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표류기> 영화 포스터

<김씨 표류기> 영화 포스터 ⓒ 시네마서비스

참 영리한 영화다. 기존에 있던 것과 새로 고안한 것을 교묘하게 배합했다. 그래서 익숙한 것을 확인하는 재미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김씨표류기>는 정려원과 정재영의 통통 튀는 연기를 보는 재미와 함께 이해준 감독의 발군의 기량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3M흥업의 최광희 기자는 최근 한국영화의 흐름을 '소재 영역의 다양화'(http://mmnm.tistory.com/717)라고 하였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해상 마약 밀매를 다룬 <마린보이>, 핸드폰을 소재로 하여 한국 매니지먼트의 생리를 다룬 <핸드폰>, 그림 값이 결정되는 시장의 메커니즘을 소재로 한 <인사동 스캔들>, 국가정보원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로맨틱 코미디로 가뿐히 승화한 <7급공무원>까지. 또 앞으로 개봉을 앞두고 있는 해양참사사건 <해운대>는 어떨는지. 사실 그 이름을 나열하지 않았지 요즘 한국영화는 소재의 참신함을 극복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듯하다.

영화에 대한 판단은 취향이니 저 영화들에 대한 호불호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나는 저 영화들에 대해서 불만은 없지만, 그래도 <김씨표류기>를 보는 순간 알았다. 상업영화에서는 감독을 짓누르는 소재의 강박을 이기는 작품이 더 돋보이는 법이라고. 그런면에서 <김씨표류기>는 참 청아한 영화다. 이해준 감독은 영화를 잘 만들려는 노력을 하지만, 강박관념에 시달리지 않는다.

2억이 넘는 채무에 시달리고 있는 김씨(정재영). 그는 원금에다가 겹겹이 불어난 이자를 확인한 순간 용기를 얻는다. 자살할 용기를 말이다. 하지만 한강변에 투신한 그는 죽지 못하고 밤섬에 표류하게 된다. 그 이후의 일은 이 남자가 밤섬에서 생존을 위해서 살아가는 처절한 투쟁기다. 특히나 우연히 '짜파게티' 봉지를 발견한 후에, 짜파게티를 먹겠다는 일념 하나로 죽기 살기로 생존해 나가는 모습은 우습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연민의 감정이 느껴지는 찰나, 촌철살인적인 대사와 생뚱맞은 상황 때문에 웃음꽃이 터진다. 이러다 거기에 뭐 나면 어쩌나 싶다.

한편 밤섬 건너편 육지에서는 '히키코모리(은둔형 폐인)'로 추정되는 한 여인이 김씨를 유심히 지켜본다. 영화는 고립된 두 남녀가 우연하게 소통을 시도하면서, 절망적이었던 이들의 삶에 희망이 싹튼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니까 그 흔한 희망에 관한 이야기다.

맞다. 어쩌면 익숙한 영화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김씨의 표류는 <캐스트어웨이>고 여자 김씨(정려원)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다. (혹자는 여자 김씨를 두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우선 <캐스트어웨이>와 닮은 점은 섬에서 탈출한다는 것. 그러나 이 영화는 자의에 의한 탈출이 아니라 타의에 의한, 거의 반강제적인 탈출이다. 사실 알고 보면 추방이나 다름없다. 김씨는 죽고 싶어서 자살했지만 그 자살은 실패하고, 밤섬에서 고립된 삶을 통해서 희망을 얻었기에 그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태풍이 지나고 난 후 환경정화를 위해 섬을 찾은 군인들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추방당한다. 김씨에게 자기 영토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빚 때문에 한 번 죽고, 자기 땅이라고 생각했던 밤섬에서 추방당하면서 두 번 죽는다.

한편 '조제'와 여자 김씨는 골방폐인이라는 점에서 닮았다. 특히 옷장이라는 공간이 주인공의 은신처 혹은 보금자리로 쓰인다는 점에서는 거의 흡사하다. 또한 조제나 여자 김씨나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몸에 새기고 있다는 점도 같다. 조제는 다리가 불구고 여자 김씨는 이마에 큰 흉터가 있다. 그러나 여자 김씨는 조제가 상상할 수 없는 자폐적이며 은둔형의 캐릭터다. 영화는 여자 김씨가 좁은 방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식상한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두 캐릭터는 익숙한 곳에서 빌려온 이미지와 그것을 변주하는 노력을 통해서 새로운 캐릭터로 버금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여자 김씨의 카메라와 사진을 통해 안토니오니의 <욕망>, 히치콕의 <이창> 좀 오버해서 브라이언 드 팔마의 <팜므파탈>까지 생각해보기도 했다. 뭐 그렇기나 말기나.

영화의 진짜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김씨의 표류기에 방점을 두고 있다. 한강이라는 익숙한 공간을 활용하는 방법은 참 탁월하다. 특히나 소리 지르면 들릴 것도 같은 거리에서 표류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밤섬은 무인도란 말인가, 라는 질문에 영화는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 라고 시치미를 뚝 뗀다.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가 종이 한 장이듯, 현실과 비현실의 차이도 종이 한 장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현실을 탈출하고 싶고, 현실에서 판타지를 꿈꾸고, 유토피아를 갈망하는 자들이다. 영화가 같은 서울 하늘아래에서 현실과 비현실적인 공간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회가 갑갑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중심리를 간파한 영화는, 서울에서 벗어나 휴식이 필요한 우리의 심리를 그러구러 잘 대변해주고 있다.

영화는 서울에서 '서울'을 탈출하고자 한다. 그리고는 김씨가 스스로 하나의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주체라는 말은 그간의 김씨의 삶이 능동적이지 않았음을 말한다. 사회인으로써 살아왔던 그간의 김씨는 한낱 객체에 불과했다. 이는 몇몇 대사나 행동들에서 쉽게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어서 버려진 오리배를 발견했을 때 주택청약 6년 만에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었다는 김씨의 말이나, 짜파게티 봉투를 발견하고는 짜장면을 거부했던 지난날의 오만과 독설을 반성하다는 김씨의 반성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지금까지 사회에서 객체였다. 남이 주는 걸 받아먹었거나 자기 소유의 무언가를 가져보지 못했던 거다. 빚이 자그마치 2억에 가깝고 다니던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당했고, 애인에게 퇴짜를 맞았다. 여기에 신용불량자라는 딱지와 토익 700점이라는 점수는 김씨를 평가하는 척도가 된다.

하지만 밤섬에서 김씨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며 살아있는 모든 것의 가치를 재발견할 줄 아는 인간이다. 그는 새똥을 밭에 뿌려 옥수수를 키워낼 수 있는 사람이다. 쓰레기로 버려진 페트병을 신발로 쓸줄 알며, 솔방울을 골프공으로 이용해서 혼자서 논다. 그에게는 섬에 버려진 모든 쓰레기가 삶의 소도구인 셈인데. 이는 지극히 반문화적인 발상이다. 현대 소비사회에서 소비의 미덕은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쓰레기를 추구한다. 이 영화가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해주는 것은 바로, 서울을 배경으로 하면서 현대 서울의 삶에 모두 안티테제를 걸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복의 미는 영화 후반부에 절정을 이룬다. 군인들이 그를 잡아가려고 할 때, 그는 밤섬이 자기 땅이라고 나지막하게 항변한다. 그 말인즉, 이제 김씨에게 밤섬은 자기 세상 즉 육지이며, 오히려 기존의 육지는 그에게 섬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는 밤섬에서 쫓겨나자 마자 다시 자살할 요량으로 63빌딩을 찾는다. 김씨에게 섬과 육지가 뒤바뀌었던 것이다. 김씨에게 서울은 지옥이고, 밤섬은 파라다이스다. 영화는 이러한 전복을 통해서 기존의 자본주와 현대 소비 사회의 가치를 전복시킨다. 여기서 이 영화의 참 맛이 우러나온다.

나는 <김씨 표류기>가 참신한 영화라는 데 한 표를 던진다. 비록 후반부에 늘어지는 점이 있긴 하지만, 나는 그 부분에도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건 상업영화라는 견지에서 보자면 오히려 미덕으로 간주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진짜 미덕은 표층에 익숙한 것들을 깔면서도 그 익숙한 것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게 먹혀들었다는 거. <김씨표류기>는 호방하게 웃을 수 있는 근래 보기 드문 영화 중 하나다.

김씨 김씨표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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