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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성은 8세기 중엽 처음 세워져 14세기 말 재건축됐다. 남문 위에 걸린 '다리' 두 글자는 궈모뤄가 썼다.
 다리성은 8세기 중엽 처음 세워져 14세기 말 재건축됐다. 남문 위에 걸린 '다리' 두 글자는 궈모뤄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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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고성은 옛 남조국과 대리국의 도읍지였다.
 다리고성은 옛 남조국과 대리국의 도읍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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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난성 여섯 개 강대한 부족 출현, 몽사조가 통합해 남조국 건설

6세기 말 지금의 윈난(雲南)성 다리(大理)바이(白)족자치주에 여섯 개의 강대한 부족이 출현했다. 당나라에서는 이들을 육조(六詔)라 불렸다. 육조는 서로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성장했다.

8세기 초 육조의 균형 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남조(南詔)의 지도자 몽사조(蒙舍詔)가 당나라의 지지 아래 육조를 하나하나씩 통합해 나간 것이다. 당이 남조를 지원한 것은 티베트왕국 토번(吐蕃)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토번왕 송첸감포(松贊干布)의 막강한 군대를 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737년 몽사조는 육조를 하나로 통합하여, 얼하이(洱海) 변에서 남조국을 건국했다. 당은 곧 남조와 조공관계를 맺고 몽사조를 윈난왕으로 책봉했다. 하지만 남조와 당의 우호관계는 오래 가지 않았다. 남조는 사사건건 내정에 개입하던 당나라 지방관을 몰아내고 토번과 연합해 당에 맞섰다.

남조가 관계를 끊자 당나라는 곧 두 차례에 걸쳐 대군을 파견했다. 754년 검남(劍南)유수 이복은 무려 7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와 남조를 공격했다. 당시 당은 현종의 통치 아래 '개원의 치(治)'를 구가하던 전성기였다.

당의 대군이 물밀듯이 밀려와 다리에 이르렀지만, 남조군의 치밀한 전략에 대패하고 말았다. 특히 얼하이를 이용한 남조군의 수전으로 당군은 군대 전체가 몰사하는 참극을 맞았다. 남조인들은 멀리까지 와서 수장된 당군의 시체를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고 한 곳에 묻었다. 바로 다리 타이허청(太和城) 경내에 있는 만인총(萬人塚)이다.

세월이 흘러 766년 남조왕 각라봉(閣羅鳳)은 당과의 화친을 위해 남조덕화비(南詔德化碑)를 세웠다. 3800여자로 된 비석에는 그 참담했던 전쟁의 실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만인총 앞에는 대당남정장사지묘(大唐南征將士之墓)라는 비문도 남아 있다. 당이 남조와 화친을 기념해 세운 비석인데, 침략전쟁을 '남정'으로 둔갑시켰다.

눈 덮인 창산을 배경으로 고산에 펼쳐진 바다와 같은 호수 얼하이.
 눈 덮인 창산을 배경으로 고산에 펼쳐진 바다와 같은 호수 얼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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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하이는 사람의 귀 모양처럼 생겼다 하여 호수 이름이 붙여졌다.
 얼하이는 사람의 귀 모양처럼 생겼다 하여 호수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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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해발 3500미터인 창산, 중국에서 일곱 번째로 큰 호수 얼하이

남조국은 독립왕조로 13대 250년간 윈난성 대부분을 통치했다. 당시 남조의 세력범위는 쓰촨(四川)성 남부, 구이저우(貴州) 서부, 버마까지 미쳤다. 중원의 패자인 당나라와 토번이 무시 못할 존재였다. 이런 남조의 영향력 덕분에 중국에서 버마, 인도까지 이어지는 남부 실크로드가 열렸다.

902년 남조 멸망 후 937년 들어선 대리국은 또 다른 윈난의 패자였다. 대리는 새로운 중국왕조 송나라와 조공관계를 맺고 독립왕조로 13세기 중엽까지 지속됐다. 세계제국 몽골의 침략으로 무너졌지만, 남조와 대리는 얼하이를 중심으로 500여년 동안 번성했다.

윈난성 수도 쿤밍(昆明)에서 320여㎞ 떨어진 다리는 이처럼 유구한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다. 다리를 병풍처럼 둘러싼 창산(蒼山)은 윈구이(雲貴)고원에서 뻗어 있는 윈링(雲嶺)산맥의 주봉이다. 창산은 평균 해발 3500m로, 19봉우리나 이어져 걸쳐 있다.

얼하이는 창산 사이로 난 18계곡의 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려 만든 담수호다. 전체 면적이 250㎦에 달해 중국에서 7번째로 크다. 최고 수심도 무려 23m나 된다. 얼하이는 사람의 귀 모양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발 1900m 고지 위에 바다처럼 크고 넓다.

예부터 다리에서는 '눈 덮인 창산, 구슬 같은 얼하이'(銀山玉洱)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현지의 바이족은 샤관(下關)의 바람, 상관(上關)의 꽃, 창산의 눈, 얼하이의 달을 '다리사경'(大理四景)이라 하여 으뜸으로 꼽는다. 자연 풍광이 다른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은 고장이라는 자부심의 발로다.

중셩쓰 삼탑 앞에는 작은 호수를 인공으로 팠다. 호수에 비치는 탑의 모습은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답다.
 중셩쓰 삼탑 앞에는 작은 호수를 인공으로 팠다. 호수에 비치는 탑의 모습은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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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중국 4대 불탑 중 하나로 꼽힌다.
 삼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중국 4대 불탑 중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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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석으로 만든 중셩쓰 삼탑, 맑은 날이면 멀리서도 광택이 나

다리의 올드 타운인 고성은 옛 남조국과 대리국의 도읍지였다. 8세기 중엽에 처음 세워져 11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지금 남은 성곽은 14세기 말 명나라 주원장 때 건축됐다.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뒤 성루와 성곽 일부가 파괴됐지만, 1982년 복원 공사를 통해 옛 모습을 되찾았다. 남문 위에 걸린 '다리' 두 글자는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문학가인 궈모뤄(郭沫若)가 썼다.

고성에서 서북쪽으로 1.5㎞ 떨어진 지점에는 중셩쓰(崇聖寺)가 있다. 중셩쓰에는 남조 7대 왕인 소성왕이 건립한 13층탑이 있다. 이 탑은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에 있던 샤오옌타(小雁塔)를 본떠 만들었다.

뒤이어 16층탑 옆에 팔각 10층탑을 두 개 더 세웠다. 이것이 오늘날 다리의 상징물인 중셩쓰 삼탑이다. 중앙에 위치한 16층탑은 사각형으로, 높이는 69.13m에 달한다. 팔각 10층탑은 이보다 낮은 43m이다.

남조국 초기에 만들어진 중셩쓰 삼탑은 다리의 특산물인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겉 빛깔이 하얗고 밝아 맑은 날이면 멀리서도 광택이 난다. 16층탑을 두고 10층탑 두 개가 호위하는 모습인데, 작은 탑 하나가 약간 기울어져 있다. 1996년 지진이 일어나 일어난 현상이다.

오늘날 삼탑의 명성은 중국에서 이름 높아 중국 4대 불탑 중 하나로 꼽힌다. 다리시는 삼탑 앞에 작은 호수를 파고 사라졌던 사찰은 재건했다. 창산을 배경으로 작은 호수에 비치는 탑의 모습은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답다.

중셩쓰 삼탑 옆에는 길게 뻗은 길이 있다. 그곳에서는 매년 3월마다 단 한 번 거대한 장이 열린다. 이름하여 '산유에제'(三月街)로, 다리에 사는 바이족뿐만 아니라 윈난 전역 소수민족이 참가하는 물자교역회이자 대규모 축제다. 산유에제 때 다리는 민족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한창 추수로 바쁜 타오란촌 들판. 다리는 윈난에서 손꼽히는 곡창지대다.
 한창 추수로 바쁜 타오란촌 들판. 다리는 윈난에서 손꼽히는 곡창지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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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는 온화한 기후, 풍부한 수량, 기름진 땅 덕분에 1년3모작이 이뤄지고 있다.
 다리는 온화한 기후, 풍부한 수량, 기름진 땅 덕분에 1년3모작이 이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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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족, 이족, 후이족, 리쑤족... 다민족 집거지인 다리자치주

산유에제 시기뿐만 아니라 다리자치주는 평소에는 윈난성 내 여러 민족이 오고 가는 교통의 요지다. 쿤밍 다음가는 윈난의 2대 도시로, 1개시와 11개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2008년 말 현재 다리의 총 인구는 347.48만 명으로, 이 중 소수민족은 175.37만에 달한다. 소수민족 가운데는 다리를 대표하는 바이족이 가장 많아 115만 명을 조금 넘는다. 나머지는 이(彛)족, 후이(回)족, 리쑤(傈僳)족 등이 있다. 즉, 바이족을 위주로 한 다민족 집거지인 셈이다.

1984년 다리는 소수민족 거주지로는 비교적 일찍 대외 개방했다. 이에 다리를 찾는 관광객 수는 기하급수로 늘어나 한 해 8000만 명을 돌파했다. 1억 명이 윈난을 찾는데 그 중 80%가 다리를 방문하는 셈이다. 중국인에게는 다리와 리장(麗江), 샹그릴라 일대를 여행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일 정도로 각광 받고 있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관광산업을 주축으로 다리의 3차산업은 2008년 138억1577만 위안(한화 약 2조3485억원)의 생산액을 거두었다. 이는 전년에 비해 13%나 성장한 수치다.

얼하이를 밑천으로 윈난의 곡창 노릇을 했던 농수산업 분야도 97억33만 위안(약 1조6491억원)의 생산액을 냈다. 비중이 갈수록 줄어들긴 하지만, 다리자치주 전체 GDP에서 26.1%를 차지하는 수치다. 이 덕분에 1인당 주민소득은 1만661위안(약 181만원)으로, 전년 대비 11.4%의 견고한 성장세를 이어갔다.

다리의 풍요로움은 농촌 벌판에서 잘 나타난다. 다리고성에서 10여㎞ 타오란(陶蘭)촌은 100여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다. 타오란촌의 주민 대부분은 바이족으로,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얼하이에서 어획 활동을 하기도 한다. 만나 본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먹고 사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면서 신이 내린 자연환경에 감사했다.

바이족은 흰색을 좋아해 가옥 담장을 흰색으로 칠해놓았다.
 바이족은 흰색을 좋아해 가옥 담장을 흰색으로 칠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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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상을 입고 멋을 낸 바이족 할머니들. 오늘날도 전통복은 바이족에게 기본적인 생활의복이다.
 전통의상을 입고 멋을 낸 바이족 할머니들. 오늘날도 전통복은 바이족에게 기본적인 생활의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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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무척 좋아하는 바이족, 건물 내부 곳곳도 흰색으로 칠해

바이족 마을에 들어서면 너무나도 눈에 익숙한 건축양식이 눈에 들어온다. 바이족의 민가는 구조나 장식이 여러 면에서 우리의 전통가옥과 비슷하다. 외벽을 돌담을 쌓았지만, 내부 대부분은 목재를 사용했다.

겉으로 보면 사합원(四合院) 구조지만, 평면적으로 따지면 ㄷ자 형태로 되어 있다. ㄷ자의 양쪽 부분은 주방과 창고, 가축을 기르는 축사가 있다. 베이징의 사합원과 달리 돌담도 키가 높지 않다.

지붕은 기와를 얹어놓았고, 담장은 흰색으로 칠해 따뜻한 느낌을 준다. 바이족은 흰색을 무척 좋아한다. 건물 내부 곳곳도 흰색으로 칠한다. 가옥 내부는 대부분 2층 구조다.

1층의 중앙은 거실로, 집안의 대소사를 논하거나 손님을 맞는다. 거실 옆 양쪽 방은 웃어른이 묶는 침실이다. 바이족은 보통 한 집안에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 형태다. 2층은 손자손녀가 묶거나 작업실, 서재 등으로 사용한다.

바이족은 가옥뿐만 아니라 전통의상도 주로 흰색 계통을 입는다. 재미있는 것은 얼하이를 경계로 옷 입는 방식이 조금 차이가 난다.

얼하이 동쪽의 여성은 머리를 길게 길러 하나로 땋은 다음 바오터우(包頭)를 한 바퀴 두른 뒤 화관(花冠)을 쓴다. 상의는 소매가 짧은 흰색 옷을, 검은 색 옷깃이 있는 겉옷을 입는다.

화려하게 수놓은 앞치마를 하는데 하의는 보통 바지를 입는다. 바지에도 가랑이에 흰색, 녹색, 남색 등의 천으로 둘러 장식을 한다. 신발은 꽃으로 수놓은 뾰족한 신을 신는다.

얼하이 서쪽의 여성은 머리를 틀어 올려 은 장식품을 꽂고 검은 천으로 두른다. 상의는 앞이 짧고 뒤는 길며, 목 모양은 둥글다. 허리띠는 앞섶에 그림이 있거나 꽃을 수놓은 긴 천을 이용한다. 하의는 보통 바지로 짧고, 신발은 주로 짚신을 신는다.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하얀 색을 선호하는 것은 똑같다. 이 때문에 윈난에서는 바이족을 백의(白衣)의 민족이라 일컬을 정도다.

한때 파괴 정도가 심했던 다리성의 북문은 1982년 복원 공사를 통해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한때 파괴 정도가 심했던 다리성의 북문은 1982년 복원 공사를 통해 옛 모습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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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공사를 통해 중수된 다리고성의 중앙 전각인 우화러우(五華樓).
 복원 공사를 통해 중수된 다리고성의 중앙 전각인 우화러우(五華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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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Tip 1

쿤밍에서 열차를 타면 이른 아침에 다리에 도착한다. 기차역에는 다리고성까지 바로 가는 버스 8번이 있다. 아침 7시가 첫차로, 버스비는 1.5위안(약 255원)이다. 기차역에서 고성 북문까지는 40여분이 소요된다.

다리고성 내에는 싸고 저렴한 게스트하우스가 많다. 그 중 고성 서문 앞에 있는 릴리 패드(Lily Pad) 게스트하우스는 전통 가옥 형태에 콘도형으로 깨끗하고 친절해 많은 배낭 여행객이 이용하고 있다.

방의 종류는 30~120위안까지 다양하고, 무료 인터넷과 자동차 및 자전거 대여 서비스를 제공한다. 예약을 위한 예약을 위한 전화번호는 (0872)267-7807, 139-8856-9807이다.

# 여행Tip 2

중셩쓰 삼탑은 고성에서 멀지 않아 2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중셩쓰의 개방시간은 8:30~18:00이고, 입장료는 121위안(약 2만570원)이다. 삼탑만 구경할 경우 입장료는 52위안(약 8840원)이다.

창산과 얼하이는 따로 대중교통편이 없기 때문에 자전거를 빌려 둘러보는 것이 좋다.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대여비는 보통 1일 20~30위안(약 3400~5100원)이다. 창산풍경구의 개방시간은 8:00~18:00이고, 입장료는 30위안이다. 케이블카를 타면 창산 산마루까지 올라갈 수 있다. 케이블카 표값은 30위안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BS U포터,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중국, #윈난, #운남, #다리,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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