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일군 '기적의 영화'

▲ 영화 <면로>의 한 장면
ⓒ 에릭 쿠
에릭 쿠의 영화는 하나의 기적이며 싱가포르 영화의 혁명이다. 서울시 보다 조금 더 큰 싱가포르라는 도시국가에서는 '싱가포르 영화'는 예술도 아니었으며 TV에 밀려 대중문화로도 향유되지 못하였다.

한해 제작되는 자국 영화가 4~5편 정도였으니 한국의 영화문화와 산업에 견주어 보았을 때 영화 소국이었음이 확실하다. 그런 시기인 1995년 에릭 쿠는 <면로>라는 작품을 발표하였고 그 작품이 해외 영화제에서 호평을 얻으면서 싱가포르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에릭 쿠 감독은 이후 <면로>의 지지도를 업고 본격적으로 자국 영화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그는 스스로 계획안을 제출해 '싱가포르 영화진흥위원회'를 설립하고 그해 만들어지는 단편영화들에 대한 지원 및 신인 감독 발굴에 전력하게 된다. 에릭 쿠는 자신의 작품을 만들면서 동시에 싱가포르 영화의 르네상스의 장을 열었던 것이다.

허우샤오시엔은 대만 영화 안에서 동북아시아를 고민하면서 자국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왕가위는 홍콩의 반대편을 바라보면서 세계를 두루 보았으며 중국의 지아장커는 중국 변두리에서 시작하여 북경으로 건너와 이미지와 자본으로 충만한 동시대를 고민하였다.

동북아시아에서 동시대의 시네아스트들이 세계를 바라보거나 혹은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고민할 때 에릭 쿠 역시 싱가포르에서 혼재된 역사를 가진 동남아시아의 식민 역사와 인종문제, 또한 자국의 하위문화와 휴머니즘에 대한 탐구를 진행하였다. 결국 영화를 보는 것이란 동시대의 고민거리를 함께 생각하는 것이며 그것을 머리로 이해하며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영화들은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릭 쿠의 영화는 우선 싱가포르라는 작지만 복잡하고 혼합된 정치와 역사를 가진 자국의 실상을 담고 있다. 네덜란드와 일본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작은 국가의 현실상은 복잡하기만 하다. 싱가포르는 70%가 넘는 중국계와 말레이계, 인도계의 혼합및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지만 여러 언어와 방언이 뒤섞여 소통이 단절되어있는 사회이다.

▲ 영화 <12층>의 한 장면
ⓒ 에릭 쿠
<12층>은 이런 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면을 담고 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갈등들이 혼재되어 있다. 중국에서 건너온 여자는 남편의 추한 외모와 가난을 비꼬면서 갈등을 빚는다. 뚱뚱한 여자 산산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자신의 어머니에게도 매일 구박을 받는다.

한편 아파트 앞 술집에서 주민들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는, 중국에서 건너온 자들에 대한 경계, 백인우월주의에 대한 경멸과 동경, 흑인에 대한 인종적 차별, 소수민족에 대한 차이의 문화를 엿 들을 수 있다. 싱가포르는 잃어버린 역사만큼이나 강제된 역사가 첨가되었기에 그 갈등은 상상을 넘어선다.

에릭 쿠가 주목한 것은 신구 세대간의 갈등이었다. <12층>에서 동생들을 윤리적이며 도덕적으로 키우려는 청년은 여동생의 쾌락주의적 삶을 경계하며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하지만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때 남자는 권위주의적인 싱가포르의 법과 정부를 상징하듯 보수적으로 행동한다. 오빠와 동생의 갈등은 서로 다른 시대와 역사를 살아온 부모와 자식세대간의 단절을 보여주듯 전개된다. 에릭 쿠는 대담에서 "젊은 세대들이 부모와 소통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며 이 영화를 설명했다.

장편 데뷔작인 <면로>에서는 부모를 여의고 홀로 살아가는 국수집 주인인 면로와 매춘부인 버니의 운명적 사랑을 다루면서 하층민들의 삶을 이야기 한다. 버니의 영국 남자친구를 통해서 식민지 국가였던 영국을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동경하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내 곁에 있어줘>에서는 계급차를 통한 하층민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두 소녀를 통하여 쇼핑, 핸드폰, 인터넷등을 이용하여 동시대의 대중문화의 전면을 이야기한다.

에릭 쿠가 바라보는 싱가포르는 소통이 되지 않는 사회다. 그의 영화 속에서도 중국어와 영어가 난무하고 같은 중국어라도 서로 다른 지역차로 인해 여러 방언들이 뒤섞여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도 좀처럼 연결이 되지 않거나 죽은자가 산자를 연민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짝사랑이 존재할 뿐이다. 한 쪽은 소음으로 시끄럽지만 다른 쪽에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상반된 세상이 한 공간에서 나타나는 혼재된 역사와 시간이 싱가포르라고 에릭 쿠는 말하고 있다.

식탁과 쇼윈도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 그리고 희망

▲ 영화 <내 곁에 있어줘>포스터
ⓒ 에릭 쿠
3편의 장편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싱가포르의 식문화며 그것을 통하여 싱가포르의 현재를 조망한다. <면로>의 초반 장면은 음식과 여성의 나체가 몽타주화 되어있으며 주인공 면로와 버니를 이어주는 것은 면로가 만드는 국수다. 면로는 죽은 아버지를 위해 매일 아침밥을 차려준다. 또한 버니가 죽었을 때도 살아 있을 때처럼 국수를 만들어준다. <12층>에서는 혼자 남은 남자가 아내를 기다리면서 게걸스럽지만 연민이 느껴질 정도로 처량하게 혼자 식사하며, 아파트 앞 술자리에서는 술을 마시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한다.

<내 곁에 있어줘>에서는 아내를 잃은 남자가 더 이상 아내를 위해서 요리할 일이 없자 그 허전함과 아내 잃은 슬픔에 괴로워하며 후에 테레사를 만나기 전까지 줄곧 그녀를 위해서 요리를 한다. 또한 뚱보 남자는 줄곧 혼자서 식당을 전전하면서 음식을 먹어대며 그 식탐을 절제하지 못한다.

에리 쿠의 식탁에서는 혼자임을 더 절실히 느끼게 만든다. 함께하는 식탁이 아닌 혼자인 식탁을 강조하면서 그 빈 공간의 쓸쓸함을 보여준다. 모든 이들은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식탁에 앉고 혹은 누군가를 위해서 요리를 하지만 언제나 고독과 함께 식사를 해야된다. 인물들은 언제나 식사를 하고 있지만 그 자리에 자신의 '수호천사'가 나타나는 경우는 드물다. 이처럼 파편화된 사회를 에릭 쿠는 식탁을 통하여 비춘다.

에릭 쿠의 고민은 세상이 쇼윈도처럼 진열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욕망과 멸시의 상반된 시각으로 바라본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랑 혹은 인간관계에서 단절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 곁에 있어줘>에서 한 경비원이 부르주아 여성을 사랑하면서 그녀가 쇼핑하는 모습이나 애인과 데이트 하는 모습을 쇼윈도 너머로 지켜보는 것은 세상은 차이와 구별로 경계선을 긋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듯하다.

@BRI@그렇게 에릭 쿠의 사랑은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간절하지만 결국 짝사랑일 수밖에 없었다. <면로>에서 사랑을 얻어가지만 끝내 시체 애호증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비극, <12층>에서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세상에 혼자되었다고 느끼는 뚱뚱한 여자의 고립감, 돈과 꿈을 찾아 본토를 떠나온 여자의 고독함, 동생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한 남자의 절규. <내 곁에 있어줘>역시 아내를 잃은 남편, 소녀를 짝사랑한 소녀, 한 여자를 짝사랑하는 소심한 뚱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노인의 이야기는 세상으로부터 닫혀진 눈과 귀, 마음을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쇼윈도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 경계선 너머에서 갈망하고 사랑하고 그리고 끝내 그 슬픔에 눈물을 흘려야 했다.

하지만 에릭 쿠는 그 간절함에 몸서리치면서 누군가가 절망의 끝에서 죽어갈 때, 그것을 비관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안에서 희망을 그린다. 그래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서 돌아오고 혹은 죽은 자의 빈 자리를 보면서 슬퍼하다가도 생의 줄을 놓치지 않는다.

영화 곳곳에서 등장하는 유령들은 살아남은 자들을 과거의 무게로 괴롭힌다. 하지만 에릭 쿠는 그 유령들을 상처와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으로 그리며 그들을 '수호천사;로 지위 상승시킨다. <12층>에서 자살한 남자가 뚱뚱한 여자를 줄곧 지켜보면서 그녀의 삶을 보고 들으면서 그녀를 이해한다.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며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지만 마지막 순간 자살하려는 여자를 남자가 껴안으면서 그래도 살아남아야 한다며 다독인다. <내 곁에 있어줘>에서도 홀로된 남자와 테레사가 서로의 손을 쓰다듬고 포옹으로 체온을 느낄 때 그들은 과거의 짐을 벗어던지고 다시 생의 희망을 되찾는다.

에릭 쿠는 이렇게 단절된 세상을 잇기 위해서 몸부림친다. 서로의 손을 만지거나 혹은 영혼의 짝을 찾아가는 그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영화라는 창을 통하여 세상은 고독하지만 누구에게나 인생의 동반자가 있으며 그로인해 아름다워 질 수 있다고 말한다.
2006-12-25 15:30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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