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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주>

"정계의 심각한 인재난을 해소하는 긴급책으로 총리는 각료 등 '국가공무원특별직 국적제한완화 임시조치법안'(일명 '각료 빅뱅법안')을 이번 국회에 제출키로 결정, 1일 발표한다. 총리는 경제난 등 당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내각에 외국인 거물들을 영입하기로 했으며 그 대상으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대통령, 마거릿 대처 전 영국총리, 리콴유(李光耀) 전 싱가포르 총리, 미키 캔터 전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이 유력시된다."

 

20세기의 마지막 만우절이었던 1999년 4월1일자 <아사히신문> 정치면에는 눈이 번쩍 뜨이는 기사가 실렸다. 일본정부가 외국인도 각료로 임명할 수 있도록 관련 법안을 국회에 제출키로 했다는 것. 기사는 '영입' 대상 유명 외국인의 이름과 프로필까지 상세하게 소개하며 다른 기사들과 똑같이 편집해 무심코 신문을 펼쳐 든 사람이라면 깜빡 속아넘어가게 해놓았다.

 

이 기사는 당시 국내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KBS와 MBC의 도쿄특파원들이 기사내용이 사실인줄 알고 아침뉴스에 그대로 인용 보도했기 때문. <아사히신문>은 1면 기사안내란에 '오늘은 만우절, 지면 가운데 가공의 기사가 하나 있으니 알아맞혀 보세요'라고 힌트를 남겼지만, 새벽 마감시간에 쫓긴 방송사 특파원들은 이를 미처 체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기사에 대한 언론계 내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일본의 정치·사회 현실과 국민의 불만을 기막힌 풍자에 담아 신선한 웃음거리를 선사했다"는 반응이 주조였다. "아무리 만우절이지만 어떻게 기사 형식으로 '거짓'을 신문에 실을 수 있느냐"라는 일부 비판도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란 반론에 막혔다.

 

"상식 있으면 사실로 안 받아들였을" 공상, 한국에선 현실

 

그런데 9년 전 일본에서 나왔던 이 '맹랑한' 공상이 지금 한국 땅에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외국인 공무원' 등용 방침을 천명한 데 이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는 그 구체안을 마련, 관련 법률을 21일 국회에 제출했다.

 

인수위는 장·차관 등 고위직에까지 외국인을 임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앞으로 정부의 법률 제·개정안을 영어로도 만들겠다는 계획까지 밝혔다. 몇 사람이 될지 모르는 외국인 공무원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따로 '영문본'을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과연 이렇게 나라가 가는 것이 정상일까? 물론 '공상'이 현실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 정보화 시대에 9년이란 세월은 공상을 현실로 바꿔놓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한국 공무원들이 더 경쟁력을 갖춰야 하며, 이를 위해 '경쟁'을 도입하겠다는 취지에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문제는 절차와 방법이다. 당선인이 한마디 하고, 인수위가 뚝딱뚝딱 법을 뜯어 고쳐 내놓으면 그것으로 그만인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연구직'을 제외하고는 외국인 공무원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은 단지 경쟁원리를 몰랐거나, 국수주의적 발상에 사로잡혀있었기 때문만일까?

 

 

미국 공무원 빅터 차는 왜 한국말을 하지 않았나

 

지난해 2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 취재를 갔을 때 일이다. 미국 대표단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소속의 빅터 차 한국·일본 담당 보좌관이 차석대표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고, 미국 국적이지만 부모가 모두 한국인인 이민 2세다.

 

한국 대표단의 한 관계자에게 빅터 차의 한국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물어봤다. 그 관계자는 "우리(한국 대표단)끼리 말하는 걸 다 알아듣는 것 같더라"고 했다. 하지만 말을 어느 정도 하는지는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이상해서 다시 "그 정도면 우리말로 대화를 나눠보지 않았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관계자는 펄쩍 뛰며 "큰일 날 소리, 그 사람 철저히 영어만 써요, 괜히 우리말 쓰다가 찍히게?”라고 반문했다.

 

공무원의 국적이란 그런 것이다. 미루어 짐작컨데 빅터 차 보좌관은 한국어 말하기도 유창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 뼘의 국익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는 협상장에서 미국인 동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다간 '한국과 내통한다'는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그런 것을 항상 의식해야 하는 존재가 바로 공무원이다.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나라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미국이 이 정도인데, 다른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인수위는 국가 안보와 기밀을 다루는 부처는 외국인 공무원 임용을 제외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과연 그 경계가 그렇게 뚜렷할까?

 

외국인 공무원은 비밀 잘 지킨다고

 

공무원, 그것도 고위관료일수록 언제 국익과 국익이 부딪히는 국제협상의 현장에 서게 될지 모른다. 경제관료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럴 때 정말 능력만 있으면 되지, 국적은 상관없는 것인가.

 

정책결정권을 가진 고위직 관료라면 필연적으로 국가의 핵심 정보와 지적 재산에 접근하게 된다. 정책결정이란 종합적인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내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초래될지 모르는 국가 정보와 지식 기반의 유출 우려는 어찌할 것인가. "외국인들은 임기가 끝나도 비밀을 잘 지킨다"는 당선인의 '믿음'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이렇듯 '외국인 공무원 임용 방침'에 대해 드는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명박 당선인과 인수위는 지금까지 이런 우려들을 씻기 위한 어떤 절차도 밟지 않았다. '외국인 공무원'에 대한 찬반을 떠나, 나라의 기본에 관한 문제를 이렇게 아무런 사회적 논의 없이 처리할 수 있다고 여기는 발상 자체가 놀랍기만 하다.

 

요즘 인수위에 출입하면서 '내가 지금 만우절 기사를 쓰고 있는 건가?'라는 착각이 때때로 든다.


태그:#외국인 공무원, #이명박 인수위, #정부 조직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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