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장에서 자신의 영화를 소개하는 이상우 감독.
ⓒ 김은환

"이 영화가 노근리 학살사건을 소재로 하니까 반미에 쉽게 주목하는데 그건 내 의도가 아니다. 또 전쟁을 통해서 평화를 수호하고 어쩌고 하는 거… 그거 다 사기라고 본다. 전쟁의 본질은 학살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여성과 아이들처럼 약한 사람들이 입어 쓰러진다."

1980년 <장산곶매>를 시작으로 1986년과 1993년 <칠수와 만수>, <늙은 도둑 이야기>, 그리고 1996년 <비언소>….

이제는 거의 연극 연출의 전설이 돼가고 있는 이상우 감독이 25일 전북 순창의 세트장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에서 하루 분의 영화 촬영을 마치고 마이크를 붙잡았다. <작은 연못> 시나리오를 만든 뒤 찍어줄 감독과 이야기하다 이건 내가 찍어야 되겠다 싶어 고민 끝에 메가폰을 직접 잡았다.

지난 8월 12일 크랭크인했던 <작은 연못>은 몇몇 보충 촬영분을 제외하곤 거의 마무리가 된 상태.

400여명 중 살아남은 이는 스물다섯 남짓

 수야엄마 마지막 장면. 감독이 보는 앞에서 리허설.
ⓒ 김은환

한국전쟁 발발 한 달 뒤, 1950년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미군이 충북 노근리 쌍굴다리를 건너는 주곡리 피난민 대열에 공중폭격과 기관총 사격을 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무기를 숨긴 간첩과 피난민의 구분이 불가능하므로 살아있는 사람들이 전선을 넘지 못하게 하라는 미군상부의 지시 때문이었다. 옆 동네로 안전하게 피난시켜 주겠다며 양민을 모은 미군은 주민 통제를 빌미로 철길을 따라 내려가는 양민들에게 총질을 가하기 시작했고, 폭격과 기총소사까지 해댔다.

미군은 살아남은 사람들을 철도 아래 쌍굴다리로 밀어 넣었다. 어린아이, 노인, 임산부, 아낙네 포함 대략 400~500명의 사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굴을 가득 메웠고, 미군은 그곳에 다시 무차별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한여름 더위로 찜통 같았던 굴이 시체와 피로 뒤범벅이 됐다. 사격이 뜸해진 틈을 타 밖으로 나간 이들 모두 역시 사살됐다. 호미와 낫 같은 농기구마저 압수당한 피난민들은 무방비 상태에서 3일에 걸쳐 죽임을 당해야 했다.

수백 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고작 스물다섯 남짓. 이후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피해보상은 고사하고 문제제기조차 할 수 없었다. 미군에 의한 학살이라고 말할 경우 '빨갱이'로 몰릴 수밖에 없었던 지난 세월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을 안으로만 삭여왔다. 사건 발발 56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국은 물론 한국정부 역시 노근리 사건의 피해 보상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결국 1994년 유족 중 정은용씨가 노근리 사건을 소설로 옮긴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펴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1999년 AP통신의 최상훈 기자와 함께 한 미국 기자들의 보도로 마침내 세계적으로 진실이 알려졌다. 그들의 취재는 2000년 퓰리처상 수상작 <노근리 다리 THE BRIDGE AT NOGUNRI>(최상훈, 찰스 헨리, 마사 멘도자 지음)라는 책열매로 나왔다.

<작은 연못>은 한국전쟁 당시 무고하게 죽어간 끔찍한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발발 56년 만에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리는 첫 영화이어서 사회 각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배우들의 '현물투자'로 일군 제작비 10억의 기적

 촬영장의 쟁쟁한 얼굴들. 오른쪽부터 문성근, 전혜진(뒤돌아선 사람), 강신일, 김뢰하, 김승욱.
ⓒ 김은환

이상우 감독은 자신의 시나리오를 토대로 이후 연출자를 찾았지만 일이 잘 진전되지 않았다. 한두 명이 아닌 마을 주민 전체가 주인공인 시나리오 때문에 접촉한 감독들은 그런 영화는 만들 수 없다고 손들어 버렸다.

MK픽쳐스 이은 대표와 이우정 PD는 몇 차례에 걸쳐 직접 연출을 하라고 이상우 감독을 설득했고, 결국 시나리오를 쓴 이상우 감독이 작품 연출까지 맡게 됐다. 투자형태나 제작형태 모두 일반 영화와는 달라야 했다.

소재가 민감한 데다 50명이 넘는 피난민 캐릭터가 모두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특이한 설정도 문제였다. 이에 노근리프로덕션이라는 제작사가 따로 설립됐다. 배우는 극단 연우와 차이무에서 이상우 감독과 동고동락했던 배우들이 '헐값'으로 섭외됐다.

스태프들 역시 영화계의 내로라하는 기술진들이 품앗이하듯 손발 걷어 붙이고 나섰다. 조명, 촬영, 미술뿐 아니라 특히, 이번 영화와 무관한 가수 김민기는 이상우 감독과 오랜 지기로 "다 써라, 마음대로"라며 자신의 음악 모두를 영화에 쓸 수 있게 해줬다. '노근리전쟁'이었던 가제는 이상우 감독이 요즘도 들으며 눈시울 적신다는 김민기의 애절한 노래 <작은 연못>으로 새로이 제목을 얻게 되었다.

이상우 감독은 제목과 관련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의 100분 짜리 뮤직비디오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임했다"고 말한다. 사실상 50억원의 제작비가 소요됐어야 할 규모의 <작은 연못>은 이렇듯 많은 이들의 '현물투자'로 인해 10억원으로 제작이 가능한 기적이 일어났다.

출연 배우 모두가 영화와 삶의 주인공

 기자회견을 끝내고 기념사진 촬영.
ⓒ 김은환

이상우 감독과 벌써 21년째 알고 지내는 문성근씨는 선뜻 "불안하다"고 말한다. "그냥 의리로 들어왔는데 전혀 생각지 못했던 대박이 날 조짐이라서 불안"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영화에서도 이런 경우가 없었지만 감독이 모두가 주인공이라니 따라갈 밖에…. 문씨뿐 아니라 이상우 감독에게 소위 '강제징집' 당한 배우들은 기꺼이 뿌듯한 마음으로 촬영에 임하고 있다.

이상우 감독의 건강을 염려해 현장 연출을 말렸다는 문성근씨는 유일하게 영화에서 양복을 입고 등장하는 부유한 지주 출신 문씨로 등장한다. 여기에 상당한 무게의 배우들이 곶감처럼 줄줄이 엮여있다.

극중 마을 민씨 어른으로 분한 민정기 화백(그는 이상우 감독이 대학에서 연극하던 시절부터 알고 지낸 선배다). 어머니와 아들 경민이(영화포스터를 장식하며 울고 있는 아이)까지 모두 피난민으로 등장, 삼대가 한 영화에 출연하는 뜻깊은 경험을 한 극단 차이무 대표 민복기.

얼마 전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도 가지 못한 채 곧바로 촬영장에 내려와 자신은 영화 속 개비아빠로 거듭나고 촬영장에 놀러온 부인이자 연극배우 박윤경까지 피난민으로 가세하게 만든 김뢰하.

출연 배우들 모두 주인공이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포커스를 받아던 짱이 어미 전혜진, 연우무대에서 <칠수와 만수>를 하며 이상우 감독과 인연을 쌓은 강신일, "소풍 오는 기분으로 오라"는 이상우 감독의 말에 속은 또 한 명의 피해자, 차이무 단원 이대연 역시 무대에서 만나 딸과 함께 출연한 김요한 등 쟁쟁한 배우들이 무더기로 출연한다.

따라서 이 영화의 연기 부분은 한국영화사상 으뜸이 될 전망이다. 이 감독은 연출 조감독도 제대로 쓰지 않은 채, 현장을 누볐다. 따로 쓸 필요도 없어 보였다.

내년 6월 개봉 예정... 휴머니티 부활 강조

마지막, 수야를 비롯한 동네 아이들이 떠돌이 생활을 하다 마을로 살아서 돌아오는 부분. 배우들은 마치 무대 뒤인 것처럼 카메라 앵글 밖에서 집단적으로 수군거리며 농담으로 촬영의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

조금 전 이 감독이 수야 엄마와 수야의 상봉 이후 마을 사람들이 놀라며 다가오는 시간을 2~3초로 정하고 별다른 연기지도 없이 "지금 좋으니까 그대로 한 번 더"를 외치며 모니터 앞으로 사라졌다.

개비아비 역의 김뢰하가 감독의 의도를 분석하며 독백을 내 놓는다. "그냥 2초 뒤에 기계적으로 하나씩 나타나면 좀 그렇지 않아?" 그러자 자야아비 김승욱이 자신의 분석을 내놓는다. "그 2초 말고 느낌의 2초 말야". 그리고 문씨네 문성근이 정리한다. "그냥 튀지 말고 해. 튀면 오래 못 가."

극악한 전쟁의 현실 속에서도 오순도순 사는 재미를 말하고, 아이들이 돌아오는 휴머니티의 부활을 통해 역사 속 진정한 회복의 의미를 찾자는 이상우 감독. 그리고 모두가 주인공이자 가족이 된 이 영화 <작은 연못>은 보충 촬영 이후 CG(컴퓨터그래픽), 사운드, 음악 등 후반작업을 끝낸 뒤, 한국전쟁을 되돌아보는 시점인 내년 6월 개봉할 예정이다.

 영화 제작시 사용했던 슬레이터.
ⓒ 김은환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시흥자치신문(http://sihung.newsk.com)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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