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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은 우리 부부가 결혼한 지 만 10년이 되는 달이었다. 10년 동안 나를 잘 견디어준 아내가 고맙고, 그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 것 같아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무엇으로 고마움을 표할까 생각하다가 '10년만의 신혼여행'을 명분 삼아 세 아이들을 당당하게 동생네에 맡겨 놓고, 일본 홋카이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결혼을 결정하고, 금전과 시간이 빠듯하다는 이유로 미루다보니 십년이 훌쩍 지나 버린 것도 사실이고,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과 서로 믿고 의지하며 10년을 사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싶어 여행티켓을 질러 버렸다는 게 보다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하루종일 눈 내리는 홋카이도의 남쪽 항구 하코다테 

호텔라운지에서 바라본 하코다테 해변과 바다. 모래사장 가운데 김을 모락 모락 내며 온천물이 바다를 향해 흐르고 있다.
▲ 하코다테의 검은 바다 호텔라운지에서 바라본 하코다테 해변과 바다. 모래사장 가운데 김을 모락 모락 내며 온천물이 바다를 향해 흐르고 있다.
ⓒ 김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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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홋카이도(北海道)에는 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멈추었나 싶으면 내리고, 바람이 불면  너울처럼 일렁이며 흩어지는 것이 또 눈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종일 눈이 내리는 북국의 겨울은 언뜻 추울 것 같지만 포근했다. 짧게 피었다가 일순간에 지고 마는 벚꽃처럼, 봄바람에 안긴 새의 깃털처럼 공중을 너울거리며 종착지를 향해 날아가는 눈발에 가슴을 여미는 것은 나만이 아닌 것 같았다. 

19세기 개척도시풍경이 남아 있는 홋카이도의 남쪽 항구 하코다테시는 여행의 시작점이었다. 우리 부부는 하코다테시 외곽의 바닷가에 있는 유노카와 온천에서 첫날밤을 묵었다. 눈이 내리는 노천탕에서 바라본 아침 바다는 검었고, 파도는 여기 저기 피었다가 사라지는 눈꽃처럼 눈부신 흰 포말을 차례로 부서뜨리고 있었다.

하코다테 역에서 삿포로행 북두 5호라는 특급열차를 탔다. 아침 햇살이 선명하게 역사를 비추고 있었다. 얼음장처럼 투명한 창공에 공기는 맑았으며, 열차는 깨끗했다. 부드럽게 휘어진 곡선의 철로를 따라 가느다란 기적을 울리며 도시를 벗어난 북두 5호는 곧바로 산을 타고 오르더니, 어느새 숲속을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깊은 우물이 있는 노르웨이의 숲

하코다테에서 삿포로로 가는 열차의 첫번째 차량에서 바라본 선로와 터널 모습
▲ 눈덮인 선로와 터널 하코다테에서 삿포로로 가는 열차의 첫번째 차량에서 바라본 선로와 터널 모습
ⓒ 김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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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운송 수단 가운데 추억을 되새김하는데 가장 유용한 것이 아마 기차일 것이다. 선박이나 비행기에서 보는 풍경은 단조로워질 가능성이 높지만, KTX나 신칸센처럼 아주 빠른 열차가 아니라면 열차 밖의 풍경은 안달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면서도 곡선의 구간에서는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여유 있게 움직인다.

맑았던 하늘이 그새 어두워지고 눈이 내렸다. 키가 큰 침엽수들이 빽빽한 숲에는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휙휙 스쳐가는 은빛 나는 나무들을 보면서 새삼 우리나라보다 훨씬 북쪽지방으로 왔음을 실감했다. 핀란드 노르웨이와 같은 북유럽의 나무들도 이런 은빛을 갖고 있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끼의 소설 <상실의 시대, 원제: 노르웨이의 숲>의 주인공 와타나베는 독일 함부르크 공항에 도착한 비행기에서 비틀스의 노래 <Norwegian Wood>를 들으며 괴로워했다. 그는 낯선 땅에서 비로소 자신이 잃어버린 시간, 죽었거나 사라져간 사람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지난 기억들을 생각했다. 비틀스의 노래를 듣지 못했지만, 노르웨이의 숲을 닮은 이곳에서 나도 지난 세월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며, 잃어 버려서 안타까운 것은 무엇이었는지 돌아보았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깜박 거리는 어둠이 스쳐간 시간에 대한 몇몇 잔상을 정지된 장면으로 보여주었다. 스물한 살, 회피하기 어려운 입대통지서를 받아들고 짧은 청춘과의 이별을 괴로워했었다. 스물여덟 살, 결혼도 일종의 거래라는 것을 깨닫고 좌절했었다. 서른두 살, 사랑이 서로 다른 문화와 원거리의 장벽 앞에 허망하게 안녕을 고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기차에 올라 눈덮인 숲과 나무들을 만났었다.

그사이 나는 결혼을 하였고, 아이 셋을 낳고서야 미루어진 '신혼여행'을 핑계로 다시 열차를 타고 깊은 우물이 있는 노르웨이의 숲을 지나고 있다. 이렇게 지난날을 가만히 돌아보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간이 흘러야 하고, 기억의 우물물을 걷어 올리는 특별한 공간이 필요한 것인가 보다.

잠시 잠간 기억을 되새김하는데 기차는 어느새 긴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의 첫 장면에서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라고 이른 것처럼 터널을 벗어나자 은빛 자작나무 숲은 사라지고 앞이 툭트인 넓은 눈밭이 나타났다.

'오누마 국정공원'이었다. 아직 상상 속의 노르웨이 숲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알래스카로 공간 이동을 한 것만 같았다. 섬이어서 평원이 있을 거라고 미처 생각치 못했는데, 마치 광활한 설원을 질주하는 <폭주열차>를 타고 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들떴다.

불안이 지배하는 폭주기관차를 타고 있지만... 

오누마 국정공원의 얼어붙은 호수가 눈에 덮여 있어서 마치 광활한 설원처럼 보인다.
▲ 눈덮인 오누마 국정공원 호수 오누마 국정공원의 얼어붙은 호수가 눈에 덮여 있어서 마치 광활한 설원처럼 보인다.
ⓒ 김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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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기관차: Runaway Train>는 미국 영화이지만, 이야기는 일본인인 '구로자와 아키라'의 각본에 기대고 있다. 그는 <칠인의 사무라이>의 산중의 고립된 마을이나, <폭주기관차>처럼 곧잘 폐쇄된 공간을 활용하여 삶을 은유했다.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지구는 평화롭고 아름답다.

그렇지만 인적없는 들판에서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기적을 울리며 질주하는 열차는 무한의 경쟁체제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불안을 안은 채 사라져갈 인생과 무엇이 다를까. 어차피 한번 뿐인 인생이라면, '이치고 이치에'(一期一會)의 순간에 힘차게 피었다가 눈발처럼 흩날리는 벚꽃처럼 자신을 버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모두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가정과 직장이라는 기관차의 헤게모니를 틀어쥐기위해 격렬하게 싸우고 있지 않은가?

"You lost!", "I'm free!"

눈 덮인 알래스카의 평원을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던 영화 속의 <폭주기관차>는 하얀 눈처럼 사라질 운명이었다. 영화 속 최고의 감동은 일체였던 기관차와 객차가 분리되는 장면이다. "I'm free"를 외치며 영웅은 기관차와 함께 눈밭 속으로 사라지고, 남은 자들은 평화를 얻었다. 단지 평범한 일상을 얻고자 교도소를 탈출했던 주인공이지만 진정한 자유는 이기적인 나로부터 벗어나는데 있다고 역설한다. 감동적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마치 지상에 안착하자마자 사라져 버리는 흰 눈과 같은 삶을 찬양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 많지 않다. 결혼도 거래처럼 이루어지고, 결혼중개업체의 등급 매기기가 자연스러운 현실에서 가정과 사회를 위해 눈꽃처럼 사라지라고? 

이른 아침 열차는 텅 빈 만큼 여유가 있다. 돌아보니 아내는 오른편 창가에 앉아 해안 쪽을 바라보고 있다. 결혼한 지 10년이나 되었지만, 아내는 여전히 자신의 창문을 갖고 싶어 한다. 손이 많이 가는 어린아이가 셋이나 되니 감히 자기 창문을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면 살아갈 마음이 처연하게 느껴진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벚꽃처럼 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열차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날에는 바람을 타고 공중을 너울거리며 끝없이 날아다니고 싶다. 참 이중적이다. 그렇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 지난 4월 8일은 저희 부부의 결혼 1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10년전 변변한 기념사진도 없고, 신혼여행도 가지 못했지만 3만원짜리 은반지를 약속의 징표로 기쁘게 받아준 아내 김현정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태그:#신혼여행, #홋카이도, #노르웨이의 숲, #폭주기관차, #하코다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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