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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쿠르베 <돌깨는 사람들>
 귀스타브 쿠르베 <돌깨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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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면, 별 새로울 것이 없는 이 그림. 하지만 이 그림이 세상에 나왔을 때인 1849년에는 사정이 달랐다. 논란을 넘어 가히 혁명적이었던 것.

<돌깨는 사람들> 속에 나오는 두인물은 사회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노동자, 구체적으로는 채석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어린 소년과 노인이다. 중노동을 감당하기에는 힘겹게 보이는, 게다가 낡고 헤진 셔츠와 조끼를 입은 어린 소년과 노인을 모델로 하여 고된 노동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서민들의 삶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점이 문제였다. 당시 아카데미는 고상한 그림은 반드시 고상한 인물을 그려야 하며 노동자나 농민은 네덜란드의 전통적인 풍속화에나 적합한 주제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예술의 목적은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는 왜곡과 변형이 가능하다는 것이 당시의 예술가들의 가치관이었다.

프랑스 혁명 전에만 해도 귀족취향의 감미롭고 경쾌한 미술이 화단을 장악하고 있었다. 일명 로코코 미술. 귀족들의 세속적인 취향에 걸맞는 선정적이고 장식적인 그림으로 유명한 로코코 화풍의 특징은 귀족의 최신 패션을 화폭에 담는다든지,유흥을 즐기고 있는 귀족들, 그들의 영지에 느긋하게 앉아있는 영주들의 그림들로 가득했다. 쟝 오노레 프로고나르의 <그네>는 로코코미술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그네를 밀어주는 남편과, 그네의 앞쪽 풀숲에 숨어있는 정부(情夫) 사이에서 장난스런 유희를 즐기고 있는 귀부인.
▲ 쟝 오노레 프레고나르 <그네> 그네를 밀어주는 남편과, 그네의 앞쪽 풀숲에 숨어있는 정부(情夫) 사이에서 장난스런 유희를 즐기고 있는 귀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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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시즘과 연인들의 로맨틱한 이야기를 쾌락주의에 입각해 표현한 '귀족취향의 로코코 그림'과 노동자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돌깨는 사람들>의 차이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돌깨는 사람들>이 얼마나 새로웠는지는, 당시 화단을 풍미했던 작품과 비교해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앵그르 <그랑드 오달리스크>
 앵그르 <그랑드 오달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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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프랑스의 대가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이다. 오달리스크란 엄밀히 말하면 오스만 터키 제국의 후궁들이 거처하는 할렘에서 시중을 드는 노예를 말하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할렘의 여자들을 총칭해 오달리스크라고 불렀다. 오달리스크 그림은 동양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귀족들의 호기심과 욕구를 채우기 위해 당시 많이 그려졌다고 한다. 그런데 앵그르의 작품 속 오달리스크의 신체비례는 현실적이지 않다.  허리가 이상하게 길고, 엉덩이는 지나치리만큼 풍만하다. 이는 앵그르가 여성의 몸을 있는 그대로가 아닌,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형태로 일부러 바꿔서 그린 탓이다. 즉 앵그르가 이 그림을 그린 목적은 할렘 여성을 사실적으로 그리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미를 추구하는데 있었다.

이런 '이상적인 미'를 추구하는 화단에서, 앞서 본 <돌깨는 사람들>을 그린 이 남자의 등장이 어떤 파장을 몰고 왔을지 보지 않아도 눈에 훤하게 그려진다.

귀스타브 쿠르베 <파이프를 물고 있는 남자(자화상)>
 귀스타브 쿠르베 <파이프를 물고 있는 남자(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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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일곱의 이 남자. 몇 번의 살롱전 입선 때문인지 다소 오만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남자는 이후 죽을 때까지 가난한 사람들의 벗으로, 평생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적 이상을 경멸하며, '혁명적인 삶'을 살게 된다. 프랑스의 쥐라 산맥 부근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이 남자는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혁명적인 화가 가운데 한사람이다. 유럽미술의 오랜 전통을 깨고 종교와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을 단 한 점도 그리지 않았던 화가. 그는 고대의 신들을 모두 추방한 자리에 당대의 평범한 일상을 들어앉히고 거의 사진에 가까운 정직함으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화폭에 담았다. 그가 앵그르에게 던진 다음의 말이 이 같은 그의 신념을 잘 나타내 준다. 

"내게 천사를 보여달라, 그러면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앵그르가 기겁할만한 말이다. 사실 앵그르는 앞서 본 '그랑드 오달리스크' 속 할렘의 여자 역시 한 번도 본적이 없었으며 순전히 상상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이 남자, 바로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이다. 그는 "살아있는 예술을 만든다(Faire de l'art vivant)!"는 신념으로 사회적 진실과 예술적 진실을 근본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았다. 쿠르베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실을 원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당시에 널리 인정된 인습에 대한 항의가 되길 원했고, '부르주아에게 충격을 주어' 그들이 자만으로부터 벗어나길 바랐으며 상투적이고 능란한 조작에 대해 반기를 들어 타협하지 않는 예술적 순수함을 선언하려고 했다. 그의 1854년 편지에는 이러한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구절이 있다.

"나는 그림으로 먹고 살면서 단 한순간이라도 원칙을 벗어나거나 양심에 어긋나는 것은 하고 싶지 않네. 또 누구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아니면 쉽게 돈을 벌기위해 그림을 그리고 싶지도 않네."

실제로 그의 그림은 그러했다. 다음 그림을 보자.

귀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의 장례식>
 귀스타브 쿠르베 <오르낭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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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농부의 죽음을 계기로 삼아 소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계급계층들을 실물크기로 그렸다. 기존의 전통 역사화가 웅장함을 강조하거나 과장하는데 반해 이 작품은 작은 시골마을 오르낭의 장례식 이야기를 소박하고 진실하게 재현해 당대 미술계에 큰 논란이 되었다.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불경스럽다는 비난이 논란의 내용이었다. 커다란 캔버스에 역사적인 사건이나 영웅들의 서사로 채운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는 시골사람들이 그림 속 주인공이 되도록 그려낸 것도 역시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그만큼, 신과 영웅들의 전유물이었던 존엄성을 쿠르베는 40여명이 넘는 대중들에게 부여하면서 예술적 혁명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쿠르베는 그런 비판에 그리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그는 1851년에 쓴 어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사회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자요, 공화주의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혁명의 지지자이며 무엇보다도 리얼리스트, 즉 진짜 진실의 참다운 벗입니다."

그가 '사회주의자' 로 자처하게 된 데는 1840년 파리에서 무정부주의자인 푸르동의 사상을 접하게 된 것이 컸다. 프루동의 사상적 세례를 받은 쿠르베에게 있어 삶과 예술의 리얼리티는 형태나 색채, 감정과 개성, 그리고 상상력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들로부터 착취당하면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서민들의 삶과 그들을 처참한 현실로 내몰고 있는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 있었다. 즉 그의 '사실주의'는 단지 그 시대의 모습을 아는 것 뿐만 아니라 그러한 앎을 바탕으로 해서 앞으로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깨닫고 행동하는 것이었던 셈이다.

뼛속깊이 혁명적인 사람이었던 그의 성격은 비단 미술에서뿐 아니라 그의 삶 자체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미술계와 사회, 정부의 권위주의를 증오했다. 그래서인지 쿠르베는 정치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파리에 수립되었던 세계 최초의 노동자 민중 자치정부 '파리코뮌(paris commune)'의 평의회 의원으로 참가하여 미술인 동맹의 대표로도 활동했다.

1871년 3월 28일, 파리시청에서의 코뮌 선언
 1871년 3월 28일, 파리시청에서의 코뮌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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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근대 시민사회를 성립시킨 프랑스 대혁명. 그 마지막 단계였던 '파리코뮌'은 불과 두어 달밖에 지속되지 못한, 거리의 바리케이드로 세운 허술한 정권이었지만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민중 자치정부였다.

파리코뮌이 성립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2월혁명으로 루이 필리프가 축출되고, 뒤이어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 3세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프로이센과 전쟁을 하게 된다. 결국 개전 6주도 안된 9월초에 황제와 프랑스군은 스당(Sedan)에서 프로이센군에게 항복하고 9월 4일에 이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파리의 민중이 봉기하게 된다. 결국 민중들은 입법원으로 하여금 제정의 몰락을 선언하게 하고 파리시청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제3공화정을 선포하였다.

임시정부는 전쟁을 계속하려 하였으나 1871년 1월말에 파리마저 항복하게 되고, 3월에 독일에게 알자스와 로렌의 일부를 양도하고 50억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강화가 성립됐다. 그러나 파리의 노동자와 소시민층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민방위군은 3월 18일 파리의 행정권을 장악하여 ‘파리 코뮌’을 수립하고 26일에 코뮌평의회 의원 약 90명을 선출했던 것이다. 물론, 이 명단에 사회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쿠르베가 빠졌을 리 없다. 쿠르베는 파리코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미술부 장관, 파리예술가연맹의 위원장, 루브르 박물관의 책임관리자로 활동했다.

코뮌평의회 의원들은 곧 사회개혁에 착수했다. 그 내용은 노동조건의 개선, 소유자가 포기한 공장의 접수, 협동적 생산과 급진적인 교육개혁 등 종전의 노동운동과 프랑스의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시 코뮌 지배하의 파리에서 발행된 신문에 실린 칼럼이 이를 말해준다.

"이제 시의 시대는 끝났다. 곧 지루한 산문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승리에 도취된 파리 시민들에게 환호성을 멈추고 곧 닥칠 정부군과의 결전을 준비하라는 뜻이었다. 이러한 코뮌에 대해 정부군은 파리를 포위한 채 코뮌이 식량부족으로 지치기를 기다렸다. 코뮌은 초기의 축제분위기와는 달리 점차 가혹해지는 식량난에 시달려 동물원의 동물을 살육하고 심지어는 애완동물과 쥐까지 잡아먹었다고 한다. 이를 알아차린 정부군은 5월 21일 공격을 개시했고 훗날 역사책에 '피의 일주일'로 기록되는 정부군과의 격렬한 시가전 끝에 28일 코뮌은 무너졌다.

쿠르베는 코뮌이 무너진 뒤, 방돔 광장의 나폴레옹 석주를 파괴한 죄로 감옥에 보내진다. 몇 개월 뒤에 병보석으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프랑스 정부에 의해 전 재산이 몰수되고, 새로운 기둥을 세우기 위한 비용으로 생전에 그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막대한 벌금이 부과되자 쿠르베는 스위스로 탈출한다. 이때 그의 나이 54세. 그리고 그는 스위스의 호반에서 망명생활을 한지 4년 만에 객사하고 만다.

방돔광장에 세워졌던 나폴레옹 기념상을 파괴한 코뮌군의 모습이다. 이 사진의 뒤쪽에는 텁수룩한 수염을 한 쿠르베의 모습도 보이는데 파리 경찰당국은 코뮌에 가담했던 사람들 중에서 살인범을 색출하기 위해 사진을 증거자료로 활용했다 한다.
▲ 파리코뮌 당시 상황을 기록한 사진 방돔광장에 세워졌던 나폴레옹 기념상을 파괴한 코뮌군의 모습이다. 이 사진의 뒤쪽에는 텁수룩한 수염을 한 쿠르베의 모습도 보이는데 파리 경찰당국은 코뮌에 가담했던 사람들 중에서 살인범을 색출하기 위해 사진을 증거자료로 활용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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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이 쓸쓸하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삶을 선택하고 그 길을 올곧게 걸어간, 그래서 행복했던 예술인으로 앞으로도 기록될 것이다. 왜냐하면 쿠르베는 자신 스스로 예술가이기 이전에 인간이기를 자각했고, 지성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그림을 택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그림의 목적은 이상화된 상상력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쿠르베는 이전의 미술계가 안고 있었던 상투적인 기법과 낡은 양식들을 걷어 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했다. 더 나아가 쿠르베의 리얼리즘은 서양미술사에 있어 예술가가 ‘무엇을 왜 그려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사회적 현실로부터 찾으려했던 최초의 유파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갖는다.

그렇다. 앞서본 <돌깨는 사람들>은 당시에는 화단과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의 그림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캔버스의 오를 권리를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던 귀족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노동자와 농민에게도 따뜻한 시선을 주었던 쿠르베가 아니었다면, '사회적 메시지로서의 예술'을 주장해 당대의 예술가들과 부르주아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고, 그 비판을 꿋꿋하게 이겨냈던 쿠르베의 신념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돌깨는 사람들>을 보고 별 감흥이 없이 지나칠 수 있었을까. '사실주의'의 문을 활짝 열어제낀 쿠르베를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태그:#쿠르베, #돌깨는 사람들, #파리코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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