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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영동농장 회장인 김용복(중앙)씨의 농장을 찾은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 멀티미디어 학과 DDL팀 멤버들이 농장을 배경으로 기념촬영
 (서울)영동농장 회장인 김용복(중앙)씨의 농장을 찾은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 멀티미디어 학과 DDL팀 멤버들이 농장을 배경으로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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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사막에 한국 배추를 심는다?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성공시킨 농사꾼 김용복(77세)씨가 전남대학교 여수 캠퍼스 멀티미디어 학과 DDL(Dgital contents  Development Laboratory)팀 30여 명에게 성공담을 강의했다. 장소는 실용주의를 주창한 정약용이 살았던 강진의 다산수련원이다.

소박한 모습의 기업체 사장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서울) 영동농장의 회장이란 직함을 가지고 있다.

"학과를 맡고 있는 김경수교수가 자꾸 전화와 메일을 보내 귀찮았지만 열정에 반해 서울에서 고향인 강진까지 달려왔어요. 1천 명 앞에서도 강의했지만 가족적인 분위기가 좋습니다. 말주변이 없고 제 자랑 같지만 미래의 희망을 찾아 열심히 하는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다음은 그가 학생들에게 들려준 얘기다.

강진읍에서 4㎞떨어진 군동면 석교리 175번지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3가지 굶주림으로 살았다.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 엄마 젖을 못 얻어먹고 죽만 얻어먹고 컸다. 둘째는 가족 사랑을 못 받았다. 형이 여순사건 때 반란군에게 협조했다는 죄목으로 총살당했다. 당시 동네 청년 4명이 연루돼 3명은 쌀 한 가마씩을 내고 풀려났지만 형은 그마저도 없어 총살당했다.  그 후 새어머니가 왔고 가족들로부터 천대를 받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김용복씨가 학생들 앞에서 살아온 얘기를 전하고 있다. 젊은 학생들은 꿈을 품고 도전하라고---
 무에서 유를 창조한 김용복씨가 학생들 앞에서 살아온 얘기를 전하고 있다. 젊은 학생들은 꿈을 품고 도전하라고---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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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배움에 대한 굶주림이다. 수석으로 강진중학교에 합격했지만 빨갱이 가족이라는 연좌제로 인해 공립중학교에 입학이 금지되고 사립인 금릉중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2학년 들어 4달치 수업료를 내지 못해 퇴출당했다.

절망과 좌절에 빠져있던 그를 구원해준 분은 이웃집 아주머니다. 부산에 친척이 있는 그분이 똑똑한 아이가 시골에서 썩는 게 아까워 부산으로 가자고 해 부산으로 떠났다.

그러나 부산에 당도해 그 집 형편을 보고는 하루 만에 집을 나왔다. 길거리에서 잠을 자며 걸식하다 미군 하우스보이가 됐다. 하우스보이는 미군의 심부름과 구두닦이 등을 한다.

돈을 벌어 시골에 땅을 사고 공부하겠다는 욕심으로 미군에게 틈틈이 영어를 배운 그는 일등상사의 당번이 됐고 곧이어 부대장 당번이 됐다.

자신의 오늘이 있었던 것은 영어를 잘했기 때문이란다. 그 후 미8군 교육사령부 교육처장 보좌관까지 올라갔지만 월급이 형편없었다. 월남전이 발발해 노무자를 모집하자 지원해 노무자 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김용복회장(왼쪽)과 김영랑 시인의 아들인 김현철(재미교포)씨가 강진의 다산수련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용복회장(왼쪽)과 김영랑 시인의 아들인 김현철(재미교포)씨가 강진의 다산수련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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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가운데도 학생들을 위해 강의를 해주신 김용복 회장께 감사의 선물을 전하는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 멀티미디어 학과 김경수 교수
 바쁜 가운데도 학생들을 위해 강의를 해주신 김용복 회장께 감사의 선물을 전하는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 멀티미디어 학과 김경수 교수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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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오기와 목표를 향한 꿈이 있어야 한다"는 그는 1979년 삽 4자루와 한국인 농부 8명을 데리고 모래폭풍이 부는 사우디 사막에 배추와 무를 심고 가꾸는 불가능에 도전했다. 계속되는 실패에 생산과장이 찾아와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자 "너희들 여기 관광 왔어? 나는 전 재산을 털어 목숨을 걸고 여기 왔다. 해보기도 전에 불가능하다고! 이 새끼들 다 죽여 버리고 나도 여기에 내 몸을 묻겠다. 우리는 한국인이다. 이 정도로 절대로 쓰러질 수 없다"며 사막과의 전투를 벌여 첫 500㎏을 수확했을 때 전 직원이 함께 눈물을 흘렸다.

천신만고 끝에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사막에 녹색혁명을 이루었고 엄청난 부를 얻었다. 당시 획득한 외화를 모두 국내로 송금하여 개인 외환 보유 랭킹 1위에 올라 1982년 기능공 신분으로는 최초로 석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사우디의 (서울)영동농장에서 번돈은 사우디에서 1,2,3,4농장으로 확장되고 한국의 5,6 농장, 말레이시이아 7농장에 이어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 8농장으로 확대 발전했다. 그는 미 텍사스주 휴스턴시 공화당 전당대회장에 농업인 대표로 부시대통령으로 부터 초대 받기도 했다.

왼쪽은 비료를 주어 기른 일반벼로 웃자람을 목적으로 하며, 오른쪽은 미생물 농법으로 기른 친환경벼로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게 목적이라고 한다
 왼쪽은 비료를 주어 기른 일반벼로 웃자람을 목적으로 하며, 오른쪽은 미생물 농법으로 기른 친환경벼로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게 목적이라고 한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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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부농에의 꿈을 잊지 않은 그는 1982년 버림 받은 강진의 뻘밭 110만 평을 매입, 현대식 농경지를 조성해 70만 평의 광활한 농지에서 매년 질 좋은 쌀 1만2천 석을 생산하고 있다.

개인의 단일 농장으로는 가장 많은 쌀을 수확하는 영동농장은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를 졸업한 아들 김태정씨에게 물려줘 미생물을 이용한 친환경농법으로 재배하고 있다.

197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사이먼 쿠즈넷 하버드대학교 교수가 "개발도상국에 위치한 농업국가가 공업화 정책을 써서 중진국 대열에 성공한 예는 많지만, 중진국이 된 이후에도 농업분야를 소홀히 하여 계속 농업과 농촌을 낙후시킨 중진국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예는 전무후무하다"는 말을 인용한 그의 쌀농사에 대한 사랑이다.

"농업은 경제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산업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암담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정신이요 혼입니다. 특히 쌀농사는 7천만 민족에게는 생명산업이자 식량안보와 환경보호라는 기능을 갖고 있어요."

쌀농사만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주장 몇 가지다.

▲ 쌀밥은 우리 민족 고유의 주식이다 ▲ 식량안보 차원에서 쌀농사만은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 지하수 함양과 홍수 조절 능력을 갖고 있다 ▲ 탄산가스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하여 자연환경을 보존 한다 ▲ 쌀은 콜레스테롤이 낮고 다양한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다.

배움에 한이 맺혔던 그는 장학 사업을 시작했다. 하루는 비행기로 여행 중에 신문내용을 보고 화장실로 달려가 30분 정도 울고 나왔다. '서울 대학교 법대에 합격한 한 대학생이 돈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독지가들이 나섰으나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인이라는 소식을 듣고 돕기를 거절했다는 소식이었다. 그길로 편지를 써서 졸업할 때까지 책임진 이가 현재 장흥지원 최인규 판사이다.

현재 114명의 용복장학생을 배출했고 2차로 2003년 재단법인 한사랑농촌문화재단을 설립해 우리  농촌과 농업에 숨은 일꾼을 찾아 상금과 지원을 한다. 유엔통계를 보면 하루에 수 천 명이 죽어가는 데 자신은 배 터지게 먹는 게 천벌 받을 것 같아 복지재단을 설립하겠다는 그는 젊은이들에게 '3덜'을 강조한다.

"성공할 때까지는 '3덜'을 실천해라"는 그의 3덜이란 덜먹고, 덜 쓰고, 덜 즐겨야 성공한다는 것이다.

수없이 좌절하고 배신당했을 때 성경의 시편 126편 6절의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라'는 구절을 좋아한다는 그는 자식들 교육을 엄격하게 시켰다. 자식이 잘못했을 때 자식과 아내 앞에서 먼저 무릎을 꿇고 모범을 보이며 예절 교육을 시켰다.

돈 한푼 받지 않고 서울서 강진까지 오셔서 강의해준 김용복회장께 감사하다는 의미로 학생들이 만든 용 모양의 케익에 불을 붙이고 있는 김씨
 돈 한푼 받지 않고 서울서 강진까지 오셔서 강의해준 김용복회장께 감사하다는 의미로 학생들이 만든 용 모양의 케익에 불을 붙이고 있는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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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라히 보이는 지평선 끝자락 산까지가 110만평의 (서울)영동농장이다. 땅을 사 큰 부자가 되겠다는 김씨가 꿈을 이룬 곳이다. 1982년 뻘밭이었던 곳을 개척해 옥토로 바꿨다.
 아스라히 보이는 지평선 끝자락 산까지가 110만평의 (서울)영동농장이다. 땅을 사 큰 부자가 되겠다는 김씨가 꿈을 이룬 곳이다. 1982년 뻘밭이었던 곳을 개척해 옥토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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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농장의 벼들은 모차르트와 국악을 듣고 자란다(오전 7~8시 -모차르트, 오후 1~2시 전통풍물). 오경배 농장장은 "비료로 키운 벼는 웃자라고 미생물농법으로 자란 벼는 뿌리가 튼튼해집니다. 모든 땅이 병들어가는 이때 친환경농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98년 태풍 '올가'가 들판을 쓸고 지나갔는데 신기하게도 음악을 듣고 자란 벼는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쌀은 '그린음악쌀'이라는 상표로 포장돼 애그로넷(www.agronet.com)이라는 인터넷 판매망을 통해 경기미보다 비싼 가격에 팔린다.    

그는 현재 중국 동북농업대학, 연변과학기술대학에 이어 연변대학교 농학원에 농업기술연구소를 개설하여 농기계를 지원하고 우량품종개발과 농기계 조작법을 전수하고 있다.

이제 여한 없이 살았으니 이 늙은 몸 어딘가가 쓸 곳이 있다면 주겠다고 장기기증을 약속했다는 그의 장기 중 최고는 정신이다. 

덧붙이는 글 | 희망제작소와 남해안신문에도 송고합니다



태그:#김용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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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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