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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농익었습니다. 단풍잎들이 거나하게 취하더니 어느새 상의를 벗어던지고 있습니다. 은행잎이 지난여름 팔팔하던 젊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노랗게 풀죽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지독한 냄새를 뿜으며 알맹이들을 논둑이며 밭고랑으로 집어던지고 있습니다.

 

이맘때면 슬슬 발동하는 게 있습니다. 가을맞이 가자는 것이지요. 지역 기독교 연합회에서 나들이를 가자고 합니다. 좋은 곳이 있으면 추천하라는 회장님의 제안이 제게 떨어졌습니다. 며칠 전 옛 추억을 되살릴 겸 찾아갔던 문경새재가 문뜩 마음에 들어옵니다.

 

평지이니 나이 드신 분들도 괜찮고,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 당일치기로 가을의 냄새를 물씬 맡을 수 있는 곳이라고 너스레를 떠니 모두들 좋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지난 28일 가을여행을 떠났습니다. 가을 물 잔뜩 든 문경새재, 가을 물 잔뜩 든 중년 부부들, 그렇게 어울렸습니다.

 

매스컴 타는 음식점, 과연…?

 

가을, 단풍, 낙엽…. 이젠 진부하죠. 가을이 팔부능선을 넘으면 이런 단어들은 진부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그런 이야기를 잠시 접고 정말 다른 맛, 멋, 운치 이야기를 하고 싶어집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자꾸 보면 질리죠. 가을은 그렇게 벌써 우리를 질리게 할 즈음에 이르렀군요.

 

물론 가을의 진부함이 이번 여행에는 없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너무 황홀해서 황홀한지도 모른다는 의미죠. 다만 그런 것 말고 또 다른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뿐입니다. 그 이야기 들어가기 전에 할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디서 점심을 먹을까 고민하는데 한 사모님께서 어제 TV에서 봤다며 그 집으로 가자는 겁니다. 문경새재에 특별히 잘하는 음식점을 알 리 없는 충청도민들이 어쩌겠습니까. 그 사모님 말씀에 순종하기로 했죠. 주차장 매표원에게 물으니 대뜸 일러주데요. 찾는 사람이 많은가 봅니다.

 

“근데 그 집보다 따님이 하는 ‘000음식점’이 더 잘한다고 하던데….”

 

매표소 아저씨는 이렇게 말끝을 흐리는 거예요. 그래도 원조가 더 낫지 않겠냐는 의견이 우세해 원조집, 그 할머니집이라는 델 찾아갔습니다. 정말 사람이 많더군요.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더덕정식, “에게, 반찬이 고작 이거야?” 몇 안 되는 접시를 보고 누가 한 말입니다. 매표원의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후회가 좀 늦었죠.

 

정말 희한한 더덕정식을 먹었습니다.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선 손님들마다 이런 맘으로 식사를 마쳤다면? 끔찍합니다. 나오면서 누가 던진 말, “그러게 매스컴 타는 음식점은 믿을 수가 없다니까.” 그 말이 맞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전에 저도 풍기에서 소문 무성하고 먹을 것 없는 떡갈비 정식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생각이 나서 속으로 웃었습니다. 광고와 실재가 다르면 허탈하죠. 그러나 어쩌겠어요. 다시는 안 간다고 다짐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으니.

 

꽁지머리 악사, 가을바람을 일으키다

 

“만지면 톡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어느 유행가 가사, 맞습니다. 맞고요. 근데 정말 그런 가을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누가 가을을 남자의 계절이라고 했느냐고 아귀다툼을 하는 중년의 여자들. 교회와 성도와 목사인 남편과 아이들 사이에서 “사모님”이란 울타리를 쳐주는 대로 그것이 행복이라 믿었던 여자들.

 

가을이 바람을 일으키네요. 전날과 사뭇 다른 날씨는 약간은 춥다고 해야 할 정도로 싸늘한 바람을 낙엽에 실어옵니다. 옷깃을 여미며 걷는 중년의 여자들의 재잘거림을 듣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행복해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습니다.

 

혹자는 ‘사모님’ 소리 듣는 이들이니 그저 행복할 거라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모님’ 소리에 갇혀 소리 한번 제대로 질러보거나, 말 한마디 제대로 떠들어보지 못한 고충이 그 얼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수다가 그냥 수다만은 아닌 듯하였습니다.

 

그렇게 걷다가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메뉴를 적은 널빤지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동시에 색소폰 소리가 귀에 익은 곡조를 실어 가슴까지 파고듭니다. ‘팔왕휴게소’라고 자신을 알리는 간판이 막 불어오는 바람에 나부낍니다.

 

이심전심 우리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데니 보이’가 막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이어 ‘번지 없는 주막’이 우네요. 그러자 한 아주머니가 겸연쩍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가린 채 몸을 흔듭니다. 그러나 그 품새는 여간내기가 아니었습니다.

 

이어 뽕짝이 여러 곡 이어졌습니다. 이번에는 동동주를 드시던 아저씨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뛰쳐나와 몸을 흔들더군요. 그냥 막춤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명이 잠깐씩 나와 춤을 추긴 했지만 춤이라고까지는 보기 어려운 관광버스 춤 정도였습니다. 그러면 어때요. 그렇게 흥에 몸을 맡기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삶에서 안고 온 짐들은 내려놓을 수 있었을 텐데요.

 

“신청곡 받습니다. 어떤 곡 연주할까요?”

 

꽁지머리를 한 슬리퍼차림의 색소폰 주자 주인 사장님의 말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밤’요” 제가 외쳤습니다. 이어 ‘만남’, ‘숨어 우는 바람소리’, ‘사랑으로’, ‘사랑이여’ …. 여러 곡을 더 시켜 들었습니다. 춤 체질은 아닌 우리일행은 귀와 가슴으로만 음악을 들었습니다.

 

구성지다 못해 가슴을 헤집는 색소폰 소리에 중년의 마음에 가을바람이 잔뜩 들었습니다. 한방차 한잔에 싸늘한 바람, 구르는 낙엽,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거기에 색소폰의 운율은 가만히 가라앉았던 중년 아줌마, 아저씨들에게 짠한 바람을 일으키나 봅니다.

 

우리 일행은 그렇게 가을의 한가운데서, 문경새재의 자연정원 한가운데서, 꽁지머리 악사가 일으키는 가을바람을 맞고 말았습니다. 한 사모님은 연주를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만 벌에게 쏘였습니다. 찻잔에 단맛이 묻어있기에 날아왔던 벌이 그만 사모님의 손가락을 쏘고 만 것입니다.

 

하산하고 차에 타 한 목사님이 말합니다. “이거 빨리 씻어야 하는데 자꾸 흥얼대게 되니 큰일인데?” 아까 색소폰이 뱉어놓은 선율이 귀에만 달라붙은 게 아니라 입에도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모르니 강단에서 찬송이 아니라 유행가를 부르게 생겼다는 거지요. 한 사모님이 맞장구를 칩니다.

 

“건 그래도 괜찮아요. 그 꽁지머리가 가슴에 바람구멍을 내놓았어요.”

“하하하”

 

우리는 올가을 꽁지머리 악사가 내놓은 가을바람 가슴구멍 때문에 흥겹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갓피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색소폰연주, #꽁지머리, #문경새재, #팔왕휴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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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행복이라 믿는 하루가 또 찾아왔습니다.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엮으며 짓는 삶을 그분과 함께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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