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이 없는 팀은 팬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기 어렵다. 베어스는 원년 우승과 박철순의 불사조 투혼이라는 상징을 가졌지만, '뚝심야구'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트윈스(청룡)라는 화려한 팀이 선점하고 있던 서울에서 버텨내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1986년 9월 17일, 잠실. OB 베어스와 롯데 자이언츠가 그 해의 마지막 경기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9회말까지 점수는 자이언츠가 두 점 앞선 3-1. 더그아웃의 베어스 선수들은 어깨가 축 늘어져있었다.

이미 전기리그에서 5위로 미끄러졌던 베어스는, 플레이오프 진출권이 달린 후기리그 2위에 목을 매고 있었다. 그러나 전날까지 반 경기차로 뒤져있던 MBC 청룡이 마지막 경기에서 타이거즈를 꺾은 반면, 베어스는 패전 위기에 몰리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반 경기 차 역전탈락이 확정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철벽' 최동원 무너뜨린 '운명의 한 방'

 호쾌하게 방망이를 휘두르던 김형석 선수.
ⓒ OB 베어스 팬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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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시즌 진출이 진작 물 건너간 자이언츠였지만, 1승만 보태면 '3년 연속 20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을 수 있었던 '대한민국 에이스' 최동원이 그 순간까지 마운드를 지키며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최동원이 대기록을 위해 넘어야 했던 마지막 문턱은 베어스의 2년차 신인, 김형석이었다.

국가대표 출신으로 데뷔 첫해 3할대로 안착했고 그 해에도 2할8푼대로 무난했던 강타자였지만 홈런타자보다는 중거리 포에 가까운 스타일로 홈런은 해마다 7개씩에 불과했기에, 안타 하나로는 뒤집어낼 수 없는 그 순간까지도 긴장은 높지 않았다. 더구나 철벽과도 같았던 최동원이라는 이름 앞에서, 팬들이 예상할 수 있는 반전의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 김형석은 승부의 추를 원점으로 돌리는 두 점짜리 홈런을 때려냈고, 맥이 풀려버린 최동원과 자이언츠는 후속타자 신경식에게 3루타와 결승점이 되는 실책을 헌납하며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순식간에 승부는 4-3으로 뒤집혔고, 동시에 세 팀과 세 투수의 얼굴에서 '희'와 '비'가 뒤집혔다.

우선 플레이오프 진출권의 주인이 MBC청룡에서 OB베어스로 바뀌었고, 최동원의 3년 연속 20승 대기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한 방'의 파편은 투수부문 타이틀로까지 튀어, 그 마지막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했던 베어스의 최일언이 거의 확정적이었던 1패를 덜어냄에 따라 간신히 승률왕에 올라섰고, 진작 다승과 평균자책점 부문 타이틀을 확정해놓은 채 승률에서도 최일언을 앞지르는 듯했던 선동열은 마지막 순간 자신의 첫 번째 트리플크라운 달성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날 김형석의 홈런을 사람들은 한동안 '운명의 한 방'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베어스의 '뚝심'을 이야기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도전, 그리고 마지막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기적의 대역전극의 매력 말이다.

OB 뚝심 야구의 상징, 김형석

 김형석 선수와 그의 사인.
ⓒ OB 베어스 팬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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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 시절부터 국가대표팀을 개근하던 김형석은 1985년 1차 지명 1순위로 지명되었고, 첫 해 곧장 3할대 타율과 5할대 장타율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타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가치는 '강함'보다도 '꾸준함', 즉 뚝심이었다.

1990년부터 93년까지 네 시즌 동안, 그는 단 한 경기도 거르지 않고 팀의 중심타자로서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94년 8월 18일 잠실, 그는 607번째 경기인 트윈스 전에 선발출장하면서 청룡의 원년 2루수 김인식이 기록했던 606경기를 넘어서는 새로운 연속경기출장기록을 만들어냈다.

국내에 단 여덟 개의 팀, 그리고 팀마다 단 한 개씩의 자리. 그래서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수많은 야구꿈나무들과의 경쟁을 딛고 올라서, 다시 한 순간 한 순간 끝없는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 프로야구의 1군 무대다. 따라서 1군 무대에 서있는 모든 선수들은 그 순간 격한 도전을 물리치고 우뚝 선 한 명의 챔피언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몇 해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그의 천부적인 자질에 더해 엄청난 성실성과 피눈물 배인 자기관리,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절제된 삶과 때로는 작지 않는 난관을 정면으로 돌파해가는 투지와 오기를 입증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간신히 연속경기 출장기록을 이어가기만 했던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무릎 부상으로 이탈했던 88년을 제외하면, 93년까지 데뷔 이후 8시즌동안 단 한 번도 타율이 2할8푼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고, 홈런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해마다 60~70개의 타점을 만들어냈으며 87년에는 최다승리 타점 타이틀을 차지했을 정도로 '결정적인 순간'에 제 몫을 해내는 단단한 활약을 과시했다.

그리고 특히 기록이 만들어졌던 다섯 시즌(1990년~1993년)은 평균 2할9푼의 타율과 10개 이상의 홈런, 그 사이 한 번의 최다안타 타이틀이 기록된 그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베어스의 역사 속에 깊게 패여 있는 집단이탈파문의 상처가 그에게도 뼈아픈 한 고비로 남고 말았다.

초유의 집단 이탈 사건, '암초에 걸리다'

국내 프로야구선수출신 감독 1호였던 윤동균 감독은 취임 첫 해였던 93년을 기대 이상의 지도력으로 통과했지만, 2년차에 넘치는 의욕을 다스리지 못한 탓에 지도자 인생을 그르치고 말았다.

94년 9월 4일, 쌍방울과의 군산 원정경기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지자 윤동균 감독은 숙소에서 "오늘은 매를 들어야겠다"고 했고, 선수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섰다.

항명에 흥분한 윤감독이 "감독 말을 듣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서울로 올라가버리라"고 하자마자 흥분한 선수들 17명이 실제로 서울로 올라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프로야구 초유의 선수단 집단이탈사건이었다.

베어스의 잔여경기 몰수패까지 몰려갈 뻔 했던 사태는 결국 윤 감독의 자진하차와 선수단에 대한 대대적인 징계로 마무리되었지만, 여전히 우리 야구사 최대의 비극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당시 김형석은 10년차의 고참이자 팀의 중심선수로서 박철순·장호연·김상호, 그리고 하필 그날 2군에서 1군으로 올라왔던 비운의 강영수와 더불어 선수들의 대표격으로 나서야했고, 감봉과 더불어 경기출장정지처분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집단이탈사태의 발단이 되었던 9월 4일의 경기가 김형석의 연속출장기록행진의 종지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경기는 그의 622번째 경기였다.

 박철순 선수(왼쪽)와 김형석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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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경기에 나서기만 하면 이어지는 것이 연속 출장 기록이다 보니, 기록 자체가 가치를 가지는 순간부터는 누구도 쉽게 손을 대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때로는 대타나 대수비 출장으로 기록을 이어나가며 정상적인 궤도로 올라서기를 기다려주는 감독의 배려 또한 비난하기 어려운 일이며, 굳이 기록의 '순도'를 따지는 것이 야박한 분야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전 시즌에도 최다안타왕(147개)에 올랐던 데다가, 기록행진이 끝난 뒤로도 3년가량 거의 전 경기에 기용되었던 그의 연속경기출장기록 중단은 여러모로 안타까움을 남겼다.

그 해를 넘기고 다시 95년에도 여전히 그는 팀의 중심이었고, 끝나버린 기록행진과는 상관없이 매일 경기장을 지키는 것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특별한 부상 없이도 그의 야구 실력은 조금씩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2할8푼을 바닥으로 알던 그의 타율도 2할7푼대, 4푼대, 3푼대로 해마다 가라앉았고 기가 막혔던 번트수비도 조금씩 무디고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름이면 간혹 체력이 달리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뭔가, 조금씩 지친 듯한 기색이 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만약 그렇게 허무하게 그의 기록행진이 막을 내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한 천 경기쯤 넘어서며 홀가분하게 다음 고지를 향할 수 있었다면 그의 뚝심이 조금 더 이어지지 않았을지. 김형석은 98년 입단한 '흑곰' 우즈에게 1루수 자리를 내주고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되었다가, 27번의 타석에서 단 두 개의 안타만을 기록한 채 급히 무대 뒤로 달려가듯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베어스의 정신적 밑거름, 김형석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야구실력도 기술과 체력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말하기 어려운 최정상급의 선수들이 부딪히는 프로야구무대에서라면, 승패의 갈림은 오히려 그것에 앞서 의지력과 투지에서 나오곤 한다. 해도 안 될 것 같은 절망감에 맞서, '언젠가 열리리라'는 의지를 버리지 않을 수 있는 자가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록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하면 되더라'는 전례를 가진 이들이 누릴 수 있는 여유. 그리고 그런 여유를 가지고 마지막까지 노려보며 기를 실어주는 팬들을 가진 행복. 그것이 바로 베어스가 가진 최고의 무기이고 자산이다.

김형석. 박철순이라는 간판 뒤에서 은근한 힘을 실어주는, 베어스의 기름진 정신적 밑거름에 바로 그가 있다.

덧붙이는 글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음식을 매개로 주위 사람들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우장춘, 씨앗의 힘 씨앗의 희망>(봄나무)을 펴냈고, CBS라디오와 <오마이뉴스>를 통해 연재중인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 있다>(뿌리와이파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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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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