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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먼석굴 매표소 옆 안내문인데 한국인 관광객이 많은지 한국어로 번역된 것도 있다.
▲ 이허강변의 서쪽에 조성된 롱먼석굴 롱먼석굴 매표소 옆 안내문인데 한국인 관광객이 많은지 한국어로 번역된 것도 있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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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사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무술의 세계를 뒤로 한 채 천년의 불심이 흐르는 롱먼석굴(龍門石窟)로 향했다. 버스가 뤄양(洛陽)에 들어서자 크고 작은 물줄기가 자주 눈에 띄고 물가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천년고도 뤄양, 지금은 떨어지는 해?

서울을 한강의 북쪽에 있다 하여 '한양(漢陽)'이라 칭했듯 뤄양은 낙수(洛水)강 북쪽에 있어 부쳐진 이름이다. 그러나 지금은 성도의 자리를 정저우에게 물려주고 발전정도도 뒤쳐져 '떨어지는 해'로 인식되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

현지 가이드는 동주(東周), 후한(後漢), 조위(曹魏), 서진(西晉), 북위(北魏), 수(隋), 당(唐), 후량(後梁), 후당(後唐) 등 아홉 왕조에서 924년간 수도였던 뤄양은 명실상부한 ;구조고도(九朝古都)'이자 '천년고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개 중국인들이 '지금은 비록 가난하지만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과거의 영화를 그리워하는' 과거 집착 증세를 보이는데 아무래도 허난(河南)성 사람들은 그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 증세가 좀 더 심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뤄양은 과거 천년 동안 수도였지만 다시 천년이 지난 지금, 찬란했던 문명의 흔적들은 거의 다 사라지고 없다. 세월 앞에 참 무상하게 흘러가는 인생을 떠올리다가 연수단의 회식 자리에서 최정용 선생님께서 부르시던 <성주풀이> 노래가 생각났다.

"낙양성 십리 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 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번가면 저 모양이 될 터이니…."

이허(伊河)강변에 내리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유유히 드넓은 흐름을 지속하는 이허강과 그 강가의 버드나무를 변함없이 쓰다듬어 주는 바람, 그리고 그 강변의 바윗돌들만이 천년의 그 덧없는 세월 앞에서도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뚜껑 없는 석각박물관에 벌떼처럼!

단단한 화강암을 파 들어간 롱먼석굴은 조성과정이 윈강석굴보다 훨씬 힘들었으며 벽화보다는 조각이 훨씬 빼어나다.
▲ 벌집처럼 보이는 석굴 앞에 벌떼처럼 모여 앉은 연수단 선생님들 단단한 화강암을 파 들어간 롱먼석굴은 조성과정이 윈강석굴보다 훨씬 힘들었으며 벽화보다는 조각이 훨씬 빼어나다.
ⓒ 정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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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넓은 물줄기로 흐르는 이허강의 동쪽은 백거이(白居易)의 무덤과 장지에스(蔣介石)가 별장으로 사용했던 향산사(香山寺)가 있는 시앙산(香山)이고 서쪽은 깐쑤성(甘肅省) 둔황(敦煌)의 모까오굴(莫高窟), 산시성(山西省) 따통(大同)의 윈강석굴(雲岡石窟)과 함께 중국 3대 석굴로 불리는 롱먼석굴이 있는 롱먼산(龍門山)이다.

세계문화유산 롱먼석굴은 바위산인 롱먼산 약 1km 돌에 조성된 1353개의 석굴과 2345개의 불단(佛壇), 50여개의 불탑(佛塔), 10만여 존(尊)의 불상(佛像)으로 이뤄져 있다. 바위산을 벌집처럼 안으로 깎아 들어가 그 안에 불상을 모신 형태인데 그 수많은 벌집들을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여행단은 마치 벌떼처럼 여기저기 드나든다.

매표소를 지나 처음 날아든 벌집은 바로 잠계사(潜溪寺)다. 당고종(650~683년)때 조성된 것으로 중앙에 있는 7.8m의 아미타불은 손가락이 모두 부러져 있지만 그 모습만은 풍만하고 넉넉하다. 불교가 인도에서 둔황을 거치면서 점차 중국화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발걸음을 옮겨 이동하는 길목마다 단단한 암벽을 파고 들어가 새겨놓은 크고 작은 탑과 불상들이 보이는데 가히 '뚜껑 없는 석각박물관'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손색이 없었다. 윈강석굴이 규모가 크고 벽화가 뛰어나다면 롱먼석굴은 규모는 작지만 단단한 화강암을 파고 들어간, 훨씬 더 힘겹게 이뤄진 공정으로 조각이 아주 빼어나다.

빼어난 예술성, 어쩔 수 없는 수난과 훼손

풍만한 빈양남동의 아미타불불상과 효문제를 모델로 했다는 선비처럼 단아한 모습의 빈양중동의 불상이다.
▲ 빈양중동(좌)과 빈양남동(우) 풍만한 빈양남동의 아미타불불상과 효문제를 모델로 했다는 선비처럼 단아한 모습의 빈양중동의 불상이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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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양동(宾阳洞)엔 남, 중, 북 세 개의 동굴이 나란히 있는데 빈양남동에 있는 아미타불 불상은 북위에서 수나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작품으로 가사의 주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것이 인상적이다. 동굴 안에 비문이 있어 진귀한 문자 연구 자료가 된다고 한다.

빈양중동은 북위(北魏) 석굴예술의 대표작으로 약 24년(500~523년)에 걸쳐 80만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롱먼석굴 중 건설기간이 가장 긴 빈양중동은 북위의 선무제(宣武帝)가 선친인 효문제(孝文帝)와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를 위해 조성했다고 한다. 효문제를 모델로 했다는 석가모니 본존상은 미소를 머금은 단아한 선비의 모습을 하고 있어 친숙한 느낌마저 든다.

빈양중동 입구 양쪽으로 '황제예불도'와 '태후예불도'가 있는데 진품은 도난당해 각각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넬슨미술관에 있고 현재 것은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1500년의 긴 세월동안 롱먼석굴의 훼손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불두(佛頭)를 소장하면 복이 온다는 민간의 미신, 근대 서양의 도굴단과 그들과 손을 잡은 중국의 악질 골동품상들, 그리고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의 광풍을 타고 몰아닥친 홍위병 등 긴 세월, 수많은 시대적 풍파 속에서 롱먼석굴도 수난을 피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V'자 손가락 모양은 ‘내가 이제부터 설법을 전하겠노라’ 라는 의미이고 턱에 있는 세 겹의 주름은 당나라 미인의 기준이었다고 한다.
▲ 빈양북동의 아미타불 불상 ‘V'자 손가락 모양은 ‘내가 이제부터 설법을 전하겠노라’ 라는 의미이고 턱에 있는 세 겹의 주름은 당나라 미인의 기준이었다고 한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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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양북동에는 'V(브이)'자 손가락 모양을 한, 더 풍만한 아미타불 불상이 있는데 가이드는 "손모양은 '내가 이제부터 설법을 전하겠노라'라는 의미이고 풍만한 부처는 당나라 시대 미인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당나라 미인이라고 무조건 뚱뚱하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고 턱과 목 사이에 반드시 세 겹의 줄이 있어야 한다는 가이드 말에 몇몇 여선생님들은 일제히 턱을 당겨 억지로 주름 선을 만들어 보여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장 아름다운 'S라인 미인' 조각상은?

돌덩이 바위산이 어떻게 정교한 불상으로 변모할 수 있는지 하는 궁금증은 마애삼존불 앞에 이르러 조금은 풀린다. 마애삼존불은 측천무후가 83세의 나이로 죽자 공사가 중단되어 공정이 70% 상태에 멈춰있다. 매끄럽게 다듬어져야 할 불상은 거칠었고 석공의 손질이 멈춘 불상의 하단부는 돌덩이인 채 천년 세월을 그렇게 덩그러니 놓여 있다. 비록 미완이지만 제작과정의 일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나름 의미 있는 불상들인 셈이다.

이허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좀 더 걸어 올라가면 1만5000개의 작은 불상이 조각된 만불동(萬佛洞)이 나온다. 그러나 네모 칸마다 조각된 불상의 머리 부분은 대부분 훼손된 상태였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은 천장에 새겨진 연꽃 아래 붉은 후광을 받으며 연화대 위에 다소곳이 앉아 만불의 영전을 받고 있는 포근한 느낌이다.

메이란팡이 자주 재현했다는 한 손엔 버드나무, 다른 한 손엔 항아리를 든 여인상의 모습이다. 얼굴 부분이 훼손된 것이 아쉬움과 함께 묘한 여운을 남겨주기도 한다.
▲ 'S'라인의 미인 조각상 메이란팡이 자주 재현했다는 한 손엔 버드나무, 다른 한 손엔 항아리를 든 여인상의 모습이다. 얼굴 부분이 훼손된 것이 아쉬움과 함께 묘한 여운을 남겨주기도 한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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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불동 왼편으로 얼굴 부분이 훼손된 조각상이 있는데 현지 가이드는 그 조각이 롱먼석굴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조각상이라고 소개했다. 맨발의 'S라인' 몸매, 약간 오른쪽으로 기운 머리, 오른손은 어깨 너머로 늘어진 버드나무가지를 들고, 쭉 내린 왼손은 작은 항아리를 들고 있는 형상이다. 중국의 유명한 경극배우 메이란팡(梅兰芳)이 이곳에 와서 이 조각상에 매료되어 무대에 설 때 자주 조각상 여인의 자태를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바위산의 퇴적층과 지층 경계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탑과 불상을 새겨놓았는데 어떤 것은 소박하고 다정한 맛이 있고 어떤 것은 경건하고 단아한 맛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범접할 수 없는 권위와 위엄이 느껴지기도 한다.

강가에 피어 있는 연꽃을 보다가 연화동(蓮花洞)에 이르러 천장에 새겨진 연꽃을 보니 정말 바위를 뚫고 진짜 연꽃이 피어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석공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건 예술혼으로 이처럼 아름다운 석상들을 조각해 놓았으리라.

최고의 예술 경지를 보여주는 뤄양의 미소 비로사나불

측천무후를 모델로 했다는 비로사나불은 종교를 소재로 한 조각예술의 최고 경지를 보여준다.
▲ 뤄양의 미소로 불리는 비로사나불 측천무후를 모델로 했다는 비로사나불은 종교를 소재로 한 조각예술의 최고 경지를 보여준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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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에 새긴 예술적 아름다움에 대한 최대의 감탄은 롱먼석굴 봉선사(奉先寺) 비로사나불(毘盧舍那佛)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한다. 계단을 올라 높이 17.2m, 얼굴만 4m, 귀만 1.9m인 그 거대한 불상 앞에 서는 순간 정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어디에 서 있든 꼭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그 인자한 듯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초승달 눈썹 아래의 긴 눈매와 온후한 얼굴형상은 마치 숨결이 느껴지는 듯, 금방이라도 보일 듯 말 듯한 미소 머금은 입을 열고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신이면서 인간이고 인간이면서 또 신인 비로사나불은 석각 예술의 최고봉으로 가장 높은 경지의 예술미를 잘 보여준다.

비로사나불은 4년(672~675년)간 조성되는데 측천무후도 자신의 화장품 예산을 기금으로 희사하며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래서 뤄양의 얼굴 비로사나불은 측천무후가 그 모델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 고종이 어느 날 측천무후의 아름다움이 보살의 자태를 닮았다고 하자 측천무후는 "아무리 아름다운들 백년 후면 썩어 한 줌의 흙이 될 것"이라며 슬퍼했다. 고종은 그림으로 남기면 된다고 하였으나 측천무후가 그림도 사라질 것이라고 염려하자 고종은 측천무후의 그림을 모델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불상을 만들도록 지시했고 그것이 바로 비로사나불이라는 것이다.

위엄이 느껴지는 사천왕상의 다리는 사람들의 손길에 반질반질 윤이 나 있다. 급할 때 와서 부처님의 다리를 붙잡은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 사천왕상과 역사상 위엄이 느껴지는 사천왕상의 다리는 사람들의 손길에 반질반질 윤이 나 있다. 급할 때 와서 부처님의 다리를 붙잡은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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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사나불 좌우에는 제자와 보살상이 있는데 좌측은 얼굴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지만 우측의 사천왕상과 역사상은 근엄한 권위를 충분히 발현해내며 생동감 있게 비로사나불을 영접하고 있다.

중국에 '평상시에는 불공을 드리지 않다가 급하면 부처의 다리를 붙잡는다(平時不燒香, 急時抱佛脚)'는 속담이 있는데 사천왕상의 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붙들었는지 반들반들 윤이 나 있다.

불상 옆으로 사각 구멍들이 보이는데 이는 모두 봉선사 지붕을 만들 때 기둥을 박았던 자리라고 한다. 나무는 썩어 사라졌고 결국 돌에 새긴 불상만이 하늘을 지붕 삼아 유유히 온 세상을 굽어보고 있는 것이다.

불상 옆으로 네모 난 구멍들이 있는데 나무 기둥을 박았던 흔적을 보인다. 절의 흔적은 사라지고 하늘을 천정 삼아 불상들은 인자한 모습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 봉선사의 전체 모습 불상 옆으로 네모 난 구멍들이 있는데 나무 기둥을 박았던 흔적을 보인다. 절의 흔적은 사라지고 하늘을 천정 삼아 불상들은 인자한 모습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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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거이가 바로 앞 롱먼석굴에 침묵한 까닭은?

비로사나불을 뒤로 하고 내려오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행은 급히 차로 이동했고 봉선사 바로 옆에 있는 조성 시기가 가장 빠르고 규모가 크다는 고양동(古陽洞)도 보지 못하고 강 건너 백거이무덤에도 들리지 못해 아쉬웠다.

말년에 뤄양석굴 맞은편 향산사에 기거했던 백거이는 그의 글에서 단 한 번도 롱먼석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외래에서 전해진 불교가 온 나라를 휘감아 도는 상황에 대한 불만의 표시가 아니었을까 싶다. 체제 내부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정권 차원에서 기획된 미신 같은 불상 제작을 위해 국가의 엄청난 재정이 낭비되고 백성들은 혹독한 강제노역에 시달렸을 것을 생각하면 백거이의 침묵에서 오히려 지사다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불교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당나라 때 승려의 수는 12만 명을 넘었고 사찰은 5300개에 달했으며 뤄양에만도 480여개의 절이 있었다고 하니 승려의 병력면제와 사찰의 조세면제 혜택으로 인한 부담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되었을 것이다.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이(上善若水) 스스로 낮은 곳으로 향할 줄 알고 또 어려움을 만나면 돌아가는 지혜도 있어야 하는데 롱먼석굴의 몇몇 불상들은 신격화된 군주의 권력 과시와 위엄만을 추구하며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강요한 측면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차장에서 플라스틱 재활용품을 수거하는 할머니에게 버스 내에 있던 물병을 건네주자 몇 번이고 고맙다며 허리를 숙였다. 한 선생님은 검표하지 않은 5위안 셔틀버스표를 할머니에게 주고 더 큰 감사의 인사를 받기도 하였다. 저 민초들은 바로 옆 롱먼석굴의 불상을 통해 마음의 평온을 얻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가난하고 고단한 삶의 문제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구차한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살이인가 보다. 

당대의 전성기 생활의 여유와 당문화의 개방성과 포용성을 보여주는 당삼채는 황색, 녹색, 흰색 유약을 재료로 주로 만들어진다.
▲ 뤄양의 당삼채 당대의 전성기 생활의 여유와 당문화의 개방성과 포용성을 보여주는 당삼채는 황색, 녹색, 흰색 유약을 재료로 주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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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단을 실은 버스는 비단, 모란과 함께 뤄양의 3대 특산물 중에 하나라는 당삼채(唐三彩)기념품가게에 잠깐 들렀는데 녹색, 갈색, 흰색 유약의 말이며 낙타 등이 예뻐 보였지만 여행 동안 깨질 것 같아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삼채는 장식품이자 무덤 부장품이었는데 당나라 번성시기 생활의 넉넉함과 여유를 보여주는 것이자 비단길을 통해 아라비아 등의 문화를 과감하게 수용한 당 문화의 개방성과 포용성을 읽을 수 있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과거 천년고도의 풍모를 간직한 채 이제는 중공업도시로 거듭난 뤄양시에 접어들었다. 과연 현대화된 건물들과 길가를 오가는 많은 오토바이들에 다소 이물감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이정표에 문득 망산(邙山)이 눈에 들어와 '이곳이 바로 죽으면 간다는 그 북망산천이구나' 혼자 되뇌 보는데 가이드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망산의 왕묘를 흔적도 없이, 귀신같이 도굴해가는 도굴단 이야기를 하느라 한참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중국어에 "태어나기는 쑤저우에서, 놀기는 항저우에서 먹기는 광저우에서, 죽기는 리우저우에서(生在苏州, 玩在杭州, 吃在廣州, 死在柳州)"라는 말이 있는데 뤄양 북쪽의 작은 산, 망산이 '죽으면 묻히는 곳'의 대명사가 된 것은 과거 뤄양의 명성이 그만큼 드높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숙소인 취허비지니스호텔(聚和商務酒店)은 연수단의 전체 여행일정에서 가장 깨끗하고 좋은 호텔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다른 도시에 비해 뤄양의 물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8월5일~14일까지 중국여행을 기록한 것입니다.



태그:#뤄양, #롱먼석굴, #비로사나불, #용문석굴, #당삼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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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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