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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에 살며 선물을 받아보면 감명이 새로워진다. 선물이 뭐가 되었든 한참 머릿속에 각인되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대보름을 맞이하여 선물 세트 몇 개를 받아들고 고마운 사람들을 향해 한참이나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카페회원이 보내온 참치통조림 박스, 여기저기서 답지한 신년하례 엽서, 남쪽에 산다는 제자는 복조리를 보내왔다. 복조리는 보기 드물고 신기해 이리저리 돌려가며 구경도 하고 무슨 복을 집어넣으면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돈, 쌀, 복권은 어떨까.

복조리
 복조리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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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갑자기 온 몸에 봄빛이 물들어왔다. 눈도 얼굴색도 수선화만큼이나 노란빛이었다. 이른 봄에 제일 좋아하는 복수초와 수선화 색깔 그대로였다. 얼굴은 물론, 가슴, 눈알까지 노란 꽃이 피어올랐다.

그 옛날 나르시스가 연못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정신을 잃었듯 거울을 보며 별 환한 색도 다 있구나 싶어 보고 또 보았다. 아름다운 색이어서 봄이 오길 고대하다 보니 선물을 주나보다 했으나 한유하게 감탄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황달(黃疸)이라 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무서운 병이라 했다. 웃고 있기엔 시간을 다투는 악성으로 지체하면 흑달로 전이돼 생명이 위태롭다 했다. 동네병원에선 어려우니 어서 큰 병원으로 가라 채근을 해댔다.

봄의 전령사 수선화. 얼굴과 눈알빛이 황달물이 들어 수선화 색깔을 닮아갔다.
 봄의 전령사 수선화. 얼굴과 눈알빛이 황달물이 들어 수선화 색깔을 닮아갔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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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병원 응급실, 사람들로 난장판이다. 웬 아픈 사람이 저리도 많은지… 접수를 했으나 쉽게 차례가 오지 않는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금식에 피 뽑고, 혈압 재고, 엑스레이 찍고, C.T 촬영… 결과는 간이 뿔났단다. 간덩이와 담도가 붓고 쓸개즙이 막혀 담즙을 걸러내지 못한다 했다. 담도가 퍼져 황달이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겁을 덜컥 주었다.

영상실, 마취를 해 담도에다 대롱을 박는다 했다. 생명이 위태로울지도 모르니 담도 시술을 하는 동안 만약의 사고에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승인 사인을 하라 했다. 지켜보던 며늘아기가 ‘아버님, 어느 병이라도 다 고쳐드릴 터이니 용기를 잃지 마시라’며 손잡아 기도를 올리고, 옆 지기는 큰 눈에 눈물방울이 그렁했다.

복조리에 복을 담을까, 오복은 壽, 富, 康寧, 유호덕, 고종명이라하던데...
 복조리에 복을 담을까, 오복은 壽, 富, 康寧, 유호덕, 고종명이라하던데...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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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도 좋으니 무사하기만 바랐다. 잘못되어도 억울할 게 하나도 없는 삶이라 다짐하니 마음이 편안해왔다. 마취중인데도 간 밑을 뚫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왔다. 그냥 ‘무사해지이다, 무사해지이다’ 하느님, 부처님하고 헤매다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살아있었다. 몸은 나른해 녹초였으나 그냥 ‘고맙습니다’를 연발했다.

어쩌다 이리 되었누. 술이 원인인 것 같다 했다. 그랬다. 오래 전부터 고지혈과 지방간 수치가 높아 예보된 터였다. 어제까지 소맥을 타 밥 대신 반주를 하지 않았던가. 하룻밤을 꼬박 새워 응급병동 4인실로 옮겨왔다. 그것도 행운이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며칠을 기다려야 병실 차지가 돌아온다 했다. 

귀농하여 십오 년을 황토방에서 신선처럼 산 몸이 생전 처음 병원에 실려와 생활을 하려니 적응이 쉽지 않다. 흰 죽을 주었다. 하얀 죽. 얼마 만에 먹어보는 죽인가. 어릴 적, 배가 아프면 엄마가 끓여주던 하얀 죽, 한 숟갈 목을 넘겼으나 옛날 그 맛이 아니다. 수저를 놓고 말았다.

잠을 자려니 환자와 보호자까지 여덟이서 연방 화장실을 들락날락, 싸놓고 물 빼는 소리에 귀가 사납고, 형광등 불빛은 대낮처럼 밝아 눈이 시리다. 잠이 들라하면 옆에선 콜록, 앞에선 신음소리, 간호사가 혈압과 체온을 잰다며 들락거리고… 잠을 잘 수가 없다.

며칠을 기다렸으나 대변 소식이 없다. 마취, 약 투입에 잠 못 이뤄, 담즙을 빼내자니 신진대사작용이 원활하다면 정상이 아니다. 변비가 온 것이었다. 어쩌면 좋을꼬. 힘을 주나 아래는 막히고 위에선 내리 밀고… 딱하기 그지없다. 노란 얼굴에 큰 것을 빼내려고 힘을 쓰다 보니 하늘이 점점 더 노래질 수밖에… 또 가여운 목소리로 하느님, 부처님을 불러댔다.

일주일 만에 간장약, 변비약, 수면제 한보따리를 싸들고 퇴원해 북한강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쪽빛강물이 파랗다. 봄이 오려는지 하얀 물안개가 가물거리고 따사로운 봄볕이 긴 강나루를 건너가고 있다. 눈물이 찔끔, 하느님, 부처님, 고맙습니다.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를 또 연신 해댔다. 살아있다는 것이 이리 고마울 줄이야.

일주일 병원에 있는 동안, 먹고 자고 싼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복인지 새삼 절실하게 느꼈다. 평소에 잘 먹고 자고 쌀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한 복이 어디 있을까 싶다. 누구는 인생삼쾌(人生三快)라 하고, 오복에다 이 세 가지를 더 넣어 팔복을 만들어야 된다고 했다.

복대신 간장약을 넣어놓고 뿔난 간을 달래고 있다.
 복대신 간장약을 넣어놓고 뿔난 간을 달래고 있다.
ⓒ 윤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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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조리마다 돈과 쌀, 복 대신, 먹다 남은 간장제와 수면제, 변비약, 진통제를 한 알씩을 넣어놓고 혼자 웃는다. 이 봄과 함께 올 한해도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게 해달라고 특별 복을 빌어본다.

그동안 아껴두었던 양주, 와인, 보드카와 겨우내 쌓아놓은 빈 소주병들을 모아 고물장수에게 얼른 실려 보냈다. 봄이 오려나. 아까부터 산수유나무 속이 시끄럽다. 참새 떼들이 몰려와 짝짓기가 한창이다. 

덧붙이는 글 |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 북집네오넷코리아, 정보화마을 인빌뉴스에도 함께합니다.

- 퇴원한 지 2주일 정도 간도 뿔을 멈추고 황달도 서서히 내려 제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이 고마울 뿐입니다.



태그:#복조리, #황달, #오복, #인생삼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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