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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넨…… 생각을 잘못했어. 자네의 길은 옳은 길이 아니었어. 일찍이 고균의 뜻은 장했으나 갑신년의 거사가 오히려 나라의 화를 자초했던 것처럼 자네의 길은…… 조선의 망국을 앞당기는 길일뿐이었네. 자네는…… 그렇다면 내가 가는 길이 과연 조선의 국체를 보존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테지. 그건 나도 모르겠네. 자네가 실패했던 것처럼…… 아마…… 나도 실패하겠지. 하지만…… 자네는 최악의 길을 선택했네. 자네는…… 자네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 하네." - '제국익문사'2권, 280~281쪽

죽어가는 우범선에게 총을 겨눈 채 건네는 장동화의 말은 그들 두 사람의 운명에 대한 자조어린 고백이다. 강동수의 소설 <제국익문사>는 장동화가 걷는 '근황의 길'과 우범선이 걷는 '개화의 길'을 대치해 놓고, 두 사람을 잇는 이인경을 전면에 내세워 구한말의 역사를 재조명해 낸다.

두 권짜리 두툼한 장편소설이 분량 면에서 얼핏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는데, 일단 첫 장을 열고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구한말의 역사적 상황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하고 추리기법을 원용해 전개하는 스토리는 인물의 동선과 사건 전개에 박진감을 불어넣어 소설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한다.

근황의 길과 개화의 길

<제국익문사> 표지
 <제국익문사> 표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 이인경은 대한제국의 비밀첩보기관인 '제국익문사' 요원으로 조선과 일본과 상해를 배경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활극을 펼쳐보인다. 이 활극을 제대로 따라잡기 위해선 이인경이라는 인물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인경은 명성왕후 시해범인 이주회의 아들로 아버지가 처형당한 뒤 장동화에게 맡겨진다. 이인경은 스승인 장동화를 아버지처럼 믿고 의지하면서 제국익문사의 핵심요원으로 성장한다.

장동화는 고균 김옥균 밑에서 이주회 우범선과 함께 개혁을 꿈꾸었던 인물로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근황의 길을 선택한다. 이때 뜻을 함께했던 우범선은 기록에 따르면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피신한 뒤 조선 자객에게 피살된다.

소설은 이 대목에서 팩션의 묘미를 발휘한다. 작가는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이기도 한 우범선을 소설 속에서 다시 살려낸다. 즉 제국익문사의 활약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소설무대에서 우범선은 끝까지 개화의 길을 고집하는 혁명가로 부활하는 것이다.

우범선은 일본세력을 이용해 왕정을 폐하고 독립적인 공화정을 수립하려는 목표에 일생을 건다. 혁명가로 살아온 그의 생애는 일본 망명생활 틈틈이 써나간 회고록을 통해 전말이 밝혀진다. 그 회고록에는 일본에 빌붙은 국모시해범으로 알려진 우범선의 갈등과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왕비가 지키려는 나라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어떤 내용이 결락돼 있었다. 무엇을 위해, 어떤 나라를 만들기 위해 그녀는 권력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내용이 없는 왕비의 집념은 내게 공허해 보였다. 왕비가 지키려던 나라의 무내용을 나는 견딜 수 없었다. 왕실의 안녕과 합중공화. 그것은 처음부터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그 두 개의 정치적 목표 사이에 거대한 심연이 놓여있었다. - '제국익문사'2권, 12~13쪽

이제 나는 국적이 되었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정수리에서 등판으로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가 찌르르 흘러내리는 듯했다. 나는 다시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 국적이다. 나는 신하로서 군사를 이끌고 지엄한 궁궐을 범했다. 임금이 머무는 지밀이 외적의 발길에 짓밟히도록 방조한, 아니 외적의 칼날에 지존한 왕비의 목숨을 던져준 자다. 나는 이 지상에 말이 남아있는 한 그 어떤 욕으로도 다할 수 없는 극악한 역도로 손가락질당할 것이다. 글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만대에 걸쳐 오늘의 내 행적이 전해지고 전해질 것이다.' - '제국익문사'2권, 28쪽

이제 나는 국적이 되었다! 육성이 들려오는 듯한 회고록에는 정치 망명객의 쓰라린 심정이 그대로 묻어난다. 어쩌면 이 회고록이야말로 작가가 소설 <제국익문사>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역사 이면의 진실은 아닐지…….

명성황후로 대표되는 수구당, 과연 올바른 노선 밟았나?

이에 대해 작가 강동수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민족적 분노는 당연한 것이지만 명성황후로 대표되는 수구당이 과연 올바른 노선을 밟았는가를 따져보는 것 역시 이와 별개로 필요한 일"이라면서 "소설 속의 우범선은 한 개인이면서 동시에 작가의 상상 속에서 당대 개화당의 이념이 뭉뚱그려져 육화된 인물인데, 그를 통해 개화당이 추구한 정치적 이념의 지형도와 그 한계를 짚어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우범선은 일본에 머물면서 박영효를 비롯한 개화세력을 모아 공화제 정부를 세우려는 거사를 도모하는데, 이를 저지할 임무를 띠고 찾아가는 인물이 바로 그의 옛 동지의 아들인 이인경이다.

우범선은 자신을 찾아온 이인경의 정체를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하며 회고록을 건네준다. 때문에 인경에게 지령을 내리는 장동화의 근황의 길과 우범선이 꿈꾸는 개화의 길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채 대비되어 드러나고, 그들이 선택한 길에 대한 판단의 몫은 독자에게 맡겨진다. 

우연인지 기획인지 아무튼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나온 소설 <제국익문사>는 베일에 가려졌던 구한말의 첩보기관을 현실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소설가 조정래는 <제국익문사>에 대해 "박제된 역사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장쾌한 서사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애국과 매국 사이에서의 갈등을 다루는 균형 잡힌 시선에 신뢰가 간다"며 "가히 경술국치 100년 만에 나온 '대한제국 멸망사'로 읽힐 만하다"는 평을 내놓고 있다.

당초 작가는 우장춘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국모를 시해한 부친에 대한 원죄의식을 그리려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 조센진이라는 놀림을 받으며 자랐던 우장춘 박사의 내면을 투영시킨 인물 이인경이 보여주는 인간적 매력은 심상치 않다. 특히 우범선의 딸 아사코와의 만남과 사랑, 이별을 그린 장면들은 자칫 거대담론으로 흐를 법한 소설 전편에 애틋한 감성을 얹어놓는다. 또한 장동화 우범선 등이 스스로 선택한 삶에 대해 취하는 치열함, 고독한 결단은 소설에 또 다른 매력을 더하고 있다.


제국익문사 2 - 대한제국 첩보기관

강동수 지음, 실천문학사(2010)


태그:#제국익문사, #강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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