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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의 나이에 나는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는데 몸뿐 아니라 마음도 헤매고 있었다. 어떤 이는 30대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는 40대에 대통령이 되기도 하는데, 나는 내가 일해 온 분야에서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 아니 회사에 손해만 잔뜩 끼친 채 물러나야 했기에 그 패배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내 분야에서 재기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무렵 문득 북한산이 내 눈에 들어왔다. 운명처럼, 도둑처럼, 연인처럼, 분신처럼, 또 다른 삶처럼 내 안에 북한산이 쓱 비집고 들어와 똬리를 틀었다."-난생처음 걸은 산성계곡 길

<백수 산행기>(부키 펴냄)의 저자 김서정은 산행보다는 등산로 입구 음식점에서 술 마시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회사 야유회 등으로 산에 따라가 등산로 입구 계곡에 앉아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힘들게 위에 가면 뭐가 있냐? 그러지 말고 계곡 식당에 앉아서 닭백숙에 막걸리나 한잔씩 하자고!"
"거봐. 다시 제자리로 올 걸 왜 그렇게 힘들게 갔다 와?"

저자가 백수이자 산행초보로 늘 바라봤을 북한산 의상봉 능선에서 본 고양시 북한동,삼송동,지축동, 원당 및 화정 일대(2009.2.15 북한산 의상봉 능선을 타면서)
 저자가 백수이자 산행초보로 늘 바라봤을 북한산 의상봉 능선에서 본 고양시 북한동,삼송동,지축동, 원당 및 화정 일대(2009.2.15 북한산 의상봉 능선을 타면서)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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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동료들 모두 하는 산행도 당연히 하지 않았다. 이런 김씨에게 어느 날 북한산이 눈에 들어  온다. 베란다에서도 쉽게 보일만큼 가까이 있던 북한산이건만, 산에 간다는 사람을 뜯어말리는 편이니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다가 불쑥 눈에 들어 온 것이다.

백수가 되어 집에서 뒹구는 것도 이젠 지쳐버린,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도 별 신통한 확답을 듣지 못해 스스로 지치고 무료한 김씨는 북한산으로 향한다. 근처 할인마트에서 구입한 가장 싼 등산화와 등산복. 김밥 한 줄과 오이 몇 개가 든 까만 비닐봉지와 생수 한 병이 김씨의 첫 등산 차림이다.

오랫동안 산과는 담을 쌓고 살았고, 깡말랐던 청년기와 달리 살도 많이 쪄서 산행이 쉬울 리 없다. 게다가 몇 달 전에 허리까지 다쳤으니 오죽하랴. 앞에서 누가 오거나 뒤에 누가 오는 것 같으면 지레 주눅이 들어 비켜서기 일쑤다. 작은 바위라도 오르려면 어설픈 자신을 누가 구경하나 싶어 두리번거리는 것이 먼저다.

'살기 위해 살을 빼야하니 죽기 살기로 어쩔 수 없이 산행을? 안됐다!'

이와 같은 동정과 멸시의 눈길을 느끼기도 하면서 산행초보 김씨는 남들이 30분 걸렸다는 길을 2시간 만에 간신히 도착한다. 그런데 천만 다행스럽게도 김씨는 이 어려운 산행에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산에 가려고 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며칠 후 김씨는 나 홀로 산행을 한다. 이유는 없다. 누군가와 동행을 할 자신이 도저히 없기 때문이다.

<백수 산행기>겉그림
 <백수 산행기>겉그림
ⓒ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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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산행기>는 이처럼 산(행)과는 전혀 상관없던 김씨가 어느 날 북한산을 만나기 시작, 5년이 지난 지금 정반대의 삶을 살기까지의 산행초보 어느 날들을 고백하고 있는 책이다. 일종의 산행지침서라고 할까? 아니 산행 초보자의 산행 체험 극복기라는 말이 더 옳겠다.

최근 몇 년 동안 등산 인구가 참 많이 늘었다고 한다. 때문인지 산행관련 지침서들도 참 많다. 하지만 이런 지침서들이 담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책이나 인터넷 정보를 통해 쉽게 얻을 수 있는 산행코스(지도), 가는 방법, 등산 정보 등 표현만 다른 비슷한 정보들이기 일쑤다.

천편일률적인 이런 정보들은 산행초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백수 김씨처럼, 지난해 가을부터 산행을 시작한 나와 같은 사람들은 등산 지도 보는 것부터 워낙 서툴기 때문이다. 어떤 대중교통을 이용해 그곳으로 가야하는지도 짐작할 수 없기 일쑤, 산에 접근이 쉽지 않으니 이런저런 정보들이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김서정의 <백수 산행기>는 5년 전만 해도 산행하는 사람들을 나서서 말리던 저자가 우연히 산행을 시작하고 터득한 것들을 들려주는 것이라 산행 시 참고할 수 있는 살아있는 정보들이 많다.

때문에 그 어떤 정보들보다 활용도가 훨씬 높을 것 같다. 북한산의 수많은 능선들의 특징과 그 길에서 주의할 것,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은 길, 산행 때 반드시 필요한 것과 주의할 것, 대중교통편과 산행시작 지점 등을 자세하게 알려주고 있는데, 산행초보인 자신이 그 길을 만날 때의 상황과 극복과정 등 자신의 체험으로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김신조 때문에 군부대가 들어섰다는 우이령쪽을 보았다. 우이령은  길 모습이 소의 귀를 닮아서 그렇게 부른다고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 길을 우이령으로 부른 것은 아니다. 양반들은 주로 '우이령'으로 불렀고, 일반 백성들은 말 그대로 '소귀 고개'라고 불렀다. 한때는 북한산을 소귀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삼각산은 양반 계급이 즐겨 썼고, 북한산은 일반 백성이 즐겨 부르던 이름으로, 이 두 이름과 더불어 소귀산도 북한산을 부르는 이름 가운데 하나였던 모양이다.

혹자는 소귀산이라는 이름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삼각산을 그냥 쉽게 풀어서 삼각산-세귀산-소귀산으로 부른 것이라고 한다. 삼각산보다는 세귀산이, 세귀산보다는 소귀산이 발음하기 편하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물을 부르는 이름도 사는 형편에 따라 달랐던 것은 분명하다. 도성의 문을 두고도 양반들은 '숭례문'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백성들은 모두 남대문으로 불렀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은 남쪽에 있는 문이니까 남대문이라 부르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책 속에서

이 책을 읽는 동안 톡톡히 얻는 또 다른 즐거움은 그 산에 얽힌 이야기와 지명 유래 등의 상식들이 많다는 것이다. 여성봉이나 상장봉에 얽힌 이야기, 김신조 바위나 동굴, 보현봉이나 문수봉 등의 불교식 북한산 봉우리 등을 또 다른 즐거움으로 만날 수 있다. 

북한산성매표소-의상봉-용혈봉-증취봉-나한봉에 이르는 의상봉 능선에서, 자세히 보면 능선 위의 사람들이 보인다.(2009.2.15)
 북한산성매표소-의상봉-용혈봉-증취봉-나한봉에 이르는 의상봉 능선에서, 자세히 보면 능선 위의 사람들이 보인다.(2009.2.15)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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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실감나게 읽은 이유는 저자와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에 사는 나 역시 저자처럼 북한산을 풍경으로만 바라보다 저자가 5년 전에 그랬듯, 어느 날부터 '나를 살려줄 고마운 은혜'로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도 이미 톡톡한 어려움을 감수하며 올랐던 그 봉우리들을 저자 역시 고생고생하며 오르고 있기에 동병상련까지 느꼈다고 할까?

같은 아파트 사람들이나 산에서 마주친 사람들에게 평일 날 산에나 가는 백수 김씨였던 저자 김서정은 이제는 그때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이제 그는 산행을 시작하던 그때보다 20kg 가량 덜어내 훨씬 날렵해진 몸으로 자신의 일을 하는 틈틈이 '북한산 고객만족 모니터링단' 활동 등 북한산을 오르는 또 다른 사람들의 지침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요즘 같은 경제 불황에 40대 가장의 실직은 엄청난 삶의 시련일 것이다. '실직'이라는 인생의 암흑기에 시작한 산행은 저자에게 자신을 돌아보거나 새로운 삶을 구상하는 원동력이 된다. 저자는 때론 재미있게 때론 자조적으로 자신의 마음속 이야기를 북한산 산행에 녹여 들려준다. 저자처럼 삶의 암흑기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젊은 날의 좌절로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산에만 갔다 오면 글을 쓰고 싶었다. 글을 쓰는 동안 산을 한 번 더 느낄 수 있어서였다. 어느 날 나는 북한산 산행기를 체계적으로 쓰고 싶어졌다. 그게 북한산에 대한 예의 같았다. 산행기를 쓰다보니 역시 문제는 길이었다. 얼마만큼 길을 많이 아느냐가 산행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중략)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산을 어떻게 바라보고, 타느냐 하는 문제였다. 나는 전문 등반인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말도 하지 않겠다. 다만 북한산이 있어 참 행복했고, 북한산은 없어지지 않기에  앞으로도 나는 행복할 것이라는 말만 하련다. 북한산은 내 영원한 친구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이 책을 읽고 북한산과 친구가 되었으면 한다. -작가 후기 중에서

덧붙이는 글 | <백수 산행기>-평일에 산에 가는 나, 나도 정상에 서고 싶다(김서정 씀/부키/2009.1/\11000)



백수 산행기 - 평일에 산에 가는 나, 나도 정상에 서고 싶다

김서정 지음, 지만 그림, 부키(2009)


태그:#북한산, #산행기, #등산, #지침서, #산행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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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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