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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숭아꽃 핀 산골이 무릉도원이다.
ⓒ 최성수

아무리 바빠도 봄은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이미 산 너머 인간의 땅에는 꽃 지고 이른 더위 찾아왔다지만, 이곳 강원도 깊은 산골은 이제야 봄입니다.

추위는 오래 머물고, 더위는 쉬 물러가는 고산지대라 봄도 더디 오는가 봅니다. 오는 봄은 더디 올 뿐 아니라 한꺼번에 옵니다. 진달래가 피자 질세라 개나리가 얼굴을 듭니다. 산벚나무도 다투어 제 몸을 여는데, 조금 늦은 걸음으로 산철쭉이 달려옵니다. 생의 어느 하루, 이렇게 환한 날도 있다고 꽃들은 쉴 새 없이 소곤대며 피어납니다.

▲ 고사리 돋는 봄
ⓒ 최성수

▲ 산철쭉 은은한 색깔로 봄 깊다
ⓒ 최성수

가장 늦게 헐떡이며 봄맞이를 하는 복숭아꽃이 이제야 골짜기를 가득 채웁니다. 때맞춰 도화수(桃花水) 내려 세상천지 눈부신 신록으로 채웁니다. 낙엽송 새순이 가슴 한 구석을 턱 막히게 하는데, 저렇게 복숭아꽃은 골짜기 가득 색정(色情)을 피워 올립니다.

복숭아꽃 피면 강원도 산골은 온통 눈 둘 데 없는 분홍 천지입니다. 어린 날, 할머니는 이웃집에 음식을 나눌 때면 늘 음식을 덮은 보자기 위에 복숭아 잎을 하나 따 올렸습니다. 귀신이 음식에 범접하지 말라는 주술이었지요.

▲ 큰구슬봉이가 양지쪽에 모여 있다
ⓒ 최성수

저 가슴 저미게 화려한 복숭아 꽃빛 때문에, 복숭아는 하늘의 과일이었습니다. <서유기>의 손오공이 천상의 과수원에서 훔쳐 먹은 것이 복숭아였고, 우리네 설화 <도화녀와 비형랑>에도 귀신같은 재주를 지닌 비형랑을 낳은 어머니 이름이 복숭아꽃 여자였습니다.

골짜기 하나를 온통 뒤덮는 복숭아꽃 세상을 보기 위해 임간도로를 오릅니다. 첩첩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의 산길에서 영월군의 황둔으로 가는 곳은 인적 하나 없습니다.

애기똥풀과 양지꽃이 나란히 봄볕을 다투는 산길을 허위허위 오르면, 어느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분홍 천지. 푸른 새잎 사이로 갑자기 펼쳐지는 복숭아 과수원은 이승의 땅 같지 않습니다.

▲ 저 숨 막히게 고운 봄 빛, 복숭아꽃
ⓒ 최성수

나이 지긋한 부부가 힘들여 일군 지상의 또 다른 세상이 거기 펼쳐져 있습니다. 휘돌아 감기는 서너 골짜기를 도는 내내, 복숭아꽃은 마음을 막아섭니다. 꽃 천지 너머 우뚝 솟은 치악산 자락에 연초록 새순이 눈부신데, 복숭아꽃 분홍색과 초록 세상의 숨막히는 대조가 거기 자리잡고 있습니다.

과수원 입구, 주인 부부는 쇠줄을 막아놓고 밭일을 갔는지, 복숭아꽃만 저 혼자 피어 봄 하루를 열고 있습니다. 꽃잎 후두둑 날리는 한 귀퉁이에는 온통 민들레의 나라입니다. 산의 초록과 복숭아꽃의 분홍, 민들레의 노란색은 그대로 봄의 삼원색을 이룹니다.

도연명의 <도화원기>는 복숭아꽃잎 떨어져 흐르는 물길을 따라 이상향을 찾아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백은 <산중문답>에서 별천지, 인간세상 밖의 또 다른 세상을 '흐르는 물 위에 복숭아꽃 아득히 흘러가는 곳(桃花流水杳然去)'이라고 했습니다. 안견은 그림 <몽유도원도>에서 복숭아꽃 핀 꿈같은 세상을 눈앞에 그려내기도 했습니다.

▲ 어느 여인의 볼빛 같이 발그레한 복숭아. 그 뒤로는 새순 돋는 숲
ⓒ 최성수

복숭아꽃 천지인 곳은 인간 밖의 또 다른 세상임을, 옛 사람들은 그렇게 문장으로, 시로,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곳 복숭아 과수원도 그런 무릉도원 같은 곳이 아닐까요? 아니, 봄꽃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는 강원도 산골짜기의 지금이 바로 무릉도원, 세상 밖의 세상일지 모릅니다. 한 여름으로 달려가는 세상에서, 한 발 늦게 봄 천지가 차려지고 있는 곳이 여기니까요.

아, 우리네 이상향은 그런 곳인지도 모릅니다. 앞서 가는 곳, 달려가는 곳이 아니라 더 늦게, 더 천천히 오는 세상 말입니다.

▲ 복숭아꽃 피는 봄날은 마음도 바람에 흔들린다.
ⓒ 최성수

▲ 저 꽃 천지, 꽃들의 세상
ⓒ 최성수

오월, 싱그러운 바람이 분홍빛 복숭아 꽃잎을 간질이는 강원도 산골은 이제야 봄 세상입니다. 그 봄 세상이 눈부시게 환하면서도 한 편으로 아득한 것은 이 풍경이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훌훌 꽃잎이 져버리고 나면 세상에 복숭아 빛 숨 막히는 풍경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던 무릉도원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인 것처럼, 그리고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곳, 단지 우리네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처럼, 저 복사꽃 눈부신 풍경도 단지 우리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될 테지요.

▲ 민들레와 복숭아가 어울려 피어나는 과수원. 봄 빛이 저런 색일까?
ⓒ 최성수

▲ 저 꽃그늘에서 꿈 없는 잠을 자고 싶다.
ⓒ 최성수

그 기억의 한 갈피를 조금이라도 더 붙잡기 위해, 내 발길은 오래도록 또 다른 무릉의 땅, 복숭아 과수원 길에 머물고 있습니다. 아, 덧없이 봄빛은 타오르는 절정에서 스러지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비롯한 저의 더 많은 글과 사진은 제가 운영하는 카페 http://cafe.naver.com/borisogol.cafe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복숭아꽃, #보리소골, #큰구슬봉이, #도연명, #이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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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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