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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나절의 도갑사 풍경

도갑사 해탈문
 도갑사 해탈문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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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띵하다. 지난 밤 술 때문이다. 그런데 봄철 쑥국을 먹으니 컨디션이 많이 좋아진다. 7시 반쯤 우리는 도갑사로 올라갔다. 이영현 종무실장이 8시부터 도갑사 성보박물관을 열어주기로 했다. 해탈문(국보 제50호)은 그동안 새롭게 보수를 해서 깨끗해졌다. 그런데 해탈문 현판을 새로 해 달았고, 문 안에 있던 문수동자와 보현동자도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선지 고졸한 맛이 없어졌다.

해탈문은 속세를 떠나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해탈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석조계단을 지나야 한다. 그런데 이 석조계단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아 보인다. 계단이 왕릉의 정자각 기단과 유사하다. 섬돌의 태극문양도 인상적이다. 석조계단을 올라 해탈문 안으로 들어가면 좌우로 문수동자와 보현동자상이 있다. 이들은 사자와 코끼리 등에 앉아 있다. 그런데 이 두 동자상은 최근에 새로 조성된 것으로, 원래의 것은 성보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문수동자상
 문수동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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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 해탈문은 1960년 중수하면서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1457년부터 1473년(성종 4년)까지 수미(守眉) 대사에 의해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건축 양식이 부석사 조사당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주심포를 근간으로 한 단순미가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도갑사 해탈문은 고려 후기 건축양식을 계승한 조선 초기 사원 건축이 된다.

해탈문이 국보가 된 것은 이처럼 역사적 건축학적 가치가 있기도 하지만, 그 안에 봉안되어 있는 문수동자와 보현동자상 때문이기도 하다. 이 두 동자상도 해탈문과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문수동자상은 사자 위에 옆으로 걸터앉아 있다. 까만색의 머리는 좌우로 묶어 상투를 틀었다. 얼굴은 동자다우면서도 이국적인 모습이다.

보현동자상
 보현동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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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편에 있는 보현동자상은 코끼리를 타고 있다. 그런데 걸터앉은 자세가 문수동자와는 약간 다르다. 무릎을 구부리지 않고 양발을 자연스럽게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다. 얼굴 표정은 문수동자상과 거의 같다. 문수동자가 지혜의 상징이라면, 보현동자는 대행(大行)의 상징이다. 현재 해탈문에 있는 문수와 보현동자상은 2011년 보수하면서 새로 봉안한 것이다.
 
해탈문을 지나면 새로 지은 광제루(廣濟樓)가 좌우로 길게 펼쳐진다. 2층으로 된 광제루 1층에 있는 세 칸짜리 문을 지나면 대웅보전 앞마당이 나타난다. 마당에는 5층석탑과 대웅보전이 일직선상에 서 있다. 그리고 탑의 왼쪽에는 최근에 조성한 석등이 있다. 옛날에는 석등 오른쪽에 돌로 만든 수조가 있었는데, 지금은 광제루에 있는 종무소 앞으로 옮겼다. 최근에 불사를 하면서 절집의 배치 일부를 바꿨는데 전체적으로 잘 했다는 생각이다.

도갑사의 성보문화재

광제루에서 바라 본 도갑사 5층석탑과 대웅전
 광제루에서 바라 본 도갑사 5층석탑과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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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에서 가치 있는 문화유산으로는 도갑사 해탈문, 문수와 보현동자상 외에 미륵전 석조여래좌상, 도선수미비, 5층석탑, 석조, 수미왕사비, 도선국사 진영, 수미왕사 진영이 있다. 이들 중 석조여래 좌상과 도선수미비는 도갑사 경내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5층석탑, 석조, 수미왕사비, 도선국사 진영, 수미왕사 진영만 본다. 5층석탑은 대웅전 앞에 있다. 2중 기단의 5층석탑으로 높이가 5.45m다. 구조나 조성 기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5층석탑은 대웅전 그리고 뒤의 월출산의 선과 배치가 비교적 잘 맞는다. 전남 유형문화재인 도갑사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수조다. 길쭉하고 네모난 돌의 안을 파내고, 각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어 마치 통나무배 모양을 하고 있다. 석조 안 밑바닥에는 물을 뺄 때 쓰이는 작은 배수구멍이 있다. 석조 표면에 새겨진 강희(康熙) 21년 임술(壬戌)이라는 명문(銘文)을 통해 조선 숙종 8년(1682)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길이 467cm 폭 116cm 높이 85cm에 이르는 큰 석조다.

수미왕사비
 수미왕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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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왕사는 도선국사와 함께 영암 출신으로 도갑사를 빛낸 스님이다. 수미왕사비는 거북모양의 받침 위에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다. 귀부의 머리가 용처럼 보이며, 이수에는 구름을 타고 오르는 두 마리의 용이 보인다. 비문에 의하면 선조 14년(1581) 비석이 넘어져 인조 11년(1633)에 새로 세웠다. 1600년대 세웠으면서도 고려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넘어진 비석의 형태를 모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문화유산은 도선국사와 수미왕사의 초상화다. 이것은 원래 조사전에 모셔져 있었으나 현재는 성보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도선국사 초상화는 왼손에 주장자를 들고 의자에 걸터앉아 약간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의 윗부분에 '도선국사 진영'이라는 제목을 써 놓았다. 절에 전해오는 기록에는 도선의 초상화는 세조 2년(1456) 도갑사를 중창한 수미왕사의 제안으로 처음 그렸다고 한다. 이 그림은 이후 원본을 다시 모사한 것으로, 조선 후기인 1800년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수미왕사 초상화
 수미왕사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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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왕사 초상화는 오른손으로 불교용구인 불수를 들고 두 다리를 가부좌한 채 의자에 앉아 왼쪽을 향하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 윗부분에 '수미왕사 진영'이라는 제목을 써 놓았다. 수미왕사비와 같은 시기인 조선 인조 11년(1633)에 제작된 것으로 전한다. 이 초상화도 도선국사 초상화와 표현방식이나 색채 등이 거의 같아 1800년 전후 다시 모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갑사 성보박물관에는 이들 문화유산 외에 고문서, 불경, 도자기, 기와, 다라니경판, 불상과 탑편, 동종 등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도갑사에 보관되어 있거나 사역 발굴 중 나온 것들이다. 고문서로는 <도선비결>이 유명하고, 불경으로는 팔리어 패엽경과 아비달마가 유명하다. 도자기는 제기와 생활용기가 함께 전시되어 있다. 기와 역시 암막새, 수막새, 평기와 등 다양하며, 일부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성화3년명 암막새
 성화3년명 암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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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막새는 연화문, 귀면문, 암막새는 봉황문이 눈에 띈다. 이들 기와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것이다. 명문 기와에는 왕권무작(王權無作), 성화 3년 정해 3월(成化三年 丁亥三月)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다른 암막새에는 강희(康熙) 13년 5월 최우석(崔愚石)이라는 사람이 시주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다라니경판은 목판으로 보인다. 불상은 청동판불입상으로 많이 훼손되었다. 그리고 청동으로 만든 탑편과 광배도 있다. 동종은 용암사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지는 않은 것 같다.  

비석에 쓰여진 도선국사와 수미왕사 이야기

도갑사는 헌강왕 6년(880)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조선 세조 2년(1456)부터 1464년까지 수미대사가 966칸으로 중창했다고 한다. 그 후 조선시대 내내 왕실과 관계를 맺으며 월출산 지역을 대표하는 절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도선은 창건주가 되고 수미는 중창주가 되는 셈이다. 이들의 행적과 불교사상은 도선수미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중 도선국사 비명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도선수미비
 도선수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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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명산 월출산의 기암괴석은                   月出巖巖
생각컨대 이 영산이 신인을 낳다.                惟嶽降神
강신으로 태어나신 그 인물이여                  降神伊何
그 인물은 다름 아닌 도선국사네.                生師道詵
  […]
위대하신 고려초의 도선국사는                   猗歟詵師
민족 위해 태어나신 용상이시다.                 龍象之傑
어떤 분야 학술이던 무불통이나                  術無不通
그 중에서 뛰어남은 지술(地術)이라네.        靑鳥其一
  […]
해가 뜨는 동쪽나라 우리 국토는                 東國之土
삼천리 금수강산 반만년 역사.                    數千餘里
회령에서 제주까지 멀고 넓지만                  無遠無邇
도선국사 두루두루 살펴보았네.                  師無不歷
절을 짓고 탑을 세운 그 공덕으로                創寺建塔
높은 묏부리와 낮은 계천(溪川) 진압하였다.  以鎭嶽瀆
월출산의 서쪽에다 절을 지으니                  月出有寺
그 이름이 높고 빛난 도갑사라네.                寺名道岬
영암 땅의 월출산엔 달이 머물고                 月出之山
스님께선 이곳에서 태어나시다.                  師之所生
도갑이란 이름의 절을 세우고                     道岬之寺
도선국사 그 자리에 오래 머무네.                師之所營

도갑사 건축 및 탑재
 도갑사 건축 및 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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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미왕사 일대기는 묘각화상 비문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스님은 낭주(郎州) 사람으로 13살 때 월출산 도갑사로 출가했다. 20살 때 비구계를 받고 유명사찰의 강원에서 공부하다 속리산에 이르러 교학에서 큰 성취를 이뤘다. 그 후 교학을 던져버리고는 참선수행에 열중하여 구곡각운과 벽계정심과 같은 선지식 밑에서 수도했다. 그리고는 선종판사(禪宗判事)를 맡아 불교중흥을 위해 애를 썼다.

그 후 스님은 출가한 도갑사로 돌아와 퇴락한 절을 일으켜 세우는데 온힘을 바친다. 도갑사는 도선국사 이래 도량이 황폐하고 몰락하여  풀밭에 덮여있었다. 이에 스님은 나라의 지원을 받아 문도인 홍월(洪月)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게 하여 중창 불사를 마무리한다. 이때부터 신도들이 사시공양을 올리고, 사부대중이 떼를 지어 찾아들어 그 수효가 일천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도갑사의 아침
 도갑사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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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세조가 예를 갖추고 스님을 영접하여 왕사로 책봉하니 그 호를 묘각왕사(妙覺王師)라 했다. 이후 수미대사는 속리산에서 함께 공부하던 신미(信眉)대사와 조선 불교의 종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해동사문(海東沙門) 백암성총(栢庵性聰)은 비명(碑銘)에서 스님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다.

구산선풍 쇠퇴하여 불이 꺼지니
임제선풍 사라진 후 왕사가 중흥
세월 따라 그 선풍이 흥폐를 거듭
종과 북을 크게 쳐서 진작하였네.

처음 보는 죽정리 장승

국장생
 국장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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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를 보고 월곡리 마애불을 찾아가는 길에 우리는 도갑사 앞 1㎞ 지점에 있는 장승을 찾아간다. 장승이 서 있는 지점은 도갑사로 가는 옛 길가로, 절의 초입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 장승은 절의 영역을 표시하는 경계석 또는 표지석으로 세워진 것 같다. 장승을 보니 높이 115-125㎝, 폭 67-70㎝, 두께 36-42㎝의 자연석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장승과는 상당히 다르다. 사람 얼굴이나 무신의 모습을 조각한 형태가 아니고, 자연석 앞면에 두 줄의 테두리를 두르고 그 안에 국장생(國長生)이라는 글자를 큼지막하게 새겼다.

왼쪽 윗부분은 비스듬하게 깨졌고, 장승의 좌우 아랫부분에는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없는 글자가 보인다. 장승을 세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장생이라는 말이 나말여초에 사용되던 말이기 때문에 그 역사가 그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로 지정된 경남 양산 통도사 국장생과 비교되는 유물로, 인근에 있는 황장생과 함께 더 연구해보아야 할 문화유산이다.


태그:#도갑사, #해탈문, #문수와 보현동자상, #도선국사와 수미왕사, #죽정리 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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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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