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얘기 한 토막. 사회과학 커리큘럼 중 세계철학사를 학습할 땝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입문하기 전 현대철학의 맹아로 프리드리히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텍스트로 정했습니다.

헌데 책장 넘기기가 수월치 않습니다. 동료들도 당혹한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익숙지 않은 어휘에, 인물에, 표현에, 서술방식에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끙끙댔으니까요.

가장 까다로운 책 중의 하나였던 <짜라투스트라>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쉽지 않습니다. 오늘 소개할 영화와 관련지어 정의한다면 '신은 죽었다'로 함축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이 진짜 주인이 되자고 했던 니체의 이 명제는 달리 말해 '권력에의 의지'를 지향하는 근대적 인간으로 풀이되어섭니다.

 인간의 근원적 고통과 고뇌에 대한 성찰과 구원의 빛을 조명한 영화 <나는 비와 함께 간다>의 포스터 장면

인간의 근원적 고통과 고뇌에 대한 성찰과 구원의 빛을 조명한 영화 <나는 비와 함께 간다>의 포스터 장면 ⓒ 케이앤엔터테인먼트

시대적 한계를 뛰어 넘으려했던 <짜라투스트라>는 니체 철학의 정수인 '초인'사상으로 귀결됩니다. 신의 죽음과 영원 회귀 등을 통해 지상에서의 삶의 의미를 강조하고 모든 고뇌와 죽음을 초극한 이상적인 인간상인 '초인'을 설파했던 <짜라투스트라>는 그래서 니체 사상과 철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서사시라고 일컫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니체의 초인사상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인물이 있으니 예수 그리스돕니다. 그리고 예수의 수난과 구원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골고다 언덕위의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 12시간을 쫓아가며 철저하고 처절하게 재현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구원의 초인상'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나무 몽둥이와 채찍 등으로 예수를 고문하는 로마병사와 예수의 찢어지는 피부, 뚝뚝 떨어지는 살점들, 부서지는 뼈를 극사실적으로 그려낸 이 영화는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기꺼이 감수한 예수의 고난을 통해 종교적 반성을 이끌어냅니다. 고로 기독교인들에게는 특별한 영적 체험이자 구원의 상징일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 피 칠갑으로 도배한 영화는 잔인무도한데다 지루하기까지 합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고행만으로 부족해서일까요? 신약성서를 현대판으로 해석하고자 앵글을 맞춘 영화가 있습니다. "종말의 그날까지 그리스도는 고통 속에 계신다"는 독백으로 시작하는 영화 <나는 비와 함께 간다>입니다.

연쇄살인마 해쉬포드(엘리어스 코티스)를 추적, 검거하는 중에 그 살인마에 동화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는 전직 형사 클라인(조시 하트넷). 다국적 제약회사의 회장으로부터 실종된 아들 시타오(기무라 다쿠야)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연쇄살인마를 추적, 검거하는 와중에 살인마에 동화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으로 고통받는 전직 형사 클라인(조시 하트넷분)

연쇄살인마를 추적, 검거하는 와중에 살인마에 동화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으로 고통받는 전직 형사 클라인(조시 하트넷분) ⓒ 케이앤엔터테인먼트


오래전 집을 나간 시타오의 종적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라곤 사진 한 장과 고아원을 돕기 위해 거액의 돈을 요구했다는 사실뿐입니다. 클라인은 홍콩으로 가 형사 시절 친분이 있는 조멩지(여문락)의 도움으로 추적을 시작합니다.

다른 이유로 시타오를 뒤쫓는 암흑가의 보스 수동포(이병헌). 그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연인이자 창녀 리리(트란 누 옌케)가 부하에게 납치되어 행방이 묘연해졌기 때문입니다. 집착과 소유의 욕망으로 불타오르는 수동포에게 시타오는 정조준해야 할 과녁입니다.

다시 살아난 '구원'으로 뭇 사람들의 병을 구완해 주는 시타오. 예수의 재림을 구현하는 그는 어느 날 낯선 여인 리리를 거둬들입니다. 그리고 클라인과 수동포와 한 여자 리리의 숨바꼭질 같은 물고 물리는 촘촘한 게임은 구원의 임계점을 향해 내달리는데….

 영화 속 구원의 상징이자 클라인과 수동포 그리고 리리를 연결하는 교차점인 시타오(기무라 다큐야분)

영화 속 구원의 상징이자 클라인과 수동포 그리고 리리를 연결하는 교차점인 시타오(기무라 다큐야분) ⓒ 케이앤엔터테인먼트


<나는...>의 세 남자와 한 여자가 교차하는 중심축은 시타옵니다. 잔인한 보스 수동포도 사이코패스의 트라우마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클라인도 절망의 쾌락에 갇힌 리리도 시타오를 축으로 고통과 구원의 원을 그리며 서로를 밀어내는 한편 서로를 넘나들면서 깊디깊은 파열음을 냅니다. 그러나 이들 사이 파열음의 근원은 연쇄살인마 해쉬포드로부터 시작됩니다.

구원과 속죄의 아이콘 해쉬포드. "종말의 그날까지 그리스도는 고통 속에 계신다"는 독백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납치한 27명의 신체를 절단하고 토막 내선 그 살덩어리들을 기괴한 형상으로 작업해선 '조각상'처럼 전시해 놓으며 '인간의 원죄'를 표현하지만 정작 자신은 구원을 거부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해쉬포드의 이 거부는 세 남자와 한 여자에게 각기 다른 무늬의 고뇌와 고통과 구원의 빛을 조명합니다. 시타오는 그 정점에 서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그걸 정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시타오는 그 숙명 때문에 몸서리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죽음에서도 부활하는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는 시타오는 타인의 고통을 통해 숙명이라는 존재의 이유를 받아들입니다. 빈곤과 폭력과 마약이 횡행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모든 고통을 정화하는 그는 타인을 위한 구원 속에 자기 자신을 구원해 가는 현대판 선지자로서 예수의 삶을 반추하는 상징체로 그려집니다.

클라인에게도 구원을 향한 절규는 동일합니다. 해쉬포드와의 운명적인 맞닥뜨림은 그를 구원의 갈망으로 내몹니다.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끈질기게 파고들며 자신을 동화시키려는 해쉬포드의 욕망은 그를 헤어나기 어려운 고통의 심연으로 침잠시키기 때문입니다. 단테의 지옥문을 연상시킬 정도의 끔찍한 모습으로 인간의 원초적 고통을 표현한 '조각상'처럼 클라인의 고통은 혐오스럽고, 구원에의 갈증은 절박하기만 합니다.

 시타오의 정반대 축에서 악의 화신으로 고통과 절망을 동반하며 또 다른 빛깔의 구원을 갈망하는 암흑가 보스 수동포(이병헌분)

시타오의 정반대 축에서 악의 화신으로 고통과 절망을 동반하며 또 다른 빛깔의 구원을 갈망하는 암흑가 보스 수동포(이병헌분) ⓒ 케이앤엔터테인먼트


구원 따위와는 애당초 담을 쌓은 것은 같은 수동포에게도 구원은 동일한 무게로 켜켜이 쌓입니다. 다만 두 남자와 다를 뿐입니다. 수동포는 악의 상징입니다. 리리를 놓친 부하를 시체를 담는 비닐로 싸선 쇠망치로 무자비하게 때려죽이는 그는 시타오의 정반대 편에 서서 폭력과 고통을 행사하는 악의 화신임에 분명합니다.

그런 수동포는 '구원의 역설'을 상징합니다. 고통을 가하면서 쾌락을 만끽하는 새디스트 수동포에게 폭력으로 인한 절망은 구원의 또 다른 표현이어섭니다. 수동포의 이런 모습은 시타오에게 총알을 박고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흘리는 눈물에서 극대화됩니다. "아파요, 그만해요"라고 덤덤히 말하는 시타오의 모습에서 흡사 예수의 고난을 생생하게 목도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영화는 수동포를 통해 구원의 구체적인 실체를 들춰내며 관객들로 하여금 자문케 합니다. 당신들은 어떻게 구원 받으려 하는가, 라고.

마약에 찌든 채 육체의 탐닉에 찌들어 살던 리리는 트란 안 홍 감독의 전작 <씨클로>에서 누나와 빼닮았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시인(양조위)의 알선으로 기꺼이 창녀로 나서면서도 가족과 시인을 위해 희생하는 누나는 예수 그리스도 곁에서 구원을 체험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연상케 하기에 충분합니다.

 시타오의 지극한 구원의 손길에 의해 마약을 끊고 '참회의 성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리리(사진 아래쪽, 트란 누 옌케분)

시타오의 지극한 구원의 손길에 의해 마약을 끊고 '참회의 성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리리(사진 아래쪽, 트란 누 옌케분) ⓒ 케이앤엔터테인먼트


시타오의 지극정성과 구완으로 마약을 끊은 리리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회개하고 수동포 곁을 떠나 시타오에게 돌아갑니다. 그리고 '참회의 성녀'로 새롭게 태어나서 수동포의 구원을 매개하는 고리가 되는 한편 시타오의 죽음과 부활을 지켜봅니다.

감독은 세 남자와 한 여자의 고통과 구원의 '관계'를 투사해 현대 사회에서 구원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무겁게 성찰합니다. 그래서 영화는 재미와는 거리가 멉니다. 어렵고 난해합니다. 액션 스릴러로 착각하고 갔다간 하품만 하며 버티거나 아니면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야 합니다.

반면 내밀한 삶의 속살로부터 불거져 나온 욕망과 고통으로 발버둥치는 현대 사회의 파편을 거울로 비쳐보며 구원이란 과연 무엇인지, 깊이 있게 탐구해 보고 싶다면 집중해 볼만한 영홥니다. 단,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던지는 구원이 불편하지 않다면 말입니다.

인간의 고통과 구원에 대한 물음을 현대판 신약성서로 풀어 낸 <나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던 니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을 죽여야 한다"고 설파했습니다. 니체의 속뜻은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신을 만들어냄으로써 '진정한 신'을 왜곡해 구원의 통로를 차단시켰기 때문일 터.

따라서 니체로서는 성경을 통해 계시된 진정한 신이 더 이상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 살아있지 않는 마당에 당연히 '신은 죽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고로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낸 '가짜 신'은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지사.

이렇게 니체가 애써 신을 죽임으로써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이 영화 <나는...>은 되묻게 합니다. 잔혹한 육체적 충격을 통해 예수의 고난을 전하면서 관객의 영혼에 성흔을 남기는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서 '비'는 그래서 간단케 뜻풀이가 되지 않습니다(2008년작, 트란 안 홍 감독, 상영중, 청소년관람불가).

 <나는 비와 함께 간다>의 예고편에 해당되는 트란 안 홍 감독의 1995년 연출 작품 <씨클로> 포스터 장면

<나는 비와 함께 간다>의 예고편에 해당되는 트란 안 홍 감독의 1995년 연출 작품 <씨클로> 포스터 장면

TiP. <나는 비와 함께 간다>를 종교적 색채를 지우고 폭 넓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트란 안 홍 감독의 전작 <씨클로>를 함께 봐야 합니다.

씨클로를 운전하는 소년의 눈으로 본 베트남 사회의 단면을 통해 고단한 삶의 무게와 고통을 감각적인 화면으로 빚어낸 역작입니다.

출구(구원)라곤 보이지 않는 황폐한 삶의 현장을 핏빛 아름다움으로 담은 <씨클로>는 <나는>의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두 영화는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단언컨대, <씨클로>를 보지 않고  <나는...>을 보거나 <나는...>을 보고 난 뒤 <씨클로>를 보지 않으면 이 영화 <나는...>은 독해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영화로 읽는 세상 이야기 나는 비와 함께 간다 트란 안 홍 이병헌 조시 하트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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