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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에 없는 줄 알았던 밭일을 하느라 삭신이 쑤신다. 그것도 놉(일당)도 못 받고 오히려 땅주인에게 막걸리를 사 먹이며 일했다. 그곳은 조천읍 와흘리였는데,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차로 삼십 분 정도 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와흘리는 육지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별장 같은 잘 지어진 좋은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 한가운데에 정말 뜬금없는 비닐하우스와 컨테이너가 들어서 있는 땅이 있는데, 그 땅주인은 작년 여름 서울에서 건너온 35세의 결혼 안 한 여자, 김도나씨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제주에 살러 내려온 셈이다. 작년 겨울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며 끌고 간 지인의 소개로 그녀를 처음 만났다.

당시에 그녀는 그 추운 겨울 컨테이너에 혼자 지내고 있었다. 나도 어디 가서 대책 없이 제주도에 내려온 걸로 둘째가라면 서럽다고 생각해오던 참인데 그녀가 사는 모습을 보니 '내가 졌소'라는 말이 절로 나올 판이었다.

수풀과 나무 가득찬 그 땅에서 생명의 기운을

그녀의 근거지인 비닐하우스와 컨테이너다.
 그녀의 근거지인 비닐하우스와 컨테이너다.
ⓒ 조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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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어 제주에 봄이 오고 다시 찾은 그녀는 컨테이너가 아닌 그 근처의 작은 농가주택에 살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 밭일할 때 신는 장화들과 농기구들이 보이길래, 집을 잘못 찾은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곧 여느 제주 아줌마처럼 보이는 여자가 농사일을 마치고 제집에 들어섰다.

"언니, 이게 웬일이야! 차림새가 완전히 제주도에서 농사짓고 사는 여자네!"

이웃 마을의 무밭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가 자신의 땅에서 거둔 얼갈이 배추와 쑥으로 국을 끓여 한 상 내온다. 두 여자의 '한라산(소주) 야간등반'이 시작되었다. 마을 사람이 연세 100만 원을 달라는 것을 50만 원으로 '쇼부'를 쳐서 방 두 칸에 거실이 있는 그 집을 얻었단다. 내가 작년 여름 연세 170만 원을 주고 집을 얻었다고 기뻐한 게 무색했다.

연세 50만원주고 얻었다는 집이다. 동네 꼬마들손까지 빌려 이사를 마쳤다 한다.
 연세 50만원주고 얻었다는 집이다. 동네 꼬마들손까지 빌려 이사를 마쳤다 한다.
ⓒ 조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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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에 있던 살림을 그 집으로 옮긴 과정을 들으니 더욱 기가 막혔다. 마을 사람들이 조금 도와주고 리어카에 살림을 실어 동네 꼬마들의 손을 빌려 짐을 다 옮겼다는 것이다.
내가 물을 질문은 아닌 것 같지만, 물었다.

"대체 어쩌다 제주에 내려와서 이렇게 혼자 밭일하며 살아요? 외롭지는 않아요? 저 비닐하우스 있는 땅은 대체 어쩔 거에요?"
"동네 꼬마애들 맨날 놀러 오는데 뭐... 크크  비닐하우스는 포장마차를 차릴 거야. 살사 포장마차. 내가 살사댄스 배웠잖아~ 손님들 오면 댄스 한 번씩 하지 뭐!"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 후 쉼 없이 10여 년의 직장생활을 했다. 회사를 그만둔다는 게 뭔지도 모르고 당연히 일만 하고 살아야 되는 줄 알고 살아오다가, 회사에서 주5일 근무제를 하면서 휴일이 생기자 대체 뭘 해야 될지 몰랐단다. 그러다 여행이라는 것을 하게 되자 세상이 달라 보였다.

내가 누군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한 달 동안 유럽여행을 했다. 다시 직장생활을 하게 됐지만, 이게 아니다 싶었고 휴가를 내 제주에 내려왔던 작년 3월, 겨우 3일 동안 제주에서 올레길 두어 코스 걸어봤으면서 '제주도에서 살아볼까?'란 생각을 해버렸다.

가진 돈을 털고, 대출도 받고, 그녀를 지켜보던 친구의 도움도 받아 와흘리에 농지로 되어있던 집도 한 채 안 올려져 있는 240평의 땅을 샀다. 동네 주민들이 흉흉하다고 했을 정도로 무성한 수풀과 나무들로 가득 찼던 그 땅을 보고 그녀는 생명의 기운을 느꼈단다. 친구와 둘이서 말 그대로 '삽질'을 하다가 답이 안 나오길래 굴착기를 불러다가 밀어버렸다. 비닐하우스 옆에 300만 원 주고 컨테이너를 놓았다. 그리고 무성한 잡초를 곡괭이 하나에 의지해 모조리 캐서 씨를 뿌릴 수 있는 밭을 일궈놓았다.

"장보러 가는 길이 완전 '미션' 수행하는 느낌이야"

혼자 곡괭이로 일궈놓은 밭.
 혼자 곡괭이로 일궈놓은 밭.
ⓒ 조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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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일 쉬는 날은 돈벌이가 없잖아요. 밥은 어떻게 먹고 살아요."
"밭에 씨 뿌려놓은 거 따다 먹잖아. 동네 사람들 밥 먹을 때 껴서 먹을 때도 많고. 신용카드는 잘라버렸어. 근데 가끔 서울 가야 되어서 돈이 들긴 하네. 장애인 복지센터에서 봉사한 지 10년 째라 계속 가게 돼."
"제주 살면서 제일 힘든 건 뭐에요?"
"슈퍼 가는 거. 차도 없는데 멀리 나가야 하니까 장 보러 갔다 오는 게 완전 '미션'이야."

혼자 있어도 외로운 줄도 모르겠고, 포장마차 차릴 구상도 해야 하고, 밭일도 나가야 하고 할 일이 너무 많단다. '한라산 야간등반'을 마무리할 무렵, 예의 삼아 내가 얘기했다.

"뭐 도와줄 거 없어요? 밭일 안 하나?"
"우리 밭? 내일 할 건데? "
"………"

술 한 잔을 했으니 어차피 대평리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건 꼼짝없이 내일 잡초를 캐서 밭을 만들어야 하게 돼버렸다.

다음 날 아침, 흙 묻은 장화를 신고 곡괭이를 들었다. 잡초가 가득한 밭 앞에서 작아졌지만, 90년대 가요를 틀어놓고 곡괭이질 삼매경에 빠지다 보니 어느새 조금씩 쓸만한 밭이 생겨났다.
밭일하다말고 점심으로 밭에서 수확했던 배추전을 부쳐먹었다.
 밭일하다말고 점심으로 밭에서 수확했던 배추전을 부쳐먹었다.
ⓒ 조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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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으로 그 자리에서 가스버너에 배추 전을 부쳐다가 막걸리 한잔 하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다 동네 주민이 부른 자리에 먹다 남은 막걸리를 들고 가보니 삼겹살 파티가 한창이다. 고기를 잘 얻어먹고 밭으로 돌아왔더니 아까 본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옷을 갈아입고 곡괭이를 들고 온다.

번듯한 집들 사이에 뜬금없는 비닐하우스와 컨테이너를 가진 그녀이지만, 통장 잔고 10만 원이라며 내 주머니 털어 막걸리 사다 먹여야 하는 그녀이지만 (사실 나도 만만치 않은데 내 주머니를 털게 하다니 그녀는 역시 고수였다),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을 농작물을 심기 위해 곡괭이질을 쉬지 않았다.

육지에서 술자리 한 번에 쓰던 돈 5만 원, 여기선...

마을 사람들이 밭일을 거들어 주러 왔다.
 마을 사람들이 밭일을 거들어 주러 왔다.
ⓒ 조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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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돈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제주에서 살고 싶다"며 '제주에서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문의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도 얘기하듯이, '적당한' 불편을 감수할 수 있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겐 '참지 못할' 것들일 수 있겠지만, 그것을 '적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말이다.

육지에서 술자리 한 번에 쓰던 돈 5만 원이 하루 밭일의 '적당한' 노동의 대가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궁색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자신에겐 '적당히' 절약하며 사는 것이 된다면. 혼자 유유자적 사는 것도 좋겠지만,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을 작물이 뭐가 좋을지 고민하고 밭을 일구는 '적당한' 수고로움을 기쁘게 여긴다면. 거기다 더해 남의 집 밥상에 숟가락 하나 올려놓을 배짱은 옵션이 될 거다.


태그:#제주도, #와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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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는 서울처녀,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http://blog.naver.com/hit1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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