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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의 유토피아
 조선인들의 유토피아
ⓒ 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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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다는 노래를 부른 이에게 지상 낙원은 사랑하는 사람과 지낼 수 있는 작고 아담한 집이었을 것이다. 또한 어떤 이에게 지상 낙원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낙원은 일하고 싶은 모든 자들이 부지런히 일하고 오늘을 사는 이들이 행복한 세상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우리는 모두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 즉, 이상향을 꿈꾼다. 이러한 이상향에 대한 갈망은 삶이 고되면 고될수록, 현실이 아프면 아플수록 다채로워지기 마련이다.

이상향, 이상적 사회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이 토마스 모어이다. 그는 <유토피아>라는 그의 저서를 통해 16세기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르네상스 시기의 사람들이 꿈꾸었던 이상향을 서슴없이 보여주었다. 교회나 왕의 횡포가 없는 공동으로 일하고 공동으로 나누는 사회라는 그의 세계는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세계였고, 나아가 한 인문주의자의 정치적 고민이 그대로 드러나는 세계였다.

또한 우리는 이상적 사회라고 하면 무릉도원을 떠올리기도 한다. 도연명이 적었다는 <도화원기>에 나타난 무릉도원은 도화가 만발한 아름다운 곳으로 적은 사람들이 싸우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사는 노자의 소국과민을 실천하는 사회였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이상향은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고 달라지기 마련이다.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그리는 세계가 달라지니 이상향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모태로 한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사람이 없음은 안평대군이 놓인 개인 처지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저자의 견해가 일견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저자는 조선인의 유토피아를 보여주기 위해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안평대군이 꿈에서 보았던 이상향에 대해서 보여줌으로써 저자는 조선시대에도 이상향에 대한 갈망이 존재했을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이어졌는가에 관한 호기심을 독자에게 던져준다. 그리고 저자는 여기에 대해 비교적 충실히 답한다. 여러 이상향에 대한 이야기를 수집하여 이야기의 구조를 파헤치기도 하고 시대 순으로 이상향의 이야기들이 조금씩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면서 이상향이 현실상황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또한 조선시대의 사람들에게 이상향은 어떤 의미였는지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있다.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을 200페이지에 담아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호기심과 저자의 충실한 답은 서로 충돌하지 않고 부족함 없이 교차하여 혹은 새로운 답을 내놓으며 책 안에서 잘 어우러진다. 한마디로 말해 읽기 편안하다는 것이다. 흡입력 있는 책보다 좋은 책은 읽음이 편안한 책이다. 문장이 말처럼 답처럼 편하게 전해져 쉽게 펼 수 있는 책이 참으로 좋은 책인데 이 점에서 이 책은 좋은 책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할 것이다.

역사는 과거, 현재, 미래의 대화라는 EH 카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히 이상향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이상향의 모습과 이상향을 찾고자 혹은 만들고자 노력했던 조선인들의 모습일 것이다.

저자는 시대에 따라 이상향의 모습은 변해왔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호란이 발발했던 시대에 사람들의 이상향은 슬프지만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었다. 개화기의 문물이 들어오던 조선 말기 사람들의 이상향은 문물을 잘 이용하면서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가지는 이상향은 모습은 무엇인가? 과학이 발달하고 그를 통해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 끊임없이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 건강해지고자 하는 욕망, 좀 더 누리고자 하는 욕망을 표출하고 있지만 이는 결코 이상향을 위한 것들은 아니다. 그저 이는 욕망 채우기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자연과의 조화를 꿈꾸며 내가 가진 만큼에 만족하며 살기를 바랐던 조선인들의 이상향만큼 조화롭거나 아름답지도 않다.

우리가 하는 모든 물질의 발명이나 과학의 발달은 그저 편하게 그저 자연을 이용하며 우리의 욕구를 채우는 모습뿐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에겐 오늘날 아름다운 이상향은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가장 불행한 이는 꿈꾸지 않는 자이고 가장 불행한 사회는 꿈꾸지 않는 사회이다.

고로 저자는 조선인들의 유토피아를 통해서 욕망의 점철이 아닌 진정 같이 사는 꿈을 꾸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꿈을 꾸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욕망, 욕구가 아닌 꿈을 꾸는 것은 살아가는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아름다운 꿈일수록 아름다운 희망을 의미한다. 현대인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나 기술의 발달이 아니라 도화가 뒤덮인 무릉도원과 같은 아름다운 꿈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조선인들이 그러하였듯 꿈을 꾸었으면 이제 이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책에서는 이상향을 이루기 위해 실천하였던 이들이 등장한다. 서양의 19~20세기에 등장했던 보헤미안들처럼 그들은 공동체를 만들어 삶을 가꾸며 살았다. 이들이 살았던 판미동 일대는 지금도 우리에게 그들의 이상향이 존재하였고 이를 이루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좋은 증거이다.

100여년을 유지했다는 그들의 공동체는 비록 이후 사라졌지만 그들이 이루고자 했던 꿈과 그 노력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또한 조선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에 이상향을 가리키는 이름들을 붙이고는 했다. 예컨대 우암 송시열이 살았다는 화양동천이나 청학동천, 청계동천과 같은 지명들은 이상향을 꿈꾸던 조선인들이 자신이 사는 곳에 붙인 이름이다.

이는 내가 사는 공간이 이상적 공간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이상적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함께 들어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공간의 이름에서 그들이 이상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의지를 읽는다. 나는 지금 이상향을 위해 어떤 노력과 실천을 하고 있는가?

조선인들에겐 분명 이상향이 존재했다. 작게는 동천, 무릉도원, 낙원이라는 이름의 이상향들이 있었고 몇몇의 사람들은 이를 이루기 위해 직접 마을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크게는 유교사회가 지향하는 대동 사회라는 꿈이 있었을 것이다. 덕으로 다스리는 국가, 그들의 이상향은 작게 혹은 그리고 크게 진행 중이었다.

2010 대한민국은 이제 어떤 이상향을 그려야 할 것인가? 그리고 작게 나는 어떤 무릉도원을 꿈꾸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를 이룰 의지와 실천의 덕목을 가지고 있는가? 책을 덮고 나는 이 세 개의 물음을 내게 묻는다. 덮인 책장 사이로 조선인들이 내게 우리가 그랬듯 꿈을 꾸고 움직이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방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나의 이상향에 걸맞은 정책을 가진 후보에게 희망을 걸어보는 것은 내 이상향에 대한 실천의 한 걸음이다.


태그:#조선인들의 유토피아, #유토피아, #이상향,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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