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호봉산 둘레길 이정표
 호봉산 둘레길 이정표
ⓒ 윤도균

관련사진보기


지난 6일(일) 가족과 함께 예배를 보고 오니, 큰아들은 손자와 둘이서 극장에 간다기에 손자에게 그냥 해보는 소리로, "할아버지, 할머니도 함께 가면 안 될까?"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어린이들 보는 애니메이션 영화라서 안 된다고 정색한다.

괜스레 실없는 소리 했다가 본전도 못 찾고 박대를 당하고 나니, 그동안 손자놈을 '애지중지'한 것이 일면 후회된다. 우리 두 늙은이가 손자에게 '깨진 독에 물 붓기' 사랑을 한 것 같아 허망했다.

"도영이! 너 이놈. 어디 두고 보자, 앞으로 할아버지 할머니도 얄짤없다."

이제 12살짜리 철없는 손자가 한 소린데도 '나이 들면 어린애 된다'더니, 왠지 서운하다. 이런 할아버지와 손자의 이야기를 주방에서 듣던 아내가 "손자 새끼, 귀엽다고 해봐야 다 소용없다"고 말한다.

아내는 주방에서 덜거덕거리며, 뭔가를 준비해 작은 배낭에 챙겨 넣는다.

"여보! 우리도 갑시다."

갑자기 산행준비를 한 아내는 나더러 등산복으로 갈아입으란다. 우리끼리 호봉산이나 한 바퀴 돌고 오잖다.

"아니, 지금 11시가 다 됐는데, 이 뙤약볕에 웬일로 산에 가자는 겨?"
"애들도 다 나갔는데, 우리 둘이 두서너 시간 산책이나 하자구요."

"우리끼리 호봉산이나 한 바퀴 돌고 와요"

호봉산 꼬불꼬불 둘레길 모습이 우거진 녹음 아래 정겨운 모습으로 편안한 산행을 인도한다.
 호봉산 꼬불꼬불 둘레길 모습이 우거진 녹음 아래 정겨운 모습으로 편안한 산행을 인도한다.
ⓒ 윤도균

관련사진보기


마치 시골길처럼 편안하게 이어지는 호봉산 둘레길
 마치 시골길처럼 편안하게 이어지는 호봉산 둘레길
ⓒ 윤도균

관련사진보기


별일이다. 평소에는 산에 가자고 하면 콧방귀를 '핑핑' 뀌며 다리가 아파 못 가니, 당신이나 혼자 다녀오라며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이 웬일인가.

'당신은 모르지만 난 이미 새벽 5시에 '부평공원'을 여섯 바퀴(1시간 반)나 돌고 왔는데…. 아무리 내가 산을 좋아해도 일찍 가면 몰라도 햇볕이 쨍쨍한 이 시간에 산에 가자는 건 이해가 안 돼!'

'혹시, 이 할망이 손자와 할아버지의 대화를 듣고 쇼크를 받았나? 왜, 생전에 안 하던 짓을 하는 겨?' 마음 같아서는 집에 있겠다고 꽁지를 빼고 싶지만, 그랬다간 온종일 볶일 것을 생각하니 끔찍하다.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가기로 한다.

이미 내 생활에 필수품이 된 디지털 카메라를 챙겨 들고 나서니, 햇볕이 장난 아니게 따갑다.  더위를 피하고자 머리 위에 스카프 한 장 얹고 모자를 꾹 눌러쓰니, 한결 시원하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아내가 "이슬람교도 남정네들이 쓰는 터번 같다"며 미소를 짓는다.

인천 부평 산곡동 현대 아파트 1, 3단지를 지나, 부평서 중학교와 부광고등학교를 지나 100여m 인도를 따라가면 호봉산이 나온다. 이때 시간이 정오인데, 호봉산 입구 포장마차에는 산에 올랐다 내려온 이들이 전과 시원한 막걸리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 모습이 부럽다. 마음 같아서는 호봉산이고 뭐고, 시원한 대포나 한 잔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마음을 접고 늦깎이 지각산행을 시작했다.

시원한 막걸리나 마시며 눌러앉고 싶지만...

가도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호봉산 둘레길을 아내가 앞서 걷고 있다.
 가도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호봉산 둘레길을 아내가 앞서 걷고 있다.
ⓒ 윤도균

관련사진보기


아내와 함깨 호봉산 둘레길 돌기중 잠시 휴식을 취하며
 아내와 함깨 호봉산 둘레길 돌기중 잠시 휴식을 취하며
ⓒ 윤도균

관련사진보기


호봉산(琥奉山)은 부평서 중학교 뒷산인데, 그 옛날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1950년대 인근 주민이 이 산에서 땔감으로 무분별하게 나무를 베어 가 그 후 산에 나무가 없어 '빡빡 산'이라고도 불렸다고도 한다. 1977년 이곳 호봉산기슭에 팔각정을 세우면서 '선포정'이라고 했고, 산 이름도 '선포산'으로 개명했다가 선포산보다는 예전에 부르던 '호봉산'이 더 친근감이 간다고 해서 다시 '호봉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난 이미 호봉산에서 시작해 천마산, 중구봉(철마산) 계양산까지 한남정맥 구간 종주를 하느라 호봉산을 몇 번이나 올랐었다. 그러나 이날 아내가 인도하는 길을 따라 호봉산 산행을 해 보기는 처음이다. 산이라면 대부분 능선 따라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이 보편적인데, 이상하게 아내는 정상을 위에 두고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산 중턱 길을 에돌아 간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공원 몇 바퀴 도는 것이 났지 이게 뭐냐고 한 소리를 하니, 한 마디 한다.

"공원길 걷는 것 다르고, 산길 걷는 것 달라요."

아내는 성급한 산행은 자제하고, 건강을 위해 서행(slow) 산행을 하라고 충고한다. 그럼, 자기도 웬만한 산은 따라다니겠다고 나를 달래보지만, 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낸다'. 왜냐하면 서행 산행은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성급한 산행 자제하고, 서행 산행 하세요"

모처럼 오름길을 오르는 호봉산 정상 가는길
 모처럼 오름길을 오르는 호봉산 정상 가는길
ⓒ 윤도균

관련사진보기


한남정맥 구간 호봉산엔 많고 많은 한전 철탑이 서있다. 혹시 이 사진보고 "여치집" 같다고 하실지 모르지요. 여치집은 아니고 한전철탑 하단 정가운데서 위로 찍은 사진이랍니다.
 한남정맥 구간 호봉산엔 많고 많은 한전 철탑이 서있다. 혹시 이 사진보고 "여치집" 같다고 하실지 모르지요. 여치집은 아니고 한전철탑 하단 정가운데서 위로 찍은 사진이랍니다.
ⓒ 윤도균

관련사진보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아내와 걷는 호봉산은 코스 전체가 꼬불꼬불 육산길로 이어져 마치 시골 길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싱그럽게 우거진 녹음 속을 걷는 재미가 그런대로 쏠쏠하다. 물론 속보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마땅치 않겠지만, 가벼운 산행을 즐기는 이에겐 더없이 좋은 코스란 생각이 든다.

전국적으로 둘레길 붐이 일며,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곳도 더러 있다. 그런데 이곳 호봉산 둘레길은 어느 한 곳도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고 관리되지 않던 샛길을 조금 다듬은 정도라 더욱 정감이 간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 어떤 둘레길보다 더욱 나은 것 같다. 이곳 호봉산 둘레길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도 폭이 좁게 이어지는 '꼬불꼬불 꼬부랑 둘레길'이다.

꼬부랑 둘레길이 아름답고, 인상적이어서 지나가는 등산객이 "이 예쁜 꼬부랑 둘레 길을 관리하는 것처럼 깨끗하고 훼손된 곳이 없다"고 말하자, 아파트 단지에서 통장 일을 하는 아내가 말한다.

"원래, 이 길은 관리되지 않은 샛길이었는데, 산곡동에 사는 80세가 넘으신 할아버지 한 분이 수년에 걸쳐 거의 매일같이 이곳에 오셔서 손을 봐요. 등산로가 팬 곳은 복토를 하고, 훼손된 곳은 다듬어 현재의 '호봉산 둘레길'을 만들었고, 지금도 늘 청소와 관리를 하세요."

"수년에 걸쳐, 매일같이 호봉산 둘레길을 손 봐요"

호봉산 정상에 있는 한전 철탑 모습
 호봉산 정상에 있는 한전 철탑 모습
ⓒ 윤도균

관련사진보기


약수터와 선포정 인근에 핀 영산홍과 자산홍 꽃이 아름답다.
 약수터와 선포정 인근에 핀 영산홍과 자산홍 꽃이 아름답다.
ⓒ 윤도균

관련사진보기


아내에게 호봉산 둘레길을 조성한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으니, 할아버지께서 남모르게 흘리셨을 땀과 정성이 느껴졌다. 또, 인천 시민의 건강을 위해 큰 공로를 세우신 거란 생각을 하며 할아버지 같은 분을 바로 우리 '인천의 자랑스러운 시민상'을 받으실 수 있도록 추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부평의 호봉산 둘레길을 조성하신 장한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인천 시민의 한 사람으로 할아버지께서 조성하신 호봉산 둘레길 걸어보고, '할아버지의 산사랑 정신을 기리고', '할아버지의 정취가 배어 있는 둘레길'을 호봉산 "꼬부랑 둘레길"이란 예쁜 이름을 지어 봅니다. 호봉산 "꼬부랑 둘레길"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하산길에 만난 노랑매화꽃과 철쭉꽃이 곱게 핀 모습이 어울린다.
 하산길에 만난 노랑매화꽃과 철쭉꽃이 곱게 핀 모습이 어울린다.
ⓒ 윤도균

관련사진보기



태그:#호봉산, #한남정맥, #둘레길, #호봉산할아버지, #꼬부랑둘레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