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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차마 잎들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나무는 차마 잎들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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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詩碑)는 어디가 좋을까. 이 보문산 어때?"

이튿날(10월 29일), 아침 일찍 그의 시비가 있는 보문산 사정공원으로 향했다. 사정공원의 나무들은 이별연습이 한창이다. 제 수족 같은 잎들을 차마 떠나보내기 아쉬워 제 등걸 아래 붙들어 두고 있다. 한반도의 가을은 나무와 나뭇잎들의 이별 연습 때문에 서럽도록 아름답다.

이곳 사정공원에는 박용래 시인의 시비 말고도 '꿈이라면'이라는 시가 적힌 만해 한용운의 시비와 '다시 광야에서'라는 시가 적힌 김관식 시비가 서 있다. 박용래 시인의 시비는 어떤 논의의 과정을 거쳐 여기에 서 있게 된 것일까. 박용래 시인보다 다섯살 아래였지만, 친구처럼 지냈던 임강빈 시인의 회고를 참고할 수밖에.

문협 주최로 보문산 음악당에서 백일장 행사가 있었다. 대전의 터주노릇을 하는 그를 심사위원에서 뺄 수는 없었다. 오후가 되자 점심때부터 마신 술이 벌써 취해 있었다. 그는 열외로 밀렸다. 행사를 마치고 내려가는 일행 중에 제일 늦게 두 사람이 뒤로 처졌다. 비틀거리는 그를 붙잡고 한마디 쏘아붙였다.

"이젠 아주 시를 버릴 작정 했어?
"……?"
"죽으면 그만이야. 쓰고 싶어도 못 하잖아."
"얼래, 참 이상한 말 하네."
"시비(詩碑) 어디가 좋을까. 이 보문산 어때?"
"필요 없어. 저 아래 가서 술 한잔 사라, 임마."

우린 이렇게 씨부렁거리며 억지로 내려왔다

- 임강빈의 글 '박용래, 그리고 우정'에서

살다 보면 세상의 무엇과도 비길 수 없을 만큼 술 한 잔이 절실할 때가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술과 춤과 노래와 시는 다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다. 사람을 위로한다는 점에서. 무엇이 그를 백일장 심사라는 책임을 내버려둘 만큼 그를 취하게 했을까.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시비

'저녁눈'이라는 시가 적힌 박용래 시비. 조각가 최종태가 구성했고,  김구용 시인이 글씨를 썼다. 나뭇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이 조각가 최종태가 조각한 것이다.
 '저녁눈'이라는 시가 적힌 박용래 시비. 조각가 최종태가 구성했고, 김구용 시인이 글씨를 썼다. 나뭇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이 조각가 최종태가 조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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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는 보문산 시루봉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서 있다. 일 년에 몇 차례 보문산을 오를 때마다 이곳에 들르곤 한다. 눈은 하염없이 내리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을 때, 이곳에 와 시비에 적힌 '저녁눈'을 읽을 때면 느낌이 아주 생생하게 살아난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 시 '저녁눈' 전문

시비 뒷면에 적힌 건립기는 이 시비가 1984년 10월에 세워졌다고 말한다. 박용래 시인이 세상 떠난 지 4년 뒤에 세워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시비 가운데 몇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이 시비는 아름답다. 김구용 시인의 멋들어진 글씨체와 최고의 조각가인 최종태의 조각이 버무려진 시비는 각(刻)이 조금 옅게 파인 것이 흠이라면 흠이랄까, 흠잡을 데라곤 거의 없다.

시비 뒷면, 시비건립위원회가 쓴 건립기는 그가 "이 고장을 지키며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고운 나무결 같은, 향토색 짙은 언어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을 주었다"라고 적고 있다. 봄에 와서 바라보는 시비는 쓸쓸해 보이고 겨울에 와서 바라보는 시비는 안쓰럽다. 곱게 물든 뒤편의 단풍나무 탓일까. 오늘 바라보는 시비는 쓸쓸하지도, 안쓰럽지도 않다.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만 시인의 집터

그가 생의 많은 시간을 지냈던 오류동 골목. 이제 이 골목마저 곧 재개발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가 생의 많은 시간을 지냈던 오류동 골목. 이제 이 골목마저 곧 재개발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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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가 시인으로서 그의 생애 대부분을 보냈던 오류동으로 간다. 시인이 살던 집을, 아니면 집터만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1943년, 서울 조선은행 본점에 취직한 그는 서울 생활을 몹시 힘들어하다가 징집영장 받은 것을 계기로 3년만에 그만두고 만다. 훗날 그는 "서울은 단순하게만 자란, 그래도 조금은 행복한 나에게 처음으로 고독을 알게 했다. 달개비의 보랏빛이 그립고 황토빛이 그리웠다"라고 회고한다.

서울에서 해후한 고향 소꿉친구인 언년이에게서 "저는 누가 있어요, 미안했어요"라고 퇴짜맞고만 사랑 고백도 한 몫 거들었으리라.

해방과 동시에 그의 대전생활이 시작되었다. 1946년, 교사생활에 첫발을 디딘 그는 보문중학교를 필두로 이후 철도학교, 한밭중학교, 대전북중학교 등에서 교사 생활을 하게 된다. 수필가 김소운의 농장을 찾아가 자청해서 일했던 50일과 논산 부적면 친구네 과수원에서 잠시 일했던 때와 당진 송악중학교에 있던 때를 제외하곤 단 한 차례도 대전을 벗어난 적이 없다.

1955년에는 도립병원 간호사였던 이태준 여사와 결혼했고, 결혼 10년이 지난 1955년에는 마침내 자신의 집을 마련했다. 대전 오류동 17번지 15호. 대지 55평.(<이문구의 문학동네사람들> 168쪽). 그는 이 집을 청시사(靑枾舍)라 불렀다. 아마도 감나무가 있었던 집인가 보다.

어머니 어머니 하고
외어 본다.
이 가을
아버지 아버지 하고
외어 본다
이 가을
가을은
오십 먹은 소년
먹감에 비치는 산천
굽이치는 물머리
잔 들고
어스름에 스러지누나
자다 깨다
깨다 자다.


- 시 '먹감' 전문(호서문학·1976)

"가을은/ 오십 먹은 소년"이라고 노래하지만, 오십 살 먹은 것은 가을이 아니라 바로 그였다. 먹감 하나에도 어머니와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고향의 강을 그리워 하고, 그 강의 노을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번지 하나만 달랑 들고, 찾아간다. 지금의 오류동은 아파트와 대형건물이 빼곡히 들어섰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어렸을 적 아무리 할머니가 과자를 꼭꼭 숨겨둘지라도 끝내 찾아내고야 말던 솜씨는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사라질 솜씨가 절대 아니다. 우선 옛 동사무소 격인 주민센터로 가서 지적도부터 얻고 볼 일이다. 그러나 주민센터는 굳게 잠겨 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일요일 아닌가.

궁리 끝에 재개발 위원회로 찾아갔다. 1970년대 말부터 오류동에 살았다는 초로의 아저씨가 홀로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그와 함께 큰 지적도를 펼치고 샅샅이 살폈지만, 17번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재재발위원회 사무실을 나와 그가 살만한 골목을 찾아보다가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추측컨대, 시인의 집이 있던 자리에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지번이 사라진 게 아닌가 싶다.

그가 살던 때, 이 오류동은 올망졸망한 집들이 골목을 채우고 있었을 터이다. 겨울이면 집집 처마 밑엔 시래기가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고, 아이들은 담벼락에 나와 볕바라기를 하거나 팽이를 지쳤으리라.

바닥 난 통파
움 속의 강설(降雪)
꼭두새벽부터
강설을 쓸고
동짓날
시락죽이나
끓이며
휘젓고 있을
귀뿌리 가린
후살이의
목수건(木手巾).


- 시 '시락죽' 전문 <문학사상>(1973)

이문구 선생이 쓴 행장기를 보면 시인은 물리지도 않는지 시래기죽·콩나물죽·아욱죽·수제비 따위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나도 어렸을 적에 시락죽을 많이 먹어봤는데 된장을 잘 풀면 아주 구수한 맛이 나는 게 시락죽이다. 특히 겨울날, 밖에 눈보라가 휘몰아칠 때 먹는 뜨거운 김을 호호 불어가며 먹는 시락죽은 일품이다. 수제비는 별로였지만.

이곳 오류동 집에 살 적에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시인의 금주선언이다. 날마다 금주선언을 한 시인은 그 기념으로 집안의 술잔이 될만한 그릇은 모조리 깨곤 했다. 그러나 그 금주선언은 단 하루를 넘기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시인이 자주 다녔다는 대전역 부근 목척교 언저리의 선술집들도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이제 내년 안으로 오류동에서 골목이라고 생긴 건 죄다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최근 대전지역에 불어닥친 재개발 붐은 골목 자체를 말살하고 있다. 골목은 공동의 추억을 만들어 주었던 정다운 곳이다. 골목의 부재 때문에 우리네 삶은, 아니 우리 아이들의 삶은 한층 더 외롭고 쓸쓸해지리라.

무덤 위에 첩첩 무덤만 사네

공원 묘지로 가는 길.
 공원 묘지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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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잠든 삼괴동 천주교 공원묘지를 향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건 1980년 11월 21일이었다. 벌써 27년의 세월이 흘렀다. 삼괴동 마을 앞에서 일하던 농부에게 공원묘지로 가는 길을 물으니, 바로 저기라면서 산을 가리킨다. 공동묘지라지만, 까짓 묘지가 몇 기나 될라구.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공원묘지 풍경은 나를 절망케 했다.

무덤 위에 무덤 사네, 첩첩 산중
달 있는 밤이면
곰방대 물고
무덤 속 드나들며
곰방대나 털고
머슴들은 여름에도
장작을 패고
무덤 속 드나들며
장작이나 지피고

무덤 위에 첩첩 무덤만 사네

- 시 '空山(공산)' 전문

산꼭대기까지 빼곡히 들어찬 무수한 묘지들. 날 기다리는 건 대전 국립현충원보다 훨씬 많은 묘지들이다. 적어도 2, 3천 기는 될 것 같다. 나중에 처음 길을 물어봤던 아저씨에게 들으니, 이곳 공동묘지는 50년 전에 생긴 것이라고 한다. 제 아버지 묘소도 10년만 찾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나.

드디어 '크리멘스 용래지묘'를 찾다

묘지와 묘비.
 묘지와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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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 뒷면. 이 여사와 네 자녀와 사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묘비 뒷면. 이 여사와 네 자녀와 사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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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고 그만 내려갈까. 그러나 어디선가 시인이 "겁먹지 마, 곧 날 찾을 수 있을 거야"라고 속삭이는 것 같다. 7부 능선쯤부터 묘지를 뒤지기 시작한다. 삼십여 분가량이나 흘렀을까. 드디어 '크리멘스 용래지묘'라 써진 묘비를 찾았다. 순간, 한 줄기 감동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묘비 뒷면에는 이태준 여사와 네 자녀, 그리고 사위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문구 선생은 그의 자녀 사랑이 각별했다고 전한다. 무덤 속 박용래 시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다. 당신이 이 세상에 먼저 와서 쓴 시들 때문에 위로받은 적이 있다고.

묘비 한 구석엔 시 '군산항' 일부가 새겨져 있다. 그가 쓴 많은 시편 가운데 왜 '군산항'이란 시를 써 넣은 것일까.

오늘, 내 불시 나그네 되어 빈손 찌르고 망대에 올라
멀리 갈매기 행방을 좇으면
곶은 굽이치는 탁류,
만식

- 시 '군산항' 일부

박용래 시인은 군산의 이병훈 시인과 꽤 친분이 두터웠다고 전한다. 술을 마시지 않아도 늘 얼굴이 붉수그레한 이병훈 시인과 가졌던 술자리 생각이 난다. 이병훈 시인도 벌써 망(望) 구십을 바라보는 연세가 되었구나.

시인의 옆엔 어떤 동무가 누워 있을까. 가벼운 궁금증이 일어 살펴보니, 묘비 뒷면에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로 시작되는 한하운 시인의 시구가 적혀 있다. 다행이다. 시인의 저승길 동무로서 손색이 없는 분이 곁에 묻혔으니.

시인의 묘소에서 바라본 앞산 풍경.
 시인의 묘소에서 바라본 앞산 풍경.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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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빛이 있어 좋다
먼 산 가차운 산
가차운 산에
버들꽃이 흩날린다
먼 산에
저녁해가 부시다
아, 산은
둘레마저 가득해 좋다


- 시 '둘레' 전문

그의 묘지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가 쓴 시대로 둘레마저 가득해서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가을빛이 아름답다. 한참을 바라보니, 찔끔 눈물이 난다.

박용래 시인은 '눈물의 시인'이라고 불릴 만큼 눈물이 흔한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삶의 부질없음, 누리는 것의 덧없음, 헤어짐의 속절없음 따위, 인생의 유전(流轉)에서 오는 삼재팔난(三災八難)이 아니었다"라고 그와 절친했던 이문구 선생은 말한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언제나 그의 눈물을 불렀다. 갸륵한 것, 어여쁜 것, 소박한 것, 조촐한 것, 조용한 것, 알뜰한 것, 인간의 손을 안 탄 것, 문명의 때가 아니 묻은 것, 임자가 없는 것, 아무렇게나 버려진 것, 갓 태어난 것, 저절로 묵은 것……. 그러기에 그는 한 떨기의 풀꽃, 한 그루의 다복솔, 고목의 까치둥지, 시래기 삶는 냄새, 오지굴뚝의 청솔타는 연기, 보리누름철의 밭종다리 울음, 삘기 배동 오르는 논두렁의 미루나무 호드기 소리, 뒷간 지붕 위의 호박넝쿨, 심지어는 찔레덤불에 낀 진딧물까지, 그는 누리의 온갖 생령(生靈)에서 천체의 흔적에 이르도록 사랑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사랑스러운 것들을 만날 적마다 눈시울을 붉히지 않은 때가 없었다. - <이문구의 문학동네 사람들> 144,145쪽

강경, 금강 포구에서 만난 올해 예순여섯 살이라는 낚시꾼은 "강경상고가 명문이라고 하지만 그곳 출신들이 역사의식은 없다"라고 평가했다. 그 말은 박용래 시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육영수 여사의 전기를 쓴 박목월 시인에게 "선생님은 너무 욕심이 많아욧!"이라고 말했다는 이문구 선생의 전언을 보면 박용래 시인이 사리판단이 아주 흐릿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왜 시인의 삶의 자취를 좇아 여기까지 왔나. 요즘의 나에겐 눈물이 너무 없다. 왜 새삼스럽게 눈물이 없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 눈물은 나를 씻기고, 나아가 세상을 씻기는 정화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인의 삶을 들여다 보며 나를 씻기고 싶었다. 시인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묘지를 내려오는데, 자꾸만 판소리 명창 임방울이 부른 단가 '추억'이 입가를 맴돈다.

"* 무덤 터에다 택실(宅室. 부인과 첩) 이름을 두고가며/ 동무에게 정을 두고 가서 가시는 임을 하직코 가셨지만/ 세상에 있난 동무들은 백 년을 통곡헌들 보러 올 줄을 어느 뉘가 알며/ 천하를 죄다 외고 다닌들 어느 곳에서 만나 보리오. -  임방울 단가 '추억' 일부

잔뜩 흐린 날씨. 한방울씩 간간히 빗방울이 떨어진다. 박용래 시인의 눈물 방울처럼.

박용래 시인 연보


박용래 시인. 시집 <먼바다> 책날개에 있는 사진을 찍어 트리밍 했다.
 박용래 시인. 시집 <먼바다> 책날개에 있는 사진을 찍어 트리밍 했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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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래(1925-1980)
충남 강경 출생. 강경상업학교 졸업.
조선은행 3년 근무

1946년 '동백' 동인.

1956년 1<현대문학>에 박두진 첫 추천 받은 후 '황토길', '땅'으로 추천 완료 등단.

1974년 한국문인협회 충남지부장 피선.

1980년 7월 교통사고로 3개월 간 입원, 11월 21일 오후 1시 심장마비로 사망

1969년 시집 <싸락눈> 출간
1975년  <강아지풀> 출간
1979년  <백발의 꽃대궁> 출간
1984년시전집 <먼 바다> 출간
1984년    산문집 <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 출간

덧붙이는 글 | * 신나라에서 나온 임방울의 음반의 해설에서 고려대 유영대 교수 이름으로 옮겨진 사설에는 "노던 터에다 값진 이름을 두고가며"로 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무덤 터에다 택실(宅室)이름을 두고가며"가 맞다. 여기서 댁이란 본부인을, 실이란 첩을 이르는 말로 생각된다.



태그:#박용래, #묘지,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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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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