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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신혼여행에서
 25년 전 신혼여행에서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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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하하, 이건 완전히 형인데. 형 친구들한테 보여주면 형 사진이라고 해도 믿을 거야. 어쩌면 이렇게 똑같지?"
"야, 아빠도 젊었을 땐 날씬했었네. 머리숱도 많고 지금 봐도 훈남인 걸."
"근데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지? 지금은 엄마랑 아빠랑 완전히 망가졌네."

방 정리를 하던 두 아들이 재미난 것을 발견했다는 듯 웃고 야단들입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나 다가가 보니 25년 전 남편과 저의 결혼사진 앨범을 펴 놓고 품평이 한창입니다.

"엄마는 그땐 조금 아니다. 아빠가 훨씬 멋진 걸. 이래서 엄마가 아빠를 잡았구나. 크크크…."
"그래 내가 결혼하자고 졸랐다, 왜? 내가 눈에 콩깍지가 씌어가지고…."

그래, 내가 결혼하자고 졸랐다

남편을 처음 만난 건 1980년 가을입니다. 신입생으로 처음 경험해 보는 대학 축제의 파트너로 소개를 받은 사람이 그였거든요. 그와의 만남은 첫 만남부터 무척이나 삐끄덕 거렸습니다. 소개팅 장소에 한 시간이나 늦게 나타난 것도 모자라 친구까지 대동하고 나온 '몰매너'까지. 후에 들어보니 한번 보고 그만둘 의미 없는 만남일 거라 생각하고 성의없이 나왔던 거라더군요.

대부분의 축제 파트너들이 그렇듯 '급 만남'은 결국 '급 결별'로 이어졌지만 이상한 것은 그 후 몇 년간 몇몇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중에도 그의 첫 인상이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이런 것을 '인연'이라고 말하는 모양입니다.

알 수 없는 인연의 끈이 서로를 이어주고 있었는지 우린 서로 다른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남편과 같은 과에 다니고 있는 동창을 통해 간간이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헤어진 지 2년 만에 마치 오래전 헤어진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듯 우연을 가장해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게 되었지요.
     
그냥 편한 친구로 지내자던 처음의 결심은 얼마가지 못해 무너져 버렸습니다. 과년한 청춘 남녀가 만나 그저 친구로만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지요.

아버지의 선언 "결혼할 거 아니면 헤어져"

그렇게 조심스럽게 사랑을 키워가고 있을 즈음. 집에서는 결혼의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나이 스물넷이면 무조건 결혼을 해야 한다는 아버지 뜻은 강경했고 급기야 집안에서는 저의 맞선자리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거론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저…. 사귀는 사람있어요. 결혼은 아직 모르지만 그 사람과 더 사귀어 보고 싶어요."
"사귀긴 뭘 사귄다고 그래. 결혼 할 상대가 아니라면 정리하고 적당한 혼처를 잡아 줄 테니 선봐서 시집가라. 그 녀석은 너와 결혼할 생각도 없고, 있다 해도 결혼할 여건도 아니지 않니."
"싫어요. 그 사람 아니면 싫어요."
"니가 눈에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구나. 그 녀석이 뭐 볼 거 있다고 고집을 부려?" 

강경하신 아버지의 성격을 비추어 볼 때 가만히 있다가는 얼마지 않아 아버지가 골라주신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결국 큰 결심을 했습니다. 낯모르는 남자와 선을 봐서 결혼을 하느니, 비록 대학교 4학년이기는 했지만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 남자친구에게 후회없이 프러포즈라도 한번 해보자는 심산이었지요.

"저기… 아무래도 이런 만남은 오래하기 어려울 것 같아. 집에서는 자꾸 선봐서 시집가라고 하고. 우리 만나는 것도 다 아시는데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게 아니라면 헤어지라고 그러시는데. 그냥 헤어지든가…. 아님 결혼을 전제로 부모님 허락을 받고 만나든가. 그냥 우리 결혼하면 안 될까? 내년에 약혼하고 후년에 결혼하면."

선전포고와 같은 프러포즈를 받은 남자친구의 당황한 얼굴이 지금도 어제처럼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물론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결혼까지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을 텐데, 어느날 갑자기 여자 친구가 정색을 하며 결혼하지 않으려면 헤어지자고 하니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저 역시 '결혼'이라는 선전포고를 해 놓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누가 봐도 결혼할 여건이 되지 않는 남자친구의 입장을 잘 알기에 혹시 여기서 우리의 만남을 접자고 해도 질척거리며 매달리지는 말자며 수없이 자신을 설득했습니다.

부모님 입장에서야 딸의 남자친구라는 녀석이 '결혼'이라는 말에 부담을 느껴 스스로 물러나길 바라셨고 기대하셨겠지만 남자친구는 부모님들의 기대와 달리 무모하게도(?)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에 동의하며 양가의 반대에 맞서 싸워보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아마 그의 눈에도 나만큼이나 두꺼운 콩깍지가 씌워져 있었던 모양입니다.

가난한 대학원생 남편과 스물넷 어린신부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가난한 대학생과 결혼하겠다는 딸을 순순히 받아들여줄 부모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철없는 딸은 사랑 하나만 있으면 살 수 있으니 허락해 달라 우기지만 부모 입장에서야 쉽게 결혼을 허락해 줄 리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자식이기는 부모없다는 말처럼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에도 우린 마침내 결혼을 했습니다. 당시 스물넷 어린 신부였던 제 마음 속에는 결혼에 대한 기대와 희망만큼이나 걱정하고 반대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잘 살아 보이겠다는 오기 역시 가득했답니다.

사랑 하나만 가지고도 얼마나 잘 살 수 있는지 보여주고야 말리라 독한 맘 품고 한 결혼. 하지만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환경과 여건에 따라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변하고 달라질 수 있는지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남편이 아르바이트로 벌어오는 생활비를 가지고는 결혼 전 친정에서 누리던 생활의 여유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결혼할 때 가지고 간 작은 비자금마저 동이나 그야말로 생활비를 걱정해야하는 날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은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생활은 어려웠지만 적게 벌든 많이 벌든 주어진 환경에서 가정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남편의 당당한 모습을 볼 때마다 더 큰 신뢰와 기대 그리고 사랑이 생겨났지요. 

생각해보면 그를 처음 만나던 날 이미 제 눈에 평생을 벗겨내지 못할 초강력 콩깍지가 씌워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눈에 콩깍지가 씌면 마마자국도 보조개로 보인다는 말처럼 남편의 모든 면이 그렇게 좋아만 보였겠지요.   

벌써 25년... 왜 아직도 남편이 사랑스럽지?

결혼 25주년 기념여행중에
 결혼 25주년 기념여행중에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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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결혼 25년이 된 우리 부부. 연애기간을 포함해 30년 가까이 함께 지내며 서로의 뇌파까지 공유할 정도로 하나가 되었다고 공언하지만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른 부부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적인 어려움, 고부간의 갈등, 아이들의 교육문제, 사소한 자존심 싸움까지….. 수도 없이 부딪치며  '이혼'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지요.

하지만 위기가 닥칠 때마다 눈에 씌인 콩꺼풀은 저의 이성을 마비시켜 놓곤 했습니다. 싸우고 돌아선 남편의 힘없는 뒷모습이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가 없고, 사과 한 마디 하지 않는 그의 지독한 자존심마저 왠지 이해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그래서 먼저 사과하고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이게 다 여전히 벗겨지지 않은 콩꺼풀 때문이랍니다.

사람들은 경고합니다. 콩깍지가 벗겨지는 어느 날, 결혼의 실체가 행복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당신 남편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괜찮은 남자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 실망은 가히 충격적일 것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눈에 씌인 콩깍지가 점차 벗겨지기 시작하던 그 어느 날부터 알게 모르게 제 마음에 단단한 콩깍지가 씌이기 시작했으니까요. 눈에 씌인 콩깍지는 유효기간이 있다지만 마음에 씌인 콩깍지는 그보다 훨씬 단단해서 쉽게 닳지도 벗겨지지도 않을 듯합니다.

잘 보이는 안경을 쓰고 세상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뜯어보고 살펴보는 것도 좋겠지만 때로는 안경을 벗어두고 스스로 볼 수 있는 만큼만 보고 사는 것도 행복한 일이랍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눈에, 마음에 콩깍지를 쓰고 그렇게 남편을 바라보며 살려고 합니다. 약간은 미친 척, 약간은 모자란 척 오직 남편만, 오직 우리의 행복만을 바라보고 살려 합니다.


태그:#결혼, #이혼, #콩깍지, #부부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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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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