간 무균실에 들어가 간병하는 것만으로도 지칠대로 지쳐있다. 이들에게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혈액까지 직접 구하게 만드는 것은 무책임을 넘어 잔인하기까지 하다.

혈소판 공급 부족으로 매년 백혈병, 재생불량성빈혈, 골수이형성증후군, 악성림프종, 다발성골수종 등 혈액암 환자 가족 수천명이 환자 간병도 포기하고 군부대로, 경찰서로, 대학교로, 길거리 등으로 직접 뛰어다니며 혈액을 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2006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전까지 환자는 골수이식을 받기 전에 혈액검사에 합격한 혈소판 헌혈자 15~20명의 명단을 병원에 제출해야 이식을 받을 수 있었다. 만일 혈소판 헌혈자 명단을 제출하지 못하면 골수이식이 연기됐다. 하지만, 이식이 연기되면 그 사이 백혈병이 악화되어 사망하는 일까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환자 가족뿐만 아니라 친척, 학교 친구, 직장 동료들까지 총출동해 헌혈자를 구해야 했고 이런 과정은 혈액암 치료의 필수코스로 인식되어졌다.

환자가족 입장에서 고액의 치료비와 힘든 간병생활은 빚을 내고 좀 고생하면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돈으로 살 수도 없고 가족이 대신 할 수도 없는 혈소판 헌혈자를 구하는 일은 환자가족에게 너무나 큰 짐이고 고통이었다.

국가인권위 점령한 백혈병 환자와 그 가족들

2006년 8월 23일 백혈병 환자와 그 가족들은 국가인권위원회 7층 인권상담센터를 15일간 점거농성 하면서 '혈소판 공급 부족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2006년 8월 23일 백혈병 환자와 그 가족들은 국가인권위원회 7층 인권상담센터를 15일간 점거농성 하면서 '혈소판 공급 부족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했다.
ⓒ 안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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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못한 백혈병 환자와 그 가족들은 2006년 8월 23일 급기야 국가인권위원회 7층 인권상담센터를 점거했다. 그리곤 '백혈병 환자가 직접 피를 구하지 않게 하라'며 15일간의 농성에 들어갔다. 혈소판을 구하러 뛰어다니는 가족들의 고통을 미안한 마음으로 곁에서 지켜본 백혈병 환자들까지 농성에 참여했었다. 

언론의 보도가 이어졌고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자 보건복지부, 적십자사, 의료기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여러 차례 대책회의를 한 후 '의료기관은 당일 혈소판 혈액 신청을 하지 않고 사전에 미리 예약을 하고, 적십자사는 전국의 혈액원을 네트워크화해서 사전예약한 혈소판을 공급하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바로 시범사업에 들어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2007년부터는 혈액이 특히 부족한 하절기 방학, 휴가 때나 동절기 방학, 혹한기를 제외하고는 환자가족들이 혈소판을 직접 구하는 일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백혈병 환자와 그 가족들은 혈소판 부족 문제 해결과정을 지켜보면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혈소판이 부족했던 이유가 헌혈자들이 혈소판 헌혈을 적게 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선 적십자사는 혈소판 채혈을 하는 것보다 전혈 채혈을 하는 것이 수익면에서 유리했기 때문에 혈소판 채혈에 소극적이었다. 또 보관기간이 5일인 혈소판을 많이 채혈했다가 폐기되면 그 비용을 적십자사나 병원이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적십자사는 가급적 적게 채혈하고 병원은 가급적 적게 신청했고, 때문에 이러한 혈소판 부족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다. 결국, 돈 때문에 혈액암 환자가족 수만명은 구하지 않아도 되는 혈소판을 그동안 구했던 것이다.

RH-혈액 공급 부족 해결방법, 혈액 적정재고 유지뿐

이번 혈액암 환자 유운이의 사망원인 중 하나로 예상되는 RH-B 혈소판 공급 부족도 정부나 적십자사에서 RH-혈액형의 연간 수급규모를 예상해 사전에 기획채혈을 하고 적정분량의 재고를 유지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RH-혈액 공급 부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혈액 적정재고 유지를 해야 하고 병원이 환자나 그 가족들에게 혈액을 구하도록 요청하는 것을 금지시켜야 한다.
 RH-혈액 공급 부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혈액 적정재고 유지를 해야 하고 병원이 환자나 그 가족들에게 혈액을 구하도록 요청하는 것을 금지시켜야 한다.
ⓒ 안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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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십자사와 병원이 적정재고 유지를 꺼리는 이유는 유통기간 경과로 혈액이 폐기되었을 때 그 비용을 자신들이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혈액 폐기량이 가장 적은 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국회 국정감사 때 아까운 혈액을 폐기한다고 적십자사를 호통치는 국회의원들을 자주 본다. 혈액 폐기량이 많은 것은 당연히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혈액 폐기량이 세계에서 가장 적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는 혈액 재고분이 부족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고 그 피해는 수혈이 필요한 환자들에게 그대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놓고 볼 때, 적정재고 유지를 위한 혈액 폐기분에 대해서는 그 비용을 정부가 보조하거나 혈액수가에 반영해야 RH-혈액 공급 부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일본도 폐기를 감수하면서 RH-혈액의 적정 재고 유지를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이렇게 하게 되면, 정부와 적십자사는 혈액수가 인상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06년 혈소판 혈액 공급 부족 문제도 혈소판 혈액수가 인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혈액수가 인상은 고스란히 국민의 경제적 부담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필요하다.

RH-B형 혈소판을 제대 수혈받지 못해 사망한 정유운 환자의 슬픈 사연을 계기로 정부와 적십자사는 RH-혈액형 공급부족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아울러 의료기관이 환자나 환자가족들에게 혈액을 직접 구해오라고 요구하지 못하도록 혈액관리법 개정 등 입법적인 보완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안기종 기자는 한국백혈병환우회 대표로 일하고 있습니다.



태그:#헌혈, #RH-, #혈액, #혈소판, #안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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