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을 환각의 세계로 인도하는 아름다운 에세이, 특히 이 여리고 깨질 듯한 여인이 우리 가슴 속에 오래도록 기억되기 바란다."

▲ 도빌영화제에서 <여자, 정혜>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이윤기 감독.
ⓒ 박영신
지난달 열린 제 55회 베를린영화제 개봉작 <맨 투 맨(2005)>의 감독, 그리고 올해 제 7회 도빌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은 레지스 바르니에의 입에서 '여리고 깨질 듯한 여인'이라는 말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관객의 환호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우리는 그 '여인'이 누군지 잘 안다. 그 '여인'은 한국의 신예 이윤기 감독의 카메라를 빌어 도빌을 애태운 바로 <여자, 정혜(2004)>다.

지난 13일, 5일간의 여정 끝에 폐막된 도빌아시아영화제에서 이윤기 감독이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기대는 했지만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다.

일본 감독 아오야마 신지가 있었고 중국의 지아장커가 있었다. 작품성 여부를 떠나 이미 국제적 스타 혹은 거장의 길로 들어선 두 사람과 함께 인도, 대만, 태국 등에서 찾아온 9편의 영화가 황금연꽃상을 다툰 올해 경쟁부문의 문턱은 그래서 유난히 높아 보였다. 9편의 경쟁작 중 3편이 또 일본 영화였다.

영화제가 진행되는 동안 심사위원뿐만 아니라 기자, 관객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이끌어낸 영화 <여자, 정혜>는 이미 지난해 10월, 제 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커런츠 상과 지난달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넷팩상을 수상한 화려한 경력이 있어 이번 도빌에서는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것 같았다. 이미 다른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영화에 상 하나를 더 보태주는 것은 도빌로서도 사실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빌은 그 '여자' 정혜를 외면하지 않았다.

도빌의 이웃에 있는 쌍둥이 도시, 트루빌의 한 레스토랑에서 이윤기 감독을 만났다. 지난 10일 국내 개봉된 감독의 영화 <여자, 정혜>가 관객들로부터 혹평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이 감독은 다소 의기소침해 보이기도 했으나 유쾌하게 웃거나 간간히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이 감독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요약 소개한다.

"이 상은 내가 또 다른 영화를 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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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 축하한다. 간단한 소감 한 마디 한다면?
"기대 못했다. 나는 허황된 꿈은 꾸지 않는 편이라 수상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베를린에서는 시상식 전날 통보를 받았지만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베를린에 간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고 막상 상을 받았을 때는 속으로 너무 기뻤다.

영화 자체를 기대 없이 만들었기 때문에 여기 프랑스에 와 있는 것 자체도 내게는 상이다. 내가 황금종려상을 바라고 영화를 할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아마 그럴 것이다. 또 다시 상을 받게 돼서 사실 벅차다. 이 상은 내가 또 다른 영화를 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 감독은 매번 수상 소감을 말할 때마다 '어머니께 감사드린다'고 말한다. 부산에서도 그랬고 이번 도빌에서도 그랬는데.
"베를린에서도 어머니 이야기를 했다. 내가 영화를 하는데 어머니의 뒷받침이 컸다. 어머니에게 어쩌면 나는 한심한 아들인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내게 많은 힘이 됐다. 때문에 영화 <여자, 정혜>에도 원작에는 없었던 어머니의 이미지를 많이 넣었다. 편집 과정에서 잘랐지만 평소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을 영화에 삽입했었다. 영화에서 정혜의 엄마가 죽기 전 '내가 좋은 엄마였니? 그러면 됐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편집과정에서 뺐다. 정혜의 어머니는 정혜가 내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묻지 않는다. 내 어머니처럼."

- 해외영화제에 초대를 많이 받고 있는데 해외에서 수상하는 것이 국내에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렇게 생각 안 한다. 해외에서 많은 애정을 보여주는 것이 내게 힘을 주는 것이 사실이나 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유럽 관객들도 있다."

"<여자, 정혜>는 ‘마초의 감성으로 본 영화’가 아니다“

▲ <여자, 정혜> 포스터.
- 지난 10일 <여자, 정혜>가 마침내 국내 개봉을 했다. 반응이 어떤가.
"한국에서 현재 내 영화가 관객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고 한다. 내 영화가 왜 공격의 대상이 되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내 영화는 그렇게 공격받을 만한 영화가 아니다. '이런 영화가 있다' '좀 다르다' 이 정도에서 끝나야 되는 영화다."

- 오히려 좋은 현상 아닌가? 반대파가 있다는 건 그만큼 감독의 영화가 관객의 관심거리라는 증거로 보인다.
"내 영화는 국내 23개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큰 규모가 아니다. 나는 내 영화가 이슈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는 그냥 영화일 뿐이다."

- 평단의 반응은 좋지 않나?
"몇몇 기자들은 내 영화를 싫어한다. 한 잡지의 경우, 읽어 보지는 않았는데, (내 영화가)'마초 영화다' '마초의 감성으로 본 여자에 관한 영화다' '여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만든 영화다' 심지어는 여자 주인공이 '눈썹이 너무 길어서 싫다'라고도 했다고 한다. 많이 놀랐다. 비판이 논리적이라면 나도 들을 준비가 돼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분위기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는 거다. 그런 비평을 접하다 보면 이 사람들이 정말 내 영화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건가라는 의문이 생길 정도다. 내 영화도 나도 힘이 없다. 밟으면 죽는 거다."

- 지금 다시 찍는다면 다르게 찍어 보겠다든지 등 <여자, 정혜>에서 아쉬운 점은 없나?
"모든 장면, 모든 쇼트가 아쉽다. 그러나 영화에서 엄마가 정혜의 발톱을 깎아주는 장면에 대해서는 후회 없다. 마지막 장면도 맘에 든다. 정혜가 납골당으로 돌아가신 엄마를 찾아가는 장면도 좋아한다. 정혜의 어머니를 통해서 정혜를 표현하고 싶었다. 나도 촬영 현장에서 무성한 꽃으로 장식된 납골당에 많이 놀랐다. 나도 살아계신 내 어머니를 생각했고 그 장면 촬영이 끝나고 김지수씨도 울었다. 김지수씨도 자신의 살아계신 친어머니를 생각했다고 한다. 이것은 공통된 감정이다. 그러나 그 장면은 잘라냈다."

- 촬영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
"김지수씨는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다른 TV 프로그램도 병행하고 있어서 매우 지친 상태였다. 휴식 시간에 김지수씨가 그냥 잠이 들어버린 일도 있다. 그래서 내가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우곤 했는데 어떤 때는 김지수씨가 화를 내기도 했다(웃음).

또 황정민씨가 연기한 '사내'가 정혜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아놓고 나타나지 않는 장면을 촬영할 때였는데 당시 김지수씨가 정말 배가 많이 고픈 상태였다. 그래서 먹으라고 했다. 가능하면 많이 그리고 천천히. 단번에 말고 하나씩 차례대로 먹도록 주문했다. 각각의 음식은 정혜가 가진 트라우마라고 설명했고 그것을 차례대로 느리게 인정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던 게 내 의도였기 때문이다. 김지수씨는 아무런 감정 없이 음식을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이 장면은 단 한번에 찍었다."

ⓒ 박영신
- 특히 가슴 아픈 장면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장면을 좋아하나?
"너무 좋아한다. 그것이 정혜를 표현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기대했던 반응도 가슴 아픈 어떤 것이었다.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외로움이 바로 그거라고 생각했다. 혼자 밥을 먹는데 음식을 한꺼번에 다 열어서 먹으면 그건 파티다. 하나씩 차례대로 열어서 먹는 것은 생각이다. 그녀는 생각하는 것이다.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다. 관객을 고문할 생각은 없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고역스런 장면이라고 했다."

"이창동은 위대한 감독, 키에슬롭스키는 나의 스승"

- 좋아하는 시네아스트가 있나?
"이창동 감독.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분이다. 사람들에게 솔직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관점은 차치하고 그의 영화는 힘이 있다. 휴머니티라든가 소외된 사람들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감독 아닌가. 위대한 감독이다. 존경한다. 외국인 감독으로는 이마무라 쇼헤이나 마틴 스코시즈, 파스빈더 같은 감독도 좋아하지만 단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다. 그는 내 스승이다. 그의 모든 영화를 좋아한다.

특히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1998)>은 최고다. 볼 때마다 세상에 그 보다 더 아름답게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여자, 정혜>를 만들 때도 여러 번 생각해 봤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도 그 사람의 마음을 갖고 싶었다."

-그러고 보면 <여자, 정혜>가 키에슬롭스키의 감성과 많이 닮아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오마주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키에슬롭스키를 오마주하게 된다면 결코 주저하지도 않을 것이다. 키에슬롭스키가 죽었을 때 마치 내 가장 가까운 누군가가 죽은 것 마냥 눈물이 났다. '왜 이런 사람이 죽어야 되나' '몇 편 안 되는 영화를 남기고 왜 하필 이 사람이 죽어야 했나'라는 생각이랄까. 키에슬롭스키는 늘 사랑을 이야기 하지만 거창한 것이 아닌 작은 철학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려 보여줬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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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에서 보여주는 불안감, 상실감도 <여자, 정혜>에 닿아있지 않나?
"그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 상상력도 좋고.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세상을 더 깜짝 놀라게 했을 텐데…. 철학을 위해서 인간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 그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앞으로도 그를 따라 갈 사람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

- 영화제 참석 이외에 진행하고 있는 일이 있나?
"프랑스에 오기 전 TV용 영화를 한 편 찍고 있었다. KBS의 TV문학관을 위한 건 데 은희경씨의 소설 ‘내가 살았던 집’이 원작이다. 배종옥씨가 주인공이다. <여자, 정혜>와 매우 닮은 작품이 될 것이다."

- 원작은 감독이 골랐나?
"그렇다."

- 데이빗 린치나 라스 폰 트리에, 잉그마르 베르히만 같은 거장들도 TV 시리즈를 제작한 일이 있긴 하지만 사실 영화를 하는 분들이 TV에서 작업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로 안다.
"개인적으로 꼭 TV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HD무비 카메라로 촬영할 것을 제안한 것도 내 자신이고…. 하지만 모든 권한이 내게 주어진다는 것은 사실 매력적인 일이다. 소설을 선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내가 각색을 하고 무엇보다 돈 걱정 안 해도 되지 않나. 좋은 배우와 함께 작업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배종옥씨는 정말 뛰어난 배우다. 결국 다음 영화 <러브 토크>를 배종옥씨와 같이 하기로 했다. 작업을 함께 하면서 서로 확신을 갖게 됐다. 배종옥씨가 나를 믿어 주고 나도 배종옥씨를 믿는다. 전혀 주저 없이 결정했다."

- 배종옥씨는 영화 속에서 딱히 ‘내가 아름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로운 배우 같다.
"그런 거 전혀 없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 사람을 만난 것 자체가 감독으로서는 행운이다."

- 크랭크인은 언제쯤?
"올 여름에 촬영을 시작한다. <여자, 정혜> 작업을 함께한 스태프들이랑 LA에서 로케이션할 계획이다."
2005-03-15 17:14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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