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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수 읽으면서 글을 시작하겠다.

모진 바람 서리 날려 물풀은 시들고
굳세고 억척스런 오랑캐 말 교만하여라
한(漢)나라 전사 삼십만
곽표요(霍嫖姚) 장군이 거느렸노라
별빛처럼 흐르는 흰 깃털 허리춤에 꽂고
가을 연꽃잎 같은 칼날빛 칼집 밖으로 번뜩이노라
천자(天子)의 병사들 눈빛 받으며 옥관(玉關) 나설 때
오랑캐의 화살, 금빛 갑옷 위로 모래처럼 쏟아져 내리노라
용이 구름 일으키듯, 범이 바람 일으키듯, 혈투를 다해갈 때
금성이 달 속으로 들어가니 적을 쳐부술 순간이 닥쳤노라
적을 쳐부술 때라, 깃발을 짓부수어라!
오랑캐의 창자를 짓밟고 오랑캐가 흘린 피의 강을 건너라!
오랑캐의 잘린 머리를 푸른 하늘 위에 내걸고
오랑캐의 주검을 피비린내 서린 변방에 파묻어라!
오랑캐 땅에 사람 자취 없으니, 한(漢)나라의 도가 창성하도다!


번역해 여기 옮겨놓긴 하지만, 다시 읽어도 참혹하다. 시에도 등급을 먹여야 한다면, 그 폭력성으로 인해 15살 이상 등급을 먹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제노사이드를 고무 찬양 선동하는 이것도 시(詩)인가. 도대체 누가 이렇게 무식한 시를 썼을까.

정답은 이백(李白, 701~762)이다. 당나라 시기는 물론 중국 시사(詩史)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 해도 별로 이견이 없을 이 위대한 시인이 쓴 '오랑캐 땅에 사람이 없다(胡無人)'란 작품의 전문이다.

달나라에 산다는 항아(姮娥)가 누구와 이웃할지 애달파 하고, 홀로 달빛 아래 술 마시며 자기 그림자와 달을 벗 삼았던 그 시인이, 어떻게 오랑캐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선동하는 걸 시라고 쓸 수 있었을까. (여기서 이 시와 이백의 멘탈리티에 대해 상론할 지면은 없다. 위의 시에 나오는 곽표요가 어떤 인물인지를 포함해, 중국 문학에서 '오랑캐 땅에 사람이 없다(胡無人)'란 주제의 맥락, 이백이 이런 끔찍한 시를 쓴 배경, 현대 중국에서 이 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등의 내용이 궁금한 독자는 곧 발간될 월간 <인물과 사상> 10월호에 필자가 쓴 글 '중국 문학 속의 중화주의'를 참조하기 바란다.)

이백의 중화중심주의... '오랑캐 땅에 사람이 없다'

시의 내용이 워낙 살벌하기 때문에 중국인들 가운데서도 이게 과연 이백이 쓴 시가 맞는지 회의가 인다는 주장을 하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백은 이 시 말고도 이와 같은 맥락의 시를 여러 수 남겼기 때문에, 유독 이것만 이백의 작품이 아니라고 부정하긴 어렵다.

이 위대한 시인이 이런 끔찍한 내용을 글로 옮긴 까닭을 다른 데서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그것은 오로지 그의 무의식이 중화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중화중심주의란 중원을 차지하고 있는 화하(華夏) 민족만이 문화 민족이고, 주변 사방의 오랑캐는 문화를 지니지 못한 야만이라는 오만의 이분법을 말한다.

이백의 이 시는 중국 지식인의 머릿속을 수천 년 동안 지배해온 중화중심주의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표본적인 사례다. 이백은 존재하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달나라 사람과 공감을 나눌 줄은 알았어도, 어깨를 맞대고 살아왔던 오랑캐와는 공감을 나누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이것이 중심주의의 무서운 해악이다. 머릿속이 중심주의에 지배당하고 있는 이들은 다른 사람의 얼굴을 사람의 얼굴로 볼 줄 모른다.

모든 겨레는 나름의 중심주의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라는 개체가 본디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중심주의는 반드시 다른 중심주의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인간의 역사가 빚어낸 수많은 대립과 충돌과 참극의 배후에는 중심주의가 놓여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심주의의 해독(害毒)을 해독(解毒)하는 작업은 오늘날 인류가 한걸음 더 성숙하기 위해 풀지 않으면 안 되는 숙제다.

'선교 봉사' 깃발의 의미

한국과 이탈리아의 월드컵 16강전이 열린 지난 2002년 6월 18일 저녁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십자가를 든 한 기독교인이 성경구절을 외치고 있다.
▲ 불신지옥 한국과 이탈리아의 월드컵 16강전이 열린 지난 2002년 6월 18일 저녁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십자가를 든 한 기독교인이 성경구절을 외치고 있다.
ⓒ 이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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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7년 7월19일 아프가니스탄의 반정부 무장세력 탈레반에 납치당했던 한국인 23명 가운데 살해당한 2명과 먼저 석방된 2명 이외에 남은 19명이 풀려나 9월 2일 새벽 한국으로 돌아왔다. 두 분의 희생은 매우 안타깝지만, 더 희생자가 생기지 않은 건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한국 정부가 탈레반에 몸값을 얼마나 지불했느니, 혈세를 얼마나 낭비했느니 하는 논란이 없지 않지만, 생명은 천하보다도 귀한 것이므로 한국 정부가 이들을 구하기 위해 기울인 모든 노력은 다 값지고 잘한 일이다. 살아 돌아온 이들은 평생 치유하기 어려울 만큼 깊은 트라우마를 입었을 것이므로, 우선 정신적 안정과 충분한 요양이 필요하다. 주변의 따뜻한 보살핌도 절실할 것이다.

이들이 납치당했을 때 한국의 언론들은 석방 노력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이들의 '선교 봉사' 활동에 대한 평가나 비판을 자제했다. 이 또한 잘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이들이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 한국 사회는 스물세 명과 그의 친지들이 겪은 이 긴 악몽이 무엇을 뜻하는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 악몽은 한국 사회 안에 있는 자기중심주의가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선교 봉사' 활동이란, 한국인이 기독교의 깃발을 들고 가장 예민한 대립이 벌어지고 있는 이슬람 문화권 한가운데로 들어간 행위를 가리킨다. 그들은 평화 봉사 활동이었다고 주장하겠지만, 아프간의 사람들은 그렇게만 바라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를 이슬람 문화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자 도발로 바라볼 수도 있다.

가령 탈레반의 평화봉사단이 한국의 어느 교회 앞마당에 와서 의료봉사활동을 하겠다면, 한국의 기독교는 과연 그걸 허용할 수 있는 너그러움을 갖추고 있는가? 이슬람의 '선교 봉사단'이 당신들의 예배당 앞에서 '선교의 자유'를 외치며 알라의 말씀을 전한다면, 한국의 기독교는 이를 허용할 수 있겠는가?

이런 최소한의 상호주의를 배우지도 생각해보지도 않은 이들의 무의식은 결국 자신의 믿음과 신념과 가치관을 중심으로 세계를 재단하는 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영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기독교만이 진리이고, 다른 이교도는 개종과 전도의 대상이라고 여기는 태도는 위험한 중심주의이다. 이런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오랑캐 땅에 사람이 없다'고 쓴 이백의 세계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이백의 시에서 중심주의에 사로잡히면 이웃의 얼굴이 사람의 얼굴로 보이지 않을 수 있음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중심주의에 빠진 종교인들은 신의 얼굴이 신의 얼굴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가 믿는 신만이 신인 줄 안다. 그들은 알라와 브라만과 부처와 천지신명 또한 신인 줄을 모른다.

물론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바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더 많은 기독교인들은 뿌리 깊은 중심주의에 빠져있는 것 또한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이 점이 유감스럽다.

한국에서 이슬람종교가 좀더 융성해지기를...

한국은 세계에서 종교의 자유를 가장 잘 실천할 수 있는 축복받은 땅 가운데 한 곳이다. 각국의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지만, 그 사회의 주류 종교가 비주류 종교에 대해 그다지 관용적이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이슬람 문화권은 말할 것도 없고, 서방세계도 크게 나을 건 없다.

미국의 경우 프로테스탄트가 아니면 주류 사회에 끼어들기 어렵고, 성공회의 영국은 가톨릭의 아일랜드와 유혈 종교분쟁을 겪어왔다. 중국은 공산당이 종교의 자유를 억누르고 있고, 일본은 고유 신토 신앙이 강해 다른 종교는 거의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기독교, 천주교, 불교, 유교 등 다양한 종교가 비슷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건 참으로 경이로운 신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는 여러 종교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지혜로운 전통이 있었다. 가령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연개소문이 보장왕에게 도교의 도입을 건의하는 내용이 나온다. 유교, 불교, 도교 등 세 종교가 삼발이처럼 정립해야 하는데, 현재 고구려에는 도교가 미약하니 당나라로부터 도교를 적극 수입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를 두고 연개소문의 정치적 야심과 연결지어 해석하기도 하지만, 종교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발상은 다른 나라에서 잘 찾아보기 어려운 지혜임에 틀림없다.

서울 이태원동에 위치한 이슬람사원
 서울 이태원동에 위치한 이슬람사원
ⓒ 최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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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바람에 한국에서 이슬람교가 좀더 융성해지기를 기원해본다. 한국에서 기독교, 천주교, 불교, 유교 등은 유력한 종교로 자리 잡았지만, 이슬람은 세력이나 영향력이 미미한 편이다. 한국은 앞으로 점점 더 많은 겨레가 어울려 사는 다민족 사회로 갈 가능성이 높다. 이슬람 신앙을 가진 동남아와 서아시아 각국의 겨레들이 한국에 오는 현상은 점점 더 흔한 풍경이 될 것이다. 그 영향으로 한국에서 이슬람교가 지금보다 더 널리 퍼져서, 한국 사회 안에서 기독교, 천주교, 불교, 유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된다면, 한국 사회는 세계에서 더욱 빛나는 축복받은 땅이 될 것이다.

갑자기 뜬금없이 웬 이슬람이냐는 반응을 보일 분들도 계실 것이다. 1960년대 미국에서는 흑인 사회에서 이슬람교가 큰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흑인 헤비급 권투선수 캐시어스 클레이가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슬람적인 이름으로 고친 것도 이 분위기를 반영한 일이다. 백인우월주의가 은연중 바탕에 깔려 있는 기독교에 비해 이슬람교에서는 모든 인종에 대한 평등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가 발생하고 전파된 지역은 서아시아와 아프리카 북부 등지로, 여기에는 흑인종, 황인종, 백인종이 고루 분포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슬람교에는 일찍부터 인종과 겨레에 차별을 두지 않는 바람직한 전통이 있어왔다. 물론 이슬람에도 자기 중심주의적인 이슬람이 있고, 탈레반 같은 원리주의자들도 있다. 나의 바람은 다종교 사회 한국에서 이슬람이 성장하면서 다른 종교들과 공존하기를 배워, 탈중심적인 이슬람의 전통을 세워가는 것이다.

나의 '종교'는 '샤머니즘'

한국은 '단일민족'에 대한 집착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엔조차 단일민족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권고를 한국에 보내기도 했다. 이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건, 한국 사회가 종교적으로 매우 관용적이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건 한국 사회가 잘 발전시켜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나는 그 원인을 한국의 샤머니즘에서 찾는다.

샤머니즘은 유일신에 집착하지 않는다. 당골네의 만신전에는 천지신명에서 잡귀잡신까지 온갖 신이 다 북적댄다. 지고한 유일신만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니다. 관우나 임경업 장군처럼 억울하게 비명횡사한 영웅도 자연스런 숭배의 대상이 된다. 굿을 보면 잡귀잡신조차 잘 놀다 가시도록 배려한다. 여기에 야웨나 알라신이 놀러 오시지 못할 일도 없다(나는 한국 기독교에서 '여호와' 또는 '야훼'라고 적는 신을 '야웨'라고 적는다. 이게 히브리어 원음에 가깝고, 야훼는 영어식 발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어디 서류에 '종교'를 써넣을 기회가 있으면 '샤머니즘'이라고 적어 넣는다. 사람들은 내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나는 진심으로 이렇게 종교적으로 너그러운 한국의 샤머니즘이 좋다. 샤머니즘은 나의 신앙이다. 나의 이런 발언은 결코 야웨와 알라와 부처와 공자와 예수와 브라만과 저 푸른 하늘에 대한 나의 존경심을 조금도 감소시키지 못할 것으로 믿는다. 이런 탈중심의 세계관에서는 "오랑캐 땅에 사람 자취 없으니, 한(漢)나라의 도가 창성하도다!"라고 한 이백의 문학적 테러리즘 같은 게 생겨날 수 없다.

중심주의는 인류의 정신사에서 치유를 기다리는 증후이다. 그 치유를 통해 인류의 정신은 좀더 신의 뜻에 가까운 데로 나아갈 것이다.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에는 오로지 하나의 종교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다양한 많은 가지를 지닌 튼튼한 나무이다." 신은 인간에게 이런 깨달음을 주기 위해 알라와 부처와 야웨와 브라만과 천지신명과 잡귀잡신의 모습으로 많은 겨레들 앞에 나타나셨는지도 모른다.


태그:#중심주의, #종교, #다원주의, #이슬람, #아프간 피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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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가 되려는 이유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글을 쓰고 싶기 때문입니다. 관심 분야는 교육, 문화, 고전, 정치, 통일, 중국, 동아시아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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