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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보다 먹고 살 걱정이 줄어들고, 삶의 질을 따지게 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여행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른 나라의 아름다운 도시를 보고,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나 건축물을 보고, 특이한 사람들을 만나는 건 두근거리는 일이다.

 

여행기는 봇물처럼 쏟아지고, 잘 팔리는 여행기도 많다. 그 여행기들의 목소리는 거의 한결같다. 여행은 세상과 사람을 보는 눈을 넓히고, 자기 자신도 되돌아보는 소중한 체험이란 것이다. 언론과 지식인도 여행을 권유한다. 여기엔 보수도 진보도 없다.

 

‘노마드’라는 잘 와닿지 않는 말이 지식인 모임에서 널리 쓰인다. ‘디지털 유목민’이란 말도 나온다. 더 이상 토박이, ‘텃새’같은 사람은 좋은 소리 못 듣는다. 어딘가 촌스럽고 세상 물정 모른 사람, 더 나아가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놓치는 사람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런 여행 찬양은 되짚어볼 구석이 없을까?

 

넓은 세상을 보면 알고 느끼는 것이 많아지고, 따라서 편견이 없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경험만으론 편견을 고치기 힘들다. 오히려 경험이 편견을 더 굳게 하기도 한다. 안내원만 따라다니는 관광객 무리를 보라. 그들은 대개 버스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그 나라 사람들을 본다. 아마 그 곳이 이른바 ‘못 사는 나라’라면, 관광객들의 입에선 ‘역시 여기 사람들은 옷입는 것도 아직 촌스럽고...못 사는 나라답단 말이야’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쓱 보면서 스쳐 지나가는 여행일 뿐이다. 편견은 전혀 고쳐지지 않는다. 안내원이 그 나라 사람이어도 변하는 건 없다. 속으론 관광객들의 태도에 짜증이 나기도 하겠지만, 돈을 버는 게 먼저니, 꾹 참고 영업용 미소만 지을 것이다.

 

 물론 한비야 씨라든가, 다른 유명한 여행가들은 이런 여행을 권하지 않는다. 그들은 적은 돈만 챙기고, 자기 발로 다니는 여행을 권한다. 이런 여행으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지식을 넓힐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경험은 많이 쌓인다. 그러나 더 넓고 다양한 경험 역시 편견을 없애진 않는다. 오히려 사람은 이미 쌓아놓은 편견 위에서 경험을 골라 잡는다. 지식이 아니라 더 두껍고, 근거가 풍부한 편견이 생길 뿐이다.

 

 물론 뛰어난 여행가들의 글을 보면, 이런 편견을 많이 극복했다. 깊이 있는 철학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오랜 시간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기 때문에 지혜가 쌓인 게 아니다. 그들은 여행과는 상관없이, 이미 깊이 생각하고, 스스로 돌아보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글을 쓴 것이다.

 

오랜 시간 여행을 해야 바깥 세상을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더 중요한 건 스스로 깊이 생각하는 것, 반성하는 것, 이를 위한 공간과 시간이다. 중요한 건 바그다드나 베를린이나 베이징이 아니라, 아랍 문명과 독일과 중국을 깊게 생각할 수 있는 혼자만의 방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여행을 권유하는 사람도 있다. 주로 진보 지식인들이 이런 권유를 한다. 그러나 사람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을 잘 닦고, 이성에 따라 판단하는 힘을 기르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을 만나봤자 더 두꺼운 편견만 쌓일 뿐이다. 이민자들은 외국 사람들과 24시간 내내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꼭 어울려 살아가는가?

 

 더우기 외국 사람과 어울릴 때는 진짜 친구가 되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여행 안내원이자 관광객이 될 확률이 높다. 이건 상당히 친한 사이가 돼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친구라도 그는 외국 사람이다. 자기 나라 이야기를 할 때는 무조건 좋게 포장하기 쉽다. 이건 위선이 아니다. 아무리 ‘세계화’니 ‘지구촌’이니 하는 말을 써도, 아직까지 사람들은 국가를 기준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외국 사람을 대하는 건 같은 나라 사람을 대하는 것과 같을 수 없다.

 

 지금까지  여행이라는 직접 체험은, 외국 사람의 책 읽기나 영화 보기 등 간접 체험과 견주어 볼 때, 그 가치가 지나치게 부풀려졌다. 어느 한 쪽만 필요하고 다른 쪽은 쓸모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의 문화문명을 접하고, 한국의 눈으로 풀이하는 건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특히 다른 나라 사람의 책, 다른 나라를 연구한 우리 나라 사람의 책을 읽는 건 매우 중요하다. 오히려 이렇게, 직접 그 나라에 가지 않고 한발짝 물러나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그 나라를 깊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어떤 나라를 이야기하고 싶다고 꼭 그 나라에 가볼 필요는 없다. 그래도 우리는 그 나라를 이야기하고 그걸 글로 남길 수 있다. 치열한 반성과 비판 정신, 느낌보다는 정확한 자료에 의지하는 태도만 갖췄다면 말이다.

 

 여행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부풀린 태도는, 한국이란 나라의 처지 때문이 아닐까? 섬이나 다름없는 나라에서, 해외 여행을 쉽게 결정하고 실행할 순 없다. 옛 중국 사람들에게 ‘천축’ 은 너무 멀었고, 꿈같은 나라였다. 현장 법사의 정직한 천축 여행기는 그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고, 그들이 꿈을 보상받으려고 지어낸 이야기가 <서유기>였다.

 

그저 좁은 나라가 답답해서, 다른 나라로 가서 진귀한 음식을 먹고, 특이한 장소에서 사진 한 장 찍어 남기려는 소박한 마음일 뿐인데, 너무 거창한 명분을 덮어씌운 건 아닌지...


태그:#해외 여행, #여행, #외국, #지식,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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