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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부터 풍문으로 나돌았던 신경민 앵커의 하차설이 현실화되고 말았다. 4월 13일 있었던 그의 마지막 클로징멘트가 작년 12월 31일의 그것과 비슷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그는 작년 말엽부터 자기가 곧 그만두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나보다. 이미 그는 "앵커를 오래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교체 명분은 시청률이 되겠지만 시청률은 늘 그만했으니 구실일 겁니다"(<시네21> 인터뷰)라고 말한 바 있다.

지난해 12월 31일 멘트와 마지막방송인 4월 13일 멘트

자기 말대로 그는 앵커를 오래하지 못했다. 그가 MBC 9시 뉴스의 진행을 맡은 것은 작년 3월이니 우리는 고작 1년 남짓 그를 보았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는 역대 어느 앵커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런데 무엇이 그를 1년짜리 단기 앵커로 만들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을까? 모름지기 이 두 가지 사연에 오늘의 시대가 압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MBC <뉴스데스크>를 하차하게 된 신경민 앵커가 13일 저녁 서울 여의도 MBC본사에서 자신의 마지막 방송을 마친뒤 뉴스센터를 나서고 있다.
 MBC <뉴스데스크>를 하차하게 된 신경민 앵커가 13일 저녁 서울 여의도 MBC본사에서 자신의 마지막 방송을 마친뒤 뉴스센터를 나서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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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 클로징멘트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는 원칙이 숨 쉬면서 곳곳에 합리가 흐르는 사회였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책임, 신뢰, 안전이었고 힘에 대한 감시와 약자배려를 뜻합니다. 내용을 두고 논란과 찬반이 있다는 점 알고 있습니다. 불편해 하는 분들에게 미안하지만 이 꿈과 소망은 바꾸거나 버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함께 가져야 하는 겁니다. 2009년 첫날인 내일 돌아오겠습니다."(2008년 12월 31일)

"회사결정에 따라 오늘 자로 물러납니다. 그 동안의 제 원칙은 자유, 민주, 힘에 대한 견제, 약자 배려 그리고 안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언론의 비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 답답하고 암울했습니다. 구석구석, 매일매일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 밝은 메시지를 전하지 못해 아쉽지만 희망을 품을 내일이 언젠가 올 것임을 믿습니다. 할 말은 많아도 제 클로징멘트를 여기서 클로징하겠습니다."(2009년 4월 13일)

하차를 예감했던 작년 12월 31일과, 하차가 확정된 4월 13일의 클로징멘트는 공통적으로 '민주'와 '힘에 대한 비판'과 '약자 배려'를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단어들에 그의 방송철학을 읽을 수 있다. 또한 두 클로징멘트는 이런 소중한 가치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거나', '불편해 하는'사람들을 지목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꿈과 희망'을 한사코 포기하지 않는다.

신경민 앵커가 하차한 이유는 그의 클로징멘트를 이해하려 하지 않거나 불편해 했던 사람들의 신경과민 때문이다. 그는 부단히 힘 있는 사람들의 신경을 자극한 것이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신 앵커를 일단 보내기로 하고 그의 클로징멘트들을 회상해 보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그의 하차에 대한 유감을 대신하고자 한다.

[클로징멘트#1]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납니다"

앵커 신경민이 MBC 9시뉴스의 진행을 맡은 것은 작년 3월이니 우리는 고작 1년 남짓 그를 보았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는 역대 어느 앵커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앵커 신경민이 MBC 9시뉴스의 진행을 맡은 것은 작년 3월이니 우리는 고작 1년 남짓 그를 보았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는 역대 어느 앵커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 MBC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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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이 서울로 돌아와 청와대 첫 밤을 보냅니다. 하지만 지척에 집회 소리로 조용하지는 않을 겁니다. - 박혜진 앵커 멘트) 이 대통령의 사과 담화대로 소통만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첫 진단부터 문제였는지 진심을 갖고 사람다운 사람과 소통해야 합니다. 시간도 넉넉해 보이지 않습니다. 출범 100일인 오는 3일과 9일 국민과의 대화를 기대해 보겠습니다."(2008년 5월 30일)

"(오늘 청와대 회견은 한 달 전 담화보다 훨씬 감성적이었습니다.'뼈저린 반성과 자책'이라는 표현과 또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들었다'는 부분이 그렇습니다. 이 뒷산 부분은 대통령이 직접 썼다고 합니다.- 박혜진 앵커 멘트) 쇠고기 부분에서는 담화와 비슷했습니다. 협상을 서둘렀음을 인정한 점이 달라졌습니다. 대운하는 사실상 포기로 들립니다. 다만 '국민이 반대한다면'이라는 단서에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납니다."(2008년 6월 19일)

"(이명박 대통령이 로스앤젤레스 주식 발언을 해 소란하자 오늘 청와대 관계자가 해명했습니다. 이로써 발언 소동이 한 차례 더 추가됐습니다.- 박혜진 앵커 멘트) 이번에도 안타까운 점은 청와대가 이미 카메라에 찍힌 발언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려고 애쓴 대목입니다. 조선과 중앙일보가 즉각 오늘 아침 사설에서 매섭게 비판한 점은 특히 눈에 띕니다."(2008년 11월 26일) 

위 세 글은 모두 '힘에 대한 비판과 감시'를 언론 본연의 임무라고 한 그의 말이 얼마나 어김없이 실천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힘 있는 사람들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이명박 대통령을 직접 겨냥하는데 별로 망설임이 없었다.

[클로징멘트#2] "법 공부한 사람 같지 않아 내일 다시 묻겠습니다"

"(한진희 서울경찰청장이 갑자기 바뀐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공식 설명은 피곤이 쌓이고 연말 정년퇴임을 앞두고 스스로 그만둔다는 겁니다.- 박혜진 앵커 멘트) 다섯 달도 안 돼 서울경찰청장 바꾸는 건 이례적인 인사입니다. 최근 한 청장의 집회시위 대응을 둘러싼 내외부의 평가 때문에 경질됐다는 관측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2008년 7월 22일) 

"(촛불집회 사건 몰아주기 배당에 대해 법원 고위층은 정상적이고 적법해서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고 공식으로 답했습니다.- 박혜진 앵커 멘트) 그렇다면 법원장과 수석 판사가 그 당시에 무작위 배당으로 바꾼 건 평판사들 힘에 밀려서 그랬다는 얘기입니다. 70~80년대 어두운 시절, 법원이 누가 알까봐 숨어서 몰래 배당한 것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법원 답변이 너무나 법 공부한 사람 같지 않아서 내일 다시 묻겠습니다."(2009년 2월 23일)

"(오늘 이 메일에서 사법부의 현재 모습, 배당에서 판결까지, 또 지방 법원에서 대법원까지가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 박혜진 앵커 멘트) 이상했던 시절의 이상한 사법부가 왜 2008년 이 시점에 다시 나타났을까요. 출세욕과 인사구조 때문에 계속 그래왔을까요, 또는 이번에 우연히 내 외부 여건으로 그런 걸까요? 답과 방안을 찾지 못한다면, 법원 간판만 바꾸느라 소란하다가 도로 사법부가 될 수 있습니다."(2009년 3월 5일)

위 셋은 이른바 힘 있는 사람들의 내면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봄으로써 그들의 공무 수행이 얼마나 사적이고 이기적인지를 알려 준다. 평소 무게를 잡고 권위를 부리던 사람들이 이런 보도 앞에서 여지없이 소인배로 전락한다.

이런 보도가 힘 있는 사람들을 얼마나 예민하게 만들지는 눈에 보듯 뻔하다. 아울러 이런 보도에는 민주정신과 상반되는 권위주의를 냉철히 압도해 버리는 기자정신이 구현되어 있다.

[클로징멘트#3] "오히려 악플러가 측은해 보입니다"

"(여대생 머리를 짓밟는 군화와 직사 물대포에서 공권력의 정당한 집행은 읽을 수 없었습니다. 경찰 수뇌의 다급함과 피곤한 전경의 화풀이만 보였습니다.- 박혜진 앵커 멘트) 이렇게 많은 열성 시민이 주말 새벽부터 밤까지 왜 그랬을까요. 만약에 배후가 있었다면 이런 시민을 동원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정부와 경찰이 아직도 디지털시대와 시민 분노를 이해하지 못 하고 7080식으로 대처했습니다."(2008년 6월 2일)

"(거액을 기부해 온 탤런트 문근영씨에게 악플이 달렸습니다. 이 악플은 문씨의 기부와 상관없는 고향과 외조부 내력까지 들춰내고 있습니다.- 박혜진 앵커 멘트) 이래가지고는 한국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악플러가 측은해 보입니다."(2008년 11월 17일) 

"(22년 전 오늘, 87년 6·10항쟁의 도화선이었던 박종철 군이 물고문을 받다 숨졌습니다. 그가 죽음으로 지킨 대학 선배 박종운씨와 또 진실을 캐낸 안상수 검사는 정치에 입문했고 고문 정황을 처음으로 폭로한 오연상씨는 의사가 됐습니다. - 박혜진 앵커 멘트) 그를 역사에 되살려낸 데는 바른 길과 진실을 추구한 신문과 재야가 있었습니다. 살아있다면 40대 중반, 그가 지금 우리 사회와 언론을 어떻게 평가할지 오늘 문득 정말로 궁금해집니다."(2009년 1월 14일)

위 세 클로징멘트에는 민중의 저항력에 대한 신뢰가 있는가 하면 이데올로기 대립의 비인간성을 보는 고뇌가 담겨 있으며, 민주화의 역정을 통시적으로 파악하는 안목도 깃들어 있다. 방송철학, 기자정신과 함께 높은 수준의 역사의식도 엿볼 수 있는 보도라고 본다.

신경민 앵커를 MBC 보도국장으로!

MBC <뉴스데스크>를 하차하게 된 신경민 앵커가 13일 저녁 서울 여의도 MBC본사에서 자신의 마지막 방송을 마친뒤 뉴스센터 주조정실을 나서고 있다.
 MBC <뉴스데스크>를 하차하게 된 신경민 앵커가 13일 저녁 서울 여의도 MBC본사에서 자신의 마지막 방송을 마친뒤 뉴스센터 주조정실을 나서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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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의 기자의 절대 다수는 신경민 앵커의 하차를 반대하고 있다. 기자들은 신 앵커 대신 오히려 그를 하차시킨 전영배 보도국장의 하차를 원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아이러니의 상황이고 바로 이 아이러니의 상황이야말로 곧 오늘의 언론 현실이 아닐까 한다.

엄기영 MBC 사장은 신경민 앵커의 하차를 발표하면서 권력의 외압은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권력 외압설을 제기하고 있다. 기자들은 특히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과 고교 대학 동문인 전영배 보도국장의 행태를 문제 삼고 있다. MBC 기자 96명 중 93명이 전영배 보도국장의 불신임안에 찬성했다고 한다. 이 정도라면 이유와 경위를 불문하고 그는 보도국장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신경민 앵커는 올해 벽두 "화면의 사실이 현장의 진실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KBS 텔레비전방송의 보신각 행사 화면 조작을 비판한 바 있다. 공교롭게도 이번 신경민 앵커의 하차는 발표된 사실과 이면의 진실이 다를 수 있음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남들은 앵커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그렇지 않아요. 저는 폭풍 치는 현장에 있고 싶고 보도를 지휘하면서 훌륭한 뉴스편집자가 되고 싶습니다."(1998년 <MBC 가이드> 초대석 인터뷰)

마지막으로 엄기영 사장에게 한 가지 제안한다. 기자 96명 중 93명으로부터 불신임을 당한 보도국장과 어떻게 일하려고 하는가? 마침 신경민 앵커는 보도를 지휘하는 뉴스 편집자가 되기를 원한다 하니 그를 보도국장에 임명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일이 아니겠는지 고려해 보기 바란다.

덧붙이는 글 | 필자 김갑수는 소설가로서 오마이뉴스에 역사팩션 <전쟁과 사람>을 연재 중입니다.



태그:#신경민, #보도국장, #엄기영, #클로징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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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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