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 일간지 주최로 열리는 어린이리더십캠프 광고를 본 적이 있다. 지중해 일대를 도는 12박 13일짜리 크루즈 캠프였는데, 리더십 관련 유명 명사가 강의하고 학생 1명당 1명의 담당 스태프가 승선하는 이 크루즈 캠프의 가격은 1200만 원선. 그야말로 '헉' 소리를 부르는 액수. 리더십에 크루즈를 더하니 이리도 상상을 초월하는 어린이 캠프가 탄생할 수 있구나, 기가 막혔다.

크루즈 자체에 대한 느낌도 별반 다르지 않을 터. 일주일에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크루즈는 럭셔리의 상징 아니던가? 하지만 이 크루즈에서 '럭셔리'를 빼고 '피스'를 붙인다면? 정답! 맞다. 피스보트다. 일본의 국제교류NGO이자 항해를 통해 벌이는 국제평화운동! 아직 감이 안 오신다고? 그렇다면, <한겨레 21>의 이정용 기자가 쓴 <피스보트>를 읽어보시길.

책 속에는 이정용 기자가 참가했던 2003년 43회, 2005년 51회의 항해의 기록이다. 일본의 도쿄와 요코하마 등지를 시작으로 반시계방향으로 도는 세계일주의 여정. 그 기록 속에는 세계일주 크루즈에 대한 우리의 로망,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일상들이 담겨 있다. 망망대해에서 마주하는 일몰, 갑판 위의 각종 축제, 다양한 국적의 동행들, 그리고 세계 각지의 풍경들에 이르기까지.

해질녘 갑판에 나오면 수평선 너머로 그림 같은 일몰이 펼쳐진다. 사방을 둘러봐도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보는 일몰은 전혀 다른 장관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이 <피스보트>의 전부는 아니다.

그 중에도 유독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일본 헌법9조를 지키는 모임이었다. 뜻있는 사람들이 저녁마다 모여 일본에서 일어나는 헌법개정 움직임에 반대하며 평화헌법을 지키자는 모임을 만든 것이다.(중략) 이 헌법은 과거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만행에 대해 반성의 의미를 담은 전쟁 포기 선언이 포함돼 있다. 그들이 헌법9조를 지키려는 것은 과거에 대한 반성을 통해 아시아를 비롯해 세계 평화에 대한 염원 때문이다.

<피스보트>는 말 그대로 평화를 위한 항해이다. 혹은 평화를 실어 나르는 항해일 수도 있겠다. 그런 항해의 목적을 알고 모였기에 배 위에서 펼치는 다양한 활동은 그래서 더 신선하고 다채롭다. 위의 헌법9조를 지키는 모임 역시 저녁마다 모여 토론을 하고 함께 행동할 방법들을 찾았다. 꼭 정치적인 활동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배가 적도를 넘어설 때마다 자그마한 축제들도 마련하였고, 대서양 한 가운데에서는 승객의 생일을 기점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렇게 네 팀을 구성, 성대한 체육대회도 열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0년 3월부터 쿠바 정부는 방사능 피폭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체르노빌 아이들' 지원사업에 나섰고 이들을 카라라 요양원으로 불러들였다. 아이들은 카리브 해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한 해 평균 800~800명의 아이들이 이곳을 찾아 짧게는 45일에서 길게는 2~3년 동안 머물려 치료와 요양을 통해 건강을 되찾고 있다.

이 책이 좀더 특별한 이유는 이정용 기자가 <피스보트>를 타고 들렀던 기항지들의 다양한 이야기 때문. 개인적인 여행이 아니라 취재의 일환이었으므로 그는 보트 위의 그 누구보다 더 열심히 뛰고 다녔을 터. 그 노고의 흔적이 고스란히 책 속에 녹아 있다. 덕분에 우리는 단 한 권의 책으로 케냐의 나이로비에서는 그린벨트 운동을, 페루의 비자 엘 살바도르에서는 빈민들의 새로운 도전을, 쿠바의 아바나에서는 체르노빌 지원 사업 이야기를 듣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크루즈 그리고 100일간의 세계일주. 그 로망, 누군들 없을까마는, <피스보트>를 읽으면서 그 배 위에 오르고픈 욕심이 배로 불어났다. 느끼한 럭셔리의 기름을 뺀, 담백한 피스보트. 그 속엔 과한 양념이 절대 채울 수 없는, 진짜 여행의 참맛이 있지 않을까. TV와 뉴스와 책으로는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 각지 '사람 사는 세상'의 참모습. 충분하지 않을지라도, 그렇게 만이라도, 그 사람들의 삶을 만나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