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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방학이 끝나고 드디어 개학을 했다. 올해는 2학년 여학생반 담임을 맡았다. 3년 만에 맡은 담임이라 설렘과 긴장이 교차되었다. 봄방학이 시작되던 날부터 하루하루 카운트다운을 하면서 아이들과의 첫 만남을 준비했다. 산을 오르내리며 내공을 다지기도 하고 틈틈이 교육관련 책도 읽었다.

 

'3월에 아이들을 잡아야 1년이 편하다.'

 

이 말은 아직도 학교사회에서 만고불변의 진리로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아이들을 잡을 생각이라면 굳이 고생해서 내공을 쌓거나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결국 나는 아이들을 잡지 않기 위해서 오랜 준비 기간이 필요했던 셈이다.      


3월 2일 오전 8시 50분.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이들이 나를 본체만체 한다. 그 시간에 교실에 들어올 사람이 담임일 게 뻔한 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실망할 것은 없다. 이미 예견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이 그렇다. 딱히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좀 그렇다. 나는 교탁에 출석부를 내려놓고 잠시 서 있었다. 조금 있으니 한 아이가 내 곁에 다가와 꾸벅 인사를 하더니 아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애들아,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야. 다 자리에 앉아."


그 아이는 내가 제 담임인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눈치다. 어쩌면 나의 성향까지도 이미 파악하고 있는 듯 했다. 귀엽고 고마운 아이다. 나는 그 아이의 이름을 알 것도 같았다. 방학 동안에 사진과 이름을 대조해가며 열 번도 넘게 아이들의 이름을 외웠기 때문이다. 차츰 긴장이 풀어지면서 마음이 환해지는데 여전히 몸을 뒤로 돌린 채 잡담을 하고 있는 아이들도 몇 눈에 띄었다. 나는 손뼉을 쳐서 주의를 환기시킨 뒤에 이렇게 입을 열었다.


"오늘 입학식이 끝나고 담임시간이 따로 있을 거예요. 그때 선생님과 천천히 인사하기로 하고 우선 간단하게 교실 청소를 한 뒤에 입학식 리허설 때문에 곧 바로 강당으로 가야합니다. 자, 그럼 청소를 시작할까요?"


아이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정물처럼 책상에 그대로 앉아 있거나 손뼉 소리에 잠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던 아이들의 고개가 다시 뒤로 돌아가 있었다. 아이들을 정물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뭔가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손뼉을 쳐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교실에 들어오기 전에 몇 번이고 마음 속으로 다짐을 했던 것이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들 앞에서 큰 소리를 치거나 화를 내지 않겠노라고 말이다.


교실 청소를 대강 마치고 아이들과 함께 입학식 행사를 위해 강당으로 향했다. 우리 학교 입학식은 좀 특별하다. 300여명에 달하는 신입생들의 이름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화면을 수놓는다. 신입생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겠다는 뜻일 터이다. 하지만 그런 감동의 순간에도 잡담을 일삼는 아이들이 태반이다. 그런 까닭에 입학식이 진행되는 동안 담임교사인 내가 할 일은 딱 하나다. 아이들이 참새처럼 지저귀지 못하도록 입을 봉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 일이 만만치가 않다.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고 눈을 세모꼴로 만들어 협박을 해도 그때뿐이다. 떠들지 않겠다고 손가락을 걸어 약속을 해 놓고도 돌아서기가 무섭게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는 아이도 있다. 그러다보면 슬슬 화가 치밀기도 하고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아,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잠시 호흡조절을 하기 위해 식장 밖으로 나갔다. 방학 동안 쌓아놓은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손수건을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하얀 종이가 한 장 따라 나왔다. 담임시간에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려고 준비해둔 '쪽지 통신'이었다. "쪽지 통신이 뭐야?" 하고 아이들이 궁금해할까봐 먼저 쪽지통신을 소개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쪽지통신이 뭐야?) 이런 쪽지통신 처음인가요? 사실은 저도 처음입니다. 방학 동안 여러분을 어떻게 만날까? 고민하면서 책을 몇 권 뒤적이다가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요. 참 편리하고 좋겠다 싶어서 시작해봅니다. 여러분도 새 학기를 맞이하여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았으면 합니다. 무엇이든 여러분이 행복할 수 있고 여러분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을.'

 


'쪽지통신'은 '이상대의 4050학급살림이야기(우리교육)' 책에서 따온 것이다. 3월에 아이들을 잡지 않고도 그들과 넉넉히 소통하기 위해서 고안해낸 것이다. 3월 2일자 쪽지통신에는 수업시간표, 청소구역 등 학기 초에 필요한 유용한 정보들이 수두룩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 반  급훈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실려 있다.   


'웃으면서 하자.'

 

올 한 해 동안 우리 반의 좌우명이랄까 행동지침 같은 것이 되었으면 합니다. (생략) '웃으면서 하자'는 말에는 두 가지 행동, 즉 '웃자'와 '하자'가 있습니다. 그 두 가지 모두 중요합니다. 올 한 해 동안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든 웃으면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성장을 위해 무언가를 열심히 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도 힘들어도 웃으면서 하겠습니다. 웃으면서 여러분의 바른 성장과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담임선생님이 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하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 하면서 1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허송하고 싶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웃으면서 해봅시다. 사랑합니다! 우리 반 파이팅!"


나는 때마침 나타나준 '쪽지통신'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소음의 진원지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곁에 와 있는 것도 모른 채 떠들고 있는 한 아이에게 다가가 이렇게 물었다. 


"네 이름이 뭐야?"

"단비인데요."

"단비야, 사랑해."


난데없는 사랑의 고백에 단비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 후에도 네 번이나 더 아이에게 다가가 사랑의 고백을 했다. 입학식이 끝나고 담임시간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오늘 선생님에게 사랑의 고백을 다섯 번이나 받은 사람이 있지요?"

"저예요, 선생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단비가 손을 번쩍 들고 대답했다. 아이의 스스럼없는 표정이 더 없이 건강하고 해맑아 보였다. 생명력이 넘치는 발랄한 아이였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이 무시로 떠들어대는 것도 저 어찌할 수 없는 생명력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스치듯 하면서 나는 단비와 아이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맞아. 오늘 단비가 입학식 때 너무 떠들었거든. 그러니까 조용히 하라는 말 대신 사랑한다고 말한 거야. 오늘 선생님 학교에 오면서 그런 결심을 했거든요. 절대로 여러분에게 화를 내거나 비난하지 말자. 조금 잘못해도 오늘은 첫날인데 좀 참아주자. 여러분을 믿고 기다려주자. 그렇다고 떠드는 것을 가만 둘 수는 없어서 사랑한다고 말한 거예요. 정말 사랑하기도 하지만. 단비야, 사랑해!"


단비의 표정이 재미있었다. 아니, 가슴이 뭉클했다. 천방지축 생기발랄한 아이의 숙연해진 표정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만약 내가 성급한 마음에 아이들을 잡으려고 했다면 그런 인간의 표정을 볼 수 없었으리라. 아이는 잠시 시무룩했던 표정을 풀더니 다시금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이렇게 내게 말했다.


"죄송해요. 앞으로 떠들지 않으려고 노력할게요. 선생님, 사랑해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본 매거진 3월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순천효산고등학교, #이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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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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