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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6일)는 저녁을 먹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창밖 풍경을 구경하고 있는데, 전봇대에 매달아 놓은 스피커에서 굵직한 남자 목소리로 안내방송이 나오더군요. 2010 남아공월드컵 16강전 첫 경기 관련 내용이었습니다. 

"문화마을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밤 11시에 월드컵 축구 한국과 우루과이 16강전이 열립니다. 8강행 티켓을 놓고 벌어지는 중요한 경기라서 주민자치위원회와 체육회에서는 면사무소 강당에 모여 응원하기로 했습니다. 모두 오셔서 한국팀을 응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집에서 조용히 시청하는 것보다 마을주민과 어울려 응원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해서 11시 조금 못되어 집을 나섰는데요. 집집마다 안방에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축구대표팀의 8강행을 원하는 마음과 열기는 수십만 명이 모여 거리응원을 펼치는 서울이나 시골이나 다를 게 없더군요.  

가족이 TV 앞에 둘러앉아 응원하는 안방 풍경이 그려지면서 월드컵 열기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재차 확인했는데요. 평소엔 밤 9시만 되면 캄캄했고, 객지로 나간 자녀들이 고향을 찾아오는 섣달 그믐날 밤에도 마을이 이렇게 흥분의 도가니가 되거나 소란스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0대로 보이는 부부가 월드컵 로고가 그려진 빨간 티셔츠 차림의 꼬마 셋과 손잡고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꼬마들은 걸어가면서도 막대풍선을 흔들어대며 '대~한민국!'을 외쳐댔는데요. 비가 내리는 길거리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모습만큼이나 보기 좋았습니다. 

면사무소 강당 풍경

면사무소 강당에 들어서니까 40여 명의 남녀노소가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며 응원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린이들 응원 열기가 어른들보다 훨씬 뜨거웠는데요. 앞에서 '대~한민국!'을 외쳐대는 꼬마가 응원단장처럼 보였습니다.

어른들 앞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는 이준희 학생.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리더십이 대단한 학생으로 보였습니다.
 어른들 앞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는 이준희 학생.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리더십이 대단한 학생으로 보였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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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뻘 되는 응원단장의 선창에 막대 풍선으로 박자를 맞추며 즐거워하는 마을 이장 아저씨들.
 손자뻘 되는 응원단장의 선창에 막대 풍선으로 박자를 맞추며 즐거워하는 마을 이장 아저씨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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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경기가 시작되었고, 응원 열기가 달아오르기도 전에(전반 8분) 우루과이 선수가 재빠르게 한국 문전을 향해 달려 들어가 선제골을 넣자, 탄식 소리가 강당에 가득했는데요. 간간이 들려오는 "괜찮아!", "괜찮아!" 소리가 위로처럼 들렸습니다.  

선제골은 허용했지만, 응원 열기는 식지 않았습니다. 엄마와 함께 열심히 응원하던 나포초등학교 1학년 이준희 학생이 자연스럽게 응원단장이 되었는데요. 꼬마 응원단장이 앞에서 '대~한민국!'을 선창하면 어른들은 막대풍선으로 박자를 맞추며 따라 외쳤습니다. 

고국의 응원 열기가 남아공까지 통했는지 후반 23분쯤 이청용 선수가 헤딩으로 골을 넣으니까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환호성을 지르며 얼싸안고 기뻐했는데요. 여기저기에서 "끝내주게 들어갔네!", "시원허게 들어갔네!"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면사무소 강당 풍경.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펼쳐지는 응원 열기가 아프리카 남아공까지 전해져 16강 진출을 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면사무소 강당 풍경.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펼쳐지는 응원 열기가 아프리카 남아공까지 전해져 16강 진출을 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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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점 상황이 되자 볼이 중앙선을 넘어가거나 한국팀 선수들이 우루과이 진영으로 공격해 들어갈 때마다 환호성이 터졌는데요. 자리에서 일어나 꼬마 응원단장과 함께 춤추며 열기를 돋우는 아저씨도 있었습니다. 

동생하고 응원하러 왔다는 나포초등학교 5학년 김푸름 학생에게 한국팀 선수 중에 누구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거침없이 기성용 선수라고 하더군요. 박지성, 차두리 선수보다 더 좋으냐니까 한국팀 선수들 중 제일 미남이고 잘생겼기 때문이라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할머니하고 엄마는 집에서 TV를 보고, 자기는 동생하고 응원하러 왔다는 김푸름 학생(우측). 순진하면서도 솔직하고 발랄한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할머니하고 엄마는 집에서 TV를 보고, 자기는 동생하고 응원하러 왔다는 김푸름 학생(우측). 순진하면서도 솔직하고 발랄한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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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 차두리 선수가 들으면 서운하게 생각하겠다고 했더니 "어떻게 알아요?"라고 되물으며 수줍은 표정을 짓더군요. 옆에 앉아 있던 친구가 다가와 포즈를 취하기도 했는데요. 순수하면서도 발랄한 어린이들 모습이 4년 후 8강을 예고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국팀이 동점골을 넣고 1-1 공방전이 계속 펼쳐지면서 게임이 그대로 끝나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후반 35분쯤 우루과이 선수 수아레스가 코너킥에서 흘러나온 볼을 받아 추가골을 넣으니까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는데요. 그래도 사람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투혼을 불살랐으나 결국 한국이 아깝게 지고 말았는데요.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1-2로 뒤진 상황에서 인저리 타임 3분이 주어지자 한목소리로 "저 시간이면 넣을 수도 있다!"며 기대했는데, 어긋나니까 허탈해 하는 모습이 보는 이를 안타갑게 했습니다.

바닥에 깔았던 자리를 치우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때까지도 형광등이 켜져 있는 집들이 많았고, 아쉬워하는 탄식소리와 함께 "1대 2로 졌지만, 한국팀 잘혔다!" 소리가 담을 넘어 귀에까지 들려왔습니다.


태그:#월드컵 응원, #나포면사무소, #16강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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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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