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구·구·팔·팔! 이·삼·사!!

한때 술자리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던 건배사입니다.

 

술잔을 치켜 올린 무리 중 누군가가 '구·구·팔·팔!'하고 선창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후렴이라도 넣듯 '이·삼·사!!'하고 리듬을 맞춰 외치던 때가 있었습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2~3일 정도만 누워있다 가기(죽기)를 염원하는 바람을 건배사에 실은 말입니다.

 

지금 내 나이 88세. 내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노라고 손자들에게 이야기하면 어떤 얼굴을 할까? 인생은 강물 같은 것,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보듬고 망망한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것. 나는 그 강물 어디쯤에서 이 글을 쓰고 있을까? -나는 내 나이가 좋다 186쪽-

 

<나는 내 나이가 좋다>의 저자는 연세가 88세인 이기옥 할머니입니다. 일제강점기와 6·25처럼 국가적이고 시대적인 격랑, 동시대를 산 모든 사람들이 공통분모처럼 겪을 수밖에 없었던 고난을 소거한 이기옥 할머니의 삶은 선택받고 복 받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88세 할머니가 쓴 사는 이야기, <나는 내 나이가 좋다>

 

그 연세에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병원 교수인 남편과의 결혼생활, 다복한 가족, 강녕한 노년을 꾸리고 계시니 선택받은 삶입니다. 88세의 연세에도 '자기실현'을 위해 붓을 들고, 글을 쓸 만큼 심신 건강한 삶을 영위하고 계시니 이기옥 할머니의 여생이야말로 선택받고 복 받은 인생이라고 감히 말씀드리는 겁니다. 

 

하지만 이기옥 할머니가 쓴 <나는 내 나이가 좋다>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선택적이고 특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느 정도의 나이라면 누구나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소소한 이야기, 나이를 먹으면 누구의 얼굴에나 생기는 잔주름처럼 자연스레 마음으로 공유할 수 있는 공동우물 같은 내용입니다.

 

할머니가 되어서도 놓지 못하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이 마르지 않는 우물입니다. 공동우물 두레박으로 퍼 올리는맑은 물처럼 '우리 할머니들'의 삶이 찰랑거리며 드러납니다. 딸, 소녀, 아내,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로 살고 계신 삶의 여정이 창호지에 드리운 호롱불빛처럼 은은하게 읽는 마음을 밝혀 줍니다.   

 

젊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 사물의 이치가 보이고 사람의 마음이 보이고 바람소리에도 참새의 지저귐에도 함께 할 수 있는 감성은 전보다 더한데, 육체의 노쇠에서 오는 추함은 점점 더 나를 슬프게 하고 무력하게 한다. -나는 내 나이가 좋다 17쪽-

 

우리 나이든 사람들이 모이면 늘 하는 말이 있다. 장수도 좋지만 나이는 우리만 먹고 자식들은 비껴가야 장수가 축복이지 자식들 아픈 것을 어떻게 견뎌? 그러니 이쯤에서 가는 게 축복인데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가? -나는 내 나이가 좋다 46쪽-

 

부러움을 살 만큼 복 받은 인생을 살고 계시지만 늙어가는 데서 오는 고뇌는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굴레인가 봅니다. 먼저 늙음을 맞이한 이기옥 할머니는 피할 수 없는 늙음을 보다 현명하게 맞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삶의 경험으로 말해줍니다.  

 

누구에게 배우고 들어서 전하는 얄팍한 지식이 아니라 당신이 살아오면서, 당신의 삶을 통하여 체득한 인생을 백신으로 하고 있는 노후용 예방주사, 노년의 삶을 좀 더 지혜롭게 맞이할 수 있는 항체를 형성시켜 줄 노년용 예방주사 같은 내용입니다.   

 

슬프고도 슬프도다. 어찌하여 슬프던고. 이 세월이 견고한줄, 태산 같이 바랬더니, 백년광음 못다 가서, 백발 되니 슬프도다. 어화청춘 소년들아, 백발노인 웃지 마소. 덧없이도 가는 세월, 낸들 아니 늙은 손가.

 

꽃과 같이 곱던 얼굴, 검버섯은 웬일이며. 옥과 같이 희던 살결, 광대등걸 되었구나. 삼단 같이 길던 머리, 불한당이 쳐갔으며, 볼 따귀에 붙은 살은 마귀할미 꾸어갔네. 샛별같이 밝던 눈이, 반장님이 되었으며, 거울 같이 밝은 귀가, 절벽강산 되어가네.

 

'백발가'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입니다. 이기옥 할머니의 마음도 어쩜 이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기옥 할머니가 그리는 당신의 삶, 당신이 맞아들이는 노년은 결코 회한에 젖어 있지 않습니다. 서리를 맞으며 피어있는 국화송이처럼 오롯하지만 아름답습니다. 

 

인생 팔고 중 하나인 노고(老苦, 늙어가는 고통,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늙음), 추억해 보는 인생, 노후에 바라보는 삶과 인생을 당신께서 그리고 있다는 수채화의 밑그림처럼 은은하게 보일 듯 말 듯 들려주고 있습니다.   

 

남은 사람들이 행복으로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

 

이기옥 할머니가 <나는 내 나이가 좋다>를 통하여 들려주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는 소소하게 살아 온 당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은 사람들이 행복으로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 하나를 놓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88년의 인생에서 체득한 행복의 비결, 행복해 지는 방법이나 조건을 징검다리를 놓듯 군데군데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기옥 할머니는 행복해 지기위해 '행복의 최면'을 무시로 당신스스로에게 걸기도 하지만 건강, 자식 잘되는 것, 적당한 경제력, 자기실현, 욕심을 부리지 않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행복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기옥 할머니가 처방처럼 내리는 행복의 진정한 조건은 '마음'입니다. 노년을 노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라면 노년의 나이도 좋겠지만 노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노년의 나이는 '죄'이며 '지겨움'일수도 있음을 보게 됩니다.

 

행복의 조건, 그것은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아무리 객관적인 조건이 다 갖추어졌다 해도 받아들이는 마음이 비어 있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빈 메아리가 되고 만다.-나는 내 나이가 좋다 222쪽-

 

<나는 내 나이가 좋다>, 늙어가는 청춘들을 위한 종합 백신

 

이기옥 할머니가 쓰고 도서출판 푸르메에서 출판한 <나는 내 나이가 좋다>는 인생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여유, 노년을 행복하게 맞이할 수 있는 마음, 인생을 아름답게 갈무리 할 수 있는 지혜가 담겨있는 오복용 백신입니다.

 

사람들은 오복(五福 =장수(壽), 경제적 여력인 부(富), 심신의 건강을 말하는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시세말로 웰-다잉인 고종명(考終命))을 말합니다. 유호덕과 고종명 대신 귀(貴)와 자손중다(子孫衆多)를 꼽기도 하니 이기옥 할머니의 일생은 이미 오복을 누린 행복한 인생일 수도 있습니다.

 

아주 무례하지 않다면 할머니 일생의 마침표가 '고종명'으로 찍혀지길 간절한 마음으로 실어 잠시 잠깐이라도 서원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나는 내 나이가 좋다> / 지은이 이기옥 / 펴낸곳 <도서출판 푸르메> / 2011년 9월 1일 / 값 12,000원


나는 내 나이가 좋다 - 꿈이 있어 아름다운 88세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이기옥 지음, 푸르메(2011)


태그:#이기옥, #나는 내 나이가 좋다, #푸르메, #오복, #인생팔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