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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관: 왕인박사 기념관
 영월관: 왕인박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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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완도로 다시 나오니 점심 때다. 읍내에 마땅한 음식점을 알지 못해 대야리까지 와서 점심을 먹는다. 남도 보리밥인데 전라도 특식으로 맛이 좋다. 점심을 먹었으니 이제 월출산 도갑사로 가는 일만 남았다. 월출산 도갑사는 13번 국도를 따라 강진군 성전면까지 간 후 2번 국도를 타고 밤재를 넘게 되어 있다.

밤재를 넘은 다음 월출산을 왼쪽으로 끼어 돌아 군서면 군서천을 따라 들어가면 도갑사가 나온다. 그런데 가다 보니 동구림리에 왕인박사 유적지가 보인다. 시간 여유가 있어 이곳에 들렀다 가기로 한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안으로 들어가니 한 마디로 어마어마한 유적지가 나타난다. 왕인박사 탄생지에 1985년부터 만들어진 성역화 사업의 결과물이다.

왕인상
 왕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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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 그는 어떤 사람인가? 왕인은 백제 제14대 근구수왕(375-384)때 이곳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8세 때 월출산 주지봉 기슭에 있는 문산재에 들어가, 유학과 경전을 수학했다.

그는 약관 18세에 벌써 오경박사가 되었다. 그리고는 17대 아신왕(392-404)때 일본 응신천왕의 초청을 받아 영암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고 전해진다. 당시 왕인은 32세였다. 그는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갔으며, 일본인들에게 한문을 가르쳐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인박사 유적지에는 모두 38가지 유적과 시설물이 있다. 이들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입구에 왕인박사 기념관인 영월관이 있고, 가운데 왕인박사 사당이 있으며, 주지봉 아래 왕인이 공부하던 문산재와 책굴이 있다. 그러므로 왕인박사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은 주지봉 기슭의 문산재, 양사재, 책굴, 왕인석상이다.

영월관, 사당 등은 모두 1985년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역사성은 부족하다. 영월관에 들어가 보니 왕인관련 유물의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왕인을 통해 맺어진 한일 문화교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인지 일본 사람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소위 오리지널은 하나도 없고, 카피만 있어 아쉬움이 크다. 요즘 콘텐츠만으로도 박물관을 만드는 세상이라지만 이건 좀 지나친 감이 든다.

국보 해탈문은 '수리중'

도갑사 일주문: '나라에서 으뜸가는 선종대찰'이라고 쓰여 있다.
 도갑사 일주문: '나라에서 으뜸가는 선종대찰'이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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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유적지에 실망하고 나는 도갑사로 차를 몰았다. 도갑사는 도갑 저수지를 지나 산속으로 조금 들어가야 한다. 매표소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가니 일주문이 나타난다. 월출산 도갑사(道岬寺)라 쓰여 있다. 그리고 뒷면에는 '나라에서 으뜸가는 선종대찰'이라고 쓰여 있다. 정말 그럴까? 신라 말 구산선문을 대표하는 사찰들이 순순히 인정할지 모르겠다.

일주문을 지나자 바로 왼쪽으로 계단이 있다. 이것을 따라 올라가면 해탈문이 나온다. 해탈문을 지나야 진정한 절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 된다. 해탈문은 현재 보수중이어서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도갑사 해탈문(국보 제50호)은 1960년 중수하면서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1457년부터 1473년까지 신미(信眉)와 수미(守眉) 스님에 의해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해탈문 석조기단
 해탈문 석조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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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탈문의 특징은 석조기단에 있다. 그런데 계단이 왕릉의 정자각 계단과 유사하다. 섬돌의 태극문양도 불교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해탈문은 속세를 떠나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 안쪽 공간 좌우에는 사천왕상이 배치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곳에는 사천왕상이 아닌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배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대흥사 해탈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지금 성보박물관에 있다.

도갑사 해탈문의 건축양식은 부석사 조사당과 같은 계열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주심포식과 다포 양식을 혼용해 건축학적으로 아주 중요하다고 하는데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어 안타깝다. 공사중인 해탈문을 돌아 절 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지나가던 사람들 역시 해탈문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 유홍준 교수는 자신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해탈문이 격에 맞지 않게 국보로 지정되었다고 폄하하기도 했다.

도갑사 5층석탑과 석조

도갑사 5층석탑
 도갑사 5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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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문을 지나 북쪽을 쳐다보면 일직선상에 5층석탑과 대웅보전이 보인다. 5층석탑(보물 제1433호)은 2중기단의 5층석탑으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균제된 체감율과 안정된 조형미에서 백제 양식이 아직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2002년 하층기단이 발굴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며, 높이는 5.45m다.

5층석탑 뒤에 있는 대웅보전은 도갑사의 주전인데 1977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1981년부터 복원불사가 진행되었고, 2009년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되었다. 2층으로 되어 웅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웅보전 앞 5층석탑 옆에는 대형 석조가 있다. 석조는 큰 돌의 내부를 파서 만든 돌그릇으로, 물을 담아 두었다가 곡물을 씻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도갑사 석조
 도갑사 석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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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으로 된 이 석조는 작은 통나무배 모양을 하고 있으며, 안쪽의 밑바닥에는 물을 뺄 수 있는 작은 배수구가 있다. '강희(康熙) 21년(二十一年) 임술(壬戌)'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조선 숙종 8년(1682)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길이 467cm, 폭 116cm, 높이 85cm에 달하는 둥근 직사각형 석조다.

국사전의 도선국사

도갑사 국사전
 도갑사 국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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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에서 중요한 전각은 국사전이다. 이곳에는 신라 말 이 절을 창건한 도선국사와 조선 초 도갑사를 중창한 수미왕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도선국사는 신라 말의 대선사로 도참사상의 시조로 여겨진다. 도참사상이란 풍수도참의 준말로 자연과 인간의 연관성을 연구하고 자연의 섭리에 따른 삶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도선국사는 신라 흥덕왕 2년(827) 이곳 영암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도선국사의 출생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성기동(聖起洞), 국사암(國師菴), 구림리(鳩林里), 월암사(月巖寺) 등은 현재의 지명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국사전에 있는 도선국사 진영
 국사전에 있는 도선국사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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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성기동에 사는 처녀가 관음천에서 빨래를 하는데 오이 하나가 떠내려 오는 것이었다. 처녀는 이것을 건져 먹었고, 그 후 아이를 배어 낳게 되었다. 처녀의 부모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아이를 국사암 위에 갖다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던 처녀가 국사암으로 가보니 비둘기가 내려와 아이를 품고 먹이를 갖다 주면서 기르고 있었다. 이에 처녀는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왔고, 부모도 사연을 듣고는 아이를 기르도록 하였다. 이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더 영특해졌고, 15세에 월암사로 출가한 후 동리산문에 들어가 혜철선사를 통해 선리(禪理)를 깨닫게 되었다.

37세 되던 864년(경문왕 3년) 도선스님은 광양 백계산에 옥룡사를 중창하고 옥룡산문을 개설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35년 동안 수도하면서 제자를 양성했다. 그리고는 898년( 효공왕 6년) 3월 광양 옥룡사에서 입적했다. 스님의 시호는 요공(了空)이고 탑명은 증성혜등(證聖慧橙)이었다. 탑비의 비문은 서서원 학사(瑞書院 學士) 박인범이 지었으나 돌에 새기지는 못했다고 한다.

수미왕사비를 통해 본 도갑사

수미왕사 진영
 수미왕사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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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전에 모셔진 또 한 분 스님은 수미왕사다. 국사전 옆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있어, 우리는 수미왕사의 삶과 업적 그리고 선맥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이 비석의 공식 명칭은 '월출산 도갑사 왕사 묘각화상(妙覺和尙) 비명'이다. 1629년 시작해서1633년에 완성되었으며, 성총(性聰) 스님에 의해 지어졌다.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묘각왕사(妙覺王師)의 법명은 수미(守眉)이다. 속성은 최씨고, 옛 낭주(朗州) 출신이다. 어머니가 이상한 사람으로부터 구슬을 전해 받는 꿈을 꾼 다음 태어났으며, 태어날 때 특이한 香氣가 방 안에 가득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영특했을 뿐 아니라, 세속을 멀리하면서 초연한 뜻을 품다가 13살 때 낭주 서쪽에 있는 월출산 도갑사로 가서 스님이 되었다.

수미왕사비
 수미왕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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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속리산 법주사 등 제방 강원을 다니며 삼장(三藏)을 공부하고, 이후에는 선방에 출입하였다. 그리고 구곡각운(龜谷覺雲) 스님을 만나기도 하고 판선종사(判禪宗事)가 되어 불교 중흥에 힘쓰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출가한 도갑사로 돌아와서는 황폐한 도량을 중창하기에 이르렀다. 1457년에는 도갑사의 면모를 일신하니, 사부대중과 청신남녀가 모여들어 종풍을 크게 떨쳤다고 한다.

마침내 세조대왕이 예를 갖추어 스님을 맞이한 다음 왕사로 책봉하였으며 묘각(妙覺)이라는 호를 내렸다. 63세 되던 해 스님은 제자들을 불러놓고 종문의 대사를 부촉하고는 입적하였다. 그래서 도갑사의 동쪽 기슭에 부도탑을 세우고 행적을 기록하여 비를 세웠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글자가 거의 마모되어 읽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수미왕사비가 있는 비각
 수미왕사비가 있는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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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대 들어 주지인 청신화상(淸信和尙)이 새로운 비를 건립하여 스님의 행적을 영원히 전하고자 했다. 그는 신미대사의 행장을 가지고 성총 스님을 찾아 다시 비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1633년 묘각화상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비명에 따르면, 스님은 도선국사로부터 이어진 도갑사의 선맥을 복구하여 크게 진작시킨 조선 불교의 큰 스님이다.

구산선풍 적막하여 문이 닫힐 때    禪風旣熄
묘각왕사 출현하여 다시금 진작,   王師重扇
폐허를 딛고 다시 일으켜 세우니   且復起廢
대법고의 메아리가 진동하도다!    鐘鼓大振
첫째도 묘각                              一則妙覺
둘째도 묘각                              二則妙覺
스님의 덕 영원토록 잊지 않고자   永備無忘
지극정성 돌에 새겨 비를 세우다!  宜乎勒石


태그:#왕인유적지, #도갑사, #해탈문, #도선국사, #수미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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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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