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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선덕여왕>이 뮤지컬로 제작되어 지난 1월 5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올림픽 공원 우리금융아트홀에서 공연됐다. 드라마를 다시 뮤지컬로 제작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 아니다. MBC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대장금>을 뮤지컬로 제작한 바 있다. 뮤지컬 <대장금>은 시즌2까지 제작될 만큼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최근 문화계의 블루칩은 뮤지컬이다. 해외 유명 뮤지컬뿐만 아니라 국내 창작 뮤지컬까지 흥행몰이에 성공하면서 공연문화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침체되어 있던 공연문화계가 호황을 맞은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대규모 자본이 투입된 대형 뮤지컬에만 관객이 몰리고 있다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다. 

 

공연문화계가 호황을 맞을수록 내실을 다지는 것이 더욱 중요한데, 사회현실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를 담고 있는 작품은 갈수록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 지난 1월 13일부터 31일까지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서 공연된 연극 <리스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혁명을 꿈꾸었던 시기인 80년대, 대학가에서는 연극패들이 한창 인기였다. 연극은 책 속에 담겨 있는 혁명의 열정을 눈앞에서 재현해줌으로써, 관중의 피를 뜨겁게 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예술이었다. 그런데 'X세대 문화'로 대변되는 90년대 상업주의 문화가 대학가를 장악하면서 사회현실을 고발하는 연극은 대중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가 넘쳐나고 빈부격차가 갈수록 심화되는 이때, 우리는 연극공연의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물음에 진지하게 화답할 수 있는 연극인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문화창작집단 '날'과 같은 이들이 있다는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용산참사를 떠오르게 만드는 연극 <리스트>

 

문화창작집단 '날'은 2005년 <마마>, 2006년 <코뮌>, 2007년 <관동여인숙>, 2008년 <삽질>을 통하여 "연극공연의 사회적 공공성과 정치적 의미를 깊이 생각"해왔다. 이들의 다섯 번째 작품이 바로 <리스트>이다.

 

<리스트>는 한 부부의 이야기이다. 아내는 '병리적 이중인격의 자가치료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다. 아내에게는 항상 공정한 재판을 진행하는 판사로서 진실을 대면하며 산다고 믿는 남편이 있다. 아내는 매일 아침 성경을 읽어 주며 남편을 깨우는데, 이는 결혼 전에 남편의 어머니가 남편을 깨우던 방법이다.

 

이들은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화목한 부부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사건은 그들의 결혼 3주년 기념일에 발생하고, <리스트>는 바로 그 사건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추악한 현실을 고발한다.

 

아내에게는 강제철거 현장에서 할아버지를 잃고 철거용역깡패에게 강간당한 끔찍한 과거가 있다. 그 강제철거 현장에 새로 들어선 건물은 대형교회였는데, 그 대형교회 목사의 아들이 바로 남편이다. 또한 남편은 그 강제철거 현장에서 투쟁했던 이들에 대하여 유죄판결을 내린 세 명의 판사 가운데 한 명이다.

 

그들의 결혼 3주년 기념일에 아내의 복수가 시작되고, 남편은 "폭력적인 재개발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양심과 종교적 신념의 법에 준하여 선고"한다. 먼저 폭력적인 재개발 과정을 은폐하고 법과 원칙에 의한 정당한 재산권 행사로 포장해준 이들에게는 포괄적 살인죄, 폭행죄와 공권력남용죄 등이 적용된다. 다음으로 그 대형교회의 목사와 신도들에게는 예수의 이름으로 유죄를 선고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법정에서의 판결일 뿐, 남편은 실제 법정에서도 이런 판결이 내려지는 날이 오겠느냐고 질문하는 아내를 비웃는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리스트>는 5명의 목숨을 앗아간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한다. 용산참사 유가족들은 이명박 정권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와 함께 1년 가까이 투쟁한 후에야 겨우 정부의 사과를 받을 수 있었고, 용산참사 수사기록 3000쪽에 대한 공개 결정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재미와 의미 모두 쫓은 사회참여적 연극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는 <리스트>에 대한 추천의 글을 통하여 "인간의 삶을 부유와 빈곤으로 철저하게 갈라놓는 건설자본과 부르주아 권력의 폭압적 지배와 공권력 행사가 이에 저항하는 빈민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말하며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벼랑 끝 생존권 투쟁을 가공할 살상무기로 진압"한 정권의 무자비한 폭력을 비판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신도 수가 많은 교회를 가진 나라이며,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 역시 장로이다. 이런 나라에서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물론 교회들 역시 저마다 사회적 책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진정한 사회적 책임은 장로 대통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핍박당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리스트>에서 남편이 대형교회 목사의 아들이라는 설정과 강제철거 현장에 새로 들어선 건물이 대형교회라는 점은 무척 의미심장하다. <리스트>의 작·연출을 맡은 최철이 신학을 공부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감각적 욕망에 충실하여 재미만을 추구하는 상업적 공연이 가득한 현실에서 사회적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회참여적 연극을 통하여 모색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무척 소중하다.

 

앞으로 <리스트>와 같은 연극이 더욱 활발하게 창작되고 공연되기를 기대하며 <리스트>를 제작한 문화창작집단 '날'과 극단 '청국장'의 행보를 주목하고자 한다.


태그:#문화창작집단 ‘날’, #연극 , #리스트, #용산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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