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2월 30일. 우리는 만리장성을 둘러본 후 점심을 먹고 명 13릉으로 이동했다. 명 13릉은 말 그대로 명나라 황제 13인과 황후 23인을 모신 무덤군인데, 현재 개방하고 있는 무덤은 장릉(長陵), 정릉(定陵), 소릉(昭陵) 세 곳 뿐이다. 가이드는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하는 장릉도 아니고, 지하 궁전을 볼 수 있다고 하는 정릉도 아닌 소릉(昭陵)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소릉은 명나라 황제 목종(穆宗)인 주재후(朱載后 1537~1572)와 그의 세 황후의 합장릉이다. 목종의 재위기간이 겨우 6년에 불과하였기 때문인지, 재위기간 동안의 치적이 많지 않아서인지, 날씨가 추워서인지, 이곳을 찾은 방문객은 우리 일행 외에는 없었다.   

 

 

이곳 소릉도 다른 능의 구조와 비슷하게 능문(裬門), 능은문(裬恩門), 능은전(裬恩殿), 명루(明樓)의 순서대로 줄지어 있다. 이들 건축물들은 명말청초에 걸쳐 여러 번 훼손되었는데, 현재 보고 있는 능은문과 능은전, 명루는 1987년에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들 건축물에는 아직 세월의 더께를 뒤집어 쓴 고색창연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기와를 뚫고 무성하게 자랐던 숙초(宿草)의 자취를 보니 세월이 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떼의 중국인들을 인솔한 가이드가 건축물 앞에서 열심히 큰 소리로 설명을 하자 이것을 들은 중국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눈치였지만, 나와 아들은 짧은 중국어 실력으로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결국 소릉은 주마간산격으로 그렇게 스쳐 지나갔다.

 

 

미리 가본 라싸

 

명 13릉을 보는 것으로 오늘 관광이 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오후 3시가 될 무렵 우리는 ‘설역풍정 장문화원(雪域風情 藏文化園)’이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분위기가 독특하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오른쪽 편에 포탈라궁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이곳은 중국 서장(西藏) 자치구의 큰 도시인 라싸(拉薩)의 거리와 티베트 불교 사원의 풍정을 재현해 놓은 곳이었다.

 

오른쪽에는 황금빛의 티베트 불경통이 죽 걸려 있었다. 통 안에 불경이 들어 있기 때문에 한 번만 통을 굴리기만 하여도 불경을 읽은 것이나 진배없다고 하던가.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 펄럭이는 오색 천들도 한껏 이국적인 풍정이다. 저 무수히 많이 걸린 오색 천에도 불경이 적혀 있다. 절대 신앙의 경지가 놀라울 뿐이다.

 

 

사원에 이르기까지 천막을 쳐 놓은양 옆에는 티베트 불교와 관련된 그림들과 승려들의 활동을 담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는 손바닥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 역시 티베트 불자들이 행하는 ‘오체투지’를 상징화한 것이다. 덕원이가 손바닥 모양에 맞춰 손을 갖다 대고 절을 하는 시늉을 하였다.

 

빨강, 주홍, 노랑, 초록, 파랑 등의 화려한 색깔과 꽃문양이 새겨진 사원의 외관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넘어 참 아름다웠다. 우리 일행은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라마교 사원의 하얀 탑 앞에서 라마승과 함께 향을 피우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였다. 

 

아마도 라싸에 가게 되면 실제로 수많은 라마승과 오체투지하는 불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직 가보지 않은 라싸에 대한 기대로 벌써부터 가슴이 뛰는 듯 했다. 길상여의(吉祥如意)라는 말이 있듯이 마음먹은 대로 되어 내년 여름 라싸를 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중국인들과 함께 한 1일 투어의 마지막 방문지는 또다시 옥을 파는 상점이었다. 한국 관광객뿐만이 아니라 중국관광객들도 단체 여행을 하게 될 경우 빼놓지 않는 코스가 상점 방문인가보다. 상품을 광고할 때는 무표정하여 도무지 살 것 같지 않은 사람들도 상점을 나올 때 보니 옥 반지, 옥 목걸이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천자의 궁전이라 할 만한 태화전

 

12월 31일. 오늘 답사할 첫 번째 코스는 고궁이다. 어젯밤 천안문 광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야경이 아름다운 빈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더니 기분이 한결 상쾌하다. 이른 아침인데도  깃발을 들고 따라다니는 깃발부대 여행단과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또 광장에는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열을 맞추어 손을 앞뒤로 흔들며 행진을 하고 있다.

 

 

천안문 중앙에 걸려있는 모택동의 사진을 보면서 고궁으로 향했다. 무려 14년 동안 해마다 100만 명의 대인원이 동원되어 완공되었다고 하는 고궁은, 입구인 오문(午門)에 들어서자마자 장중한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붉은 벽돌색 위의 황금빛 누각은 참으로 단아하면서도 장중하고 품위가 있었다.

 

고궁은 고궁의 내성 외성이 모두 붉은 칠을 하고 누런 기와로 덮여 있기에 ‘자금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람이 건축물에 압도당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만, 일개 백성의 마음을 잡기 위한 카리스마가 이러한 건축물에서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지금 북경은 2008년 올림픽을 위해 대대적으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곳 고궁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 최대의 목조건물이라고 하는 태화전도 철근으로 외양이 덮여 있다. 그래서 태화전의 내부를 보지 못했다. 조선시대에 홍대용은 연경에서 태화전을 보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태화전 정전은 3충 처마에 높이가 백 길이나 된다. 남북이 3칸이고 동서가 9칸인데 한 칸의 크기가 스무 자는 된다. 붉은 섬돌(丹陛)의 높이가 한 길은 되는데 섬돌 남쪽에 있는 월대(月臺)는 수백 명이 앉을 만하다. 대(臺) 밑은 뜰이 세 계단인데 높이가 한길 반은 되고, 매 계단마다 돌난간을 붙였는데 난간 높이가 어깨와 닿았다.

 

위아래에 청동 향로(靑銅香爐) 열여덟 개가 놓였는데, 조회 때 향을 사르게 된다. 뜰 남쪽 마당은 만 명이 앉을 만한데 이른바 천관(千官)이 조알하는 곳이다. 태화전 앞뜰 3층 돌난간이 꺾어져 북으로 보화전 좌우에까지 와서 닿는데 돌난간들을 길이로 계산한다면 수백 수천 보에 달할 것 같다. 내외 전각 마당에서부터 태청문(太淸門)에 이르기까지 안으로 전부 벽돌을 깔았는데, 옆이 일정하여 고루 땅을 덮었으므로 흙 한 점을 볼 수가 없다.

 

군데군데, 물구멍을 통해 두고 아래는 지하 배수로가 있어, 가물 때도 먼지가 나지 않고 비가 와도 질지 않다. 모든 전각들의 높고 웅장함과 뜰과 난간들의 크고 화려함은 말로서도 전할 수가 없고 글로서도 뭐라고 기록할 도리가 없다. 너무도 어마어마하고 황홀하니 참으로 천왕(天王)의 궁전이라 하겠다.

 

아마도 오늘 보지 못한 태화전은 몇 해가 지나야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태화전의 뒤에는 중화전(中和殿)이 있고 다시 그 뒤에는 보화전(保和殿)이 있다. 보화전은 청대에 와서 지위가 격하되어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로 전락하였지만, 전각 안에는 여전히 호사스럽기 그지없는 가구들과 왕좌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미 북경 답사만 세 차례나 하였다고 하는 김교수님께서 보화전 뒤편의 돌조각을 보라 하셨다. 일명 대석조(大石雕). 200톤이나 되는 거대한 돌에 아홉 마리의 용이 꿈틀되는 것을 그려 놓은 것이다. 하필 아홉 마리일까? 숫자 9는 동양에서 최고 완성의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완성을 뜻하는 숫자 9와 어좌를 상징하는 용의 결합보다 황제를 뜻하는 더 큰 상징이 있을까. 그렇더라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돌덩이 위에 용을 새길 수 있는 저력이 또다시 놀랍기만 하다.  

 

태자를 간택한 밀지가 보관된 건청궁

 

이제 고궁의 3대 외전을 다 보았으니 내전으로 향하였다. 제일 먼저 보이는 곳은 건청궁(乾淸宮). 건청궁 앞의 두 마리 금동 사자가 눈길을 끈다. 숫사자가 오른 발로 여의주를 움켜 쥐고 있고, 암사자는 어린 사자와 놀고 있다. 어린 사자는 암사자의 검지 손가락을 물고 있다. 사자 역시 황제의 권위를 상징한다.

 

 

건청궁은 본래 황제가 정무를 보던 곳이기도 하면서 침실로 사용했던 곳이다. 궁 안에 어좌가 있고 ‘정대광명(正大光明)’라고 쓴 커다란 현판이 있다. 이 현판을 쓴 주인공은 청의 세종황제다.

 

이 현판 뒤에는, 황제가 정한 태자의 이름을 어필친서로 적어 상자 속에 넣어 보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황제가 죽은 후에 이 상자를 열어보고 황제가 간택한 태자를 왕위에 앉혔다고 한다. 황제와 그 후계자의 이름이 비밀리에 전해지던 이곳에 권력을 향한 무서운 암투가 있었음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건청궁 내부는 참 아름답다. 고궁에 주로 쓰인 벽돌 색과 노란 색의 조화, 그것이 주는 강렬한 색채 이미지는 은근히 사람을 압도하게 만든다. 천장에 그려진 파란색 바탕에 노란 용무늬도 신선하다. 붉은 창살도 장중하고 멋있다. 

 

 

건청궁 뒤편에는 교태전(交泰殿)이 있고 다시 그 뒤에 곤녕궁(坤寧宮)이 있다. 건청궁과 곤녕궁은 모두 주역의 괘 이름이다. 건은 하늘을 표상하고, 곤은 땅을 표상한다. 건청궁의 좌우에 일정문(日精門), 월화문(月華門)이 있는 것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즉, 하늘과 땅에 일월이 밝듯이, 온 천지가 태평성대를 이루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곤녕궁 뒤편에는 명청 시대의 황제와 후비들이 즐겨 놓았던 정원인 어화원(御花園)이 있다. 향나무 연리지에 쉼 없이 남녀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기이하게 생긴 수목이 높이 솟아 있고 아치형 다리도 있다. 오늘처럼 추운 겨울만 아니라면 언제든지 아름다운 관상처가 될 곳 같았다.

 

이제 오문에서부터 직선코스로 어화원까지 둘러본 우리는 내전 좌우의 20여 개의 궁들을 다 둘러볼 여유가 없어서 장춘궁 서쪽에 있는 궁만 보기로 하였다. 장춘궁에 홍루몽을 주제로 한 대형벽화가 있다는 말을 듣고 확인하고 싶어서 이쪽을 택한 것이다.

 

하긴, 몇 사람이 함께 하는 여행에 여유가 있느니 없느니 할 것도 없지만, 비슷비슷한 궁전을 다 둘러보는 것도 사실 좀 지루하긴 하다. 소주(蘇州)에 있는 그토록 아름다운 정원도 하루에 다 둘러보고 나면 졸정원이든 유림이든 별 구분 없이 오로지 연못 밖에 본 것이 없고 나중에는 정원 얘기만 들어도 지겨웠다고 한 사람이 있었다.

 

혹 두어 시간 만에 고궁을 다 섭렵한다 해도 고궁을 기억할 때 지겨운 붉은 벽돌 색만 기억한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제고 다시 오게 되면 그때는 오늘 둘러보지 않은 곳을 보면 되니 욕심내어 다 보려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다. 

 

 

장춘궁은 청의 건륭황제의 부인인 효현황후가 한때 거주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장춘궁 내부는 개방되어 있지 않아서 유리창을 통해 겨우 보았고, 게다가 보고 싶었던 홍루몽 벽화도 있긴 있었지만 너무 흐릿하고 유리가 가로막고 있어서 육안으로는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저수궁은 서태후가 사용하였던 궁이다. 서태후의 공식명칭은 자희태후이다. 그녀가 고궁의 서쪽에 있는 저수궁에 거처하였기 때문에 서태후라고 부르는 것이다. 각각의 궁 앞에 몇 아름이나 되는 커다란 솥단지도 인상적이다.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 물이나 소금을 넣어두었던 것이라고 한다. 실용적인 용도로 쓰였을 뿐 아니라 고궁의 멋진 소품 중의 하나이다. 저수궁을 둘러보고 고궁의 북문에 해당되는 신무문(神武門)을 나왔다.

 

의종황제가 자결한 경산

 

큰 길 건너 먼 산에 경산(景山)이 보인다. 경산은 인공으로 만든 공원이면서 산이다.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지만 북경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고 한다. 경산 아래에 석탄을 쌓아 두고 뜻밖의 재난에 대비하였기 때문에 경산을 ‘매산(煤山)’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명청시대의 황제들이 이 공원을 즐겨 찾았지만 명나라 숭정황제인 의종(毅宗)이 자결한 곳이 바로 이곳이기도 하다. 정부에 항거하기 위해 조직된 무장 농민집단의 지도자인 이자성이 파죽지세의 여세를 몰아 북경을 함락하자 고궁에 있던 숭정황제는 처자식을 제 손으로 살해하고 자신은 경산으로 도망쳐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한다. 경산공원에 가면 그 나무가 아직도 있다. 천하를 호령하였던 황제의 말로가 겨우 자살에 그치고 말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듣는 이를 씁쓸하게 만든다.

 

고궁은 천안문과 함께 북경을 대표한다. 그리고 가장 중국적인 색채가 짙은 곳이다. 또 건축미학이 돋보여 웅장하고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곳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권력의 가장 중심부였기에 이곳에는 수많은 역사적 진실이 끊임없이 후대의 평가를 받고 있고, 후대인들은 이것을 경계의 거울로 삼으려 하고 있다. 

 

이제 다시 이동할 시간이다. 우리는 고궁을 뒤로 하고 혼잡한 거리로 나와 천단공원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기다렸다. 고궁 박물관에서 60원에 산 한국어판 자금성 도록을 길거리에서는 40원에 외치고 있다. 약간 속이 상했지만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태그:#북경, #자금성, #천안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