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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뀔 때마다 해 보던 다짐들이 왠지 민망했다. 누구 보라고 하는 다짐이 아니니 드러 내놓고 하진 않았지만, 잘 지키지도 못하는 다짐들을 올 해 또 반복하려니 스스로 자신에게 낯이 뜨거워 밍기적 밍기적 그냥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뜻하지 않은 새해 다짐을 하게 되었다.

작년 말에 누리터서점에 신청한 책이 한 보따리 왔는데 제일 먼저 송경용 신부님의 <사람과 사람>을 읽어 나가다가 너무도 죄송스런 마음이 들어 책장을 계속 넘길 수가 없었다.

이런 분의 책을 그냥 맹숭맹숭 읽는다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 정도로 그분의 삶과 생각이 감동이 되었던 것이다.

 

그 순간 떠 오른 생각이 있었다. 두 가지였다. 하나는 올 해 생활일지였고, 다른 하나는 전날 나무하러 산에 갔다가 보고 왔던 작은 상수리 나무였다.

 

새해 달력은 물론 일지도 못 구하고 있던 차에 아는 분께 회사에서 나오는 일지가 여분이 있으면 구해 줄 수 있느냐고 부탁을 했었는데, 가능하다고 했던 기억이 나면서 일지 하나라도 괜히 축내는 인간이 되지 말자 싶었던 것이다.

 

잘 보관하고 있던 1995년도의 생활일지가 생각났던 것이다.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만든 일지인데 굵은 쇠로 종이를 꿰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종이만 새로 끼우면 재활용해 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표지도 튼튼한 가죽으로 만들어 감촉도 좋고 해지지도 않았다.

 

그 중 제일 돋보이는 것은 안철환 이사님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24 절기력>이었다. 1년을 24절기로 나누어 농사력을 만든 것이라 절기에 따른 농사요령이 잘 나와 있고 뒤에 실려 있는 각종 '유기농업 재배력'과 생명단체나 환경단체의 연락처는 여전히 쓸 수 있는 것들이었다.

 

대부분의 일지들이 이처럼 뒤에는 필요정보들이 붙어 있는데 지도나 지하철 안내도 등은 여전히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다 버리고 새 일지를 쓰는 것이 현실이다.

 

귀농운동본부의 일지 크기에 맞게 작년에 쓴 일지에서 종이 남을 것을 잘라내고 펀치로 구멍을 뚫었다. 구멍이 여섯 개나 되어서 정확한 위치를 자로 재서 뚫는데 한두 번 엇갈렸지만 곧 정확하게 구멍을 뚫어내는 재미가 있었다.

 

제일 편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1년 동안 적어 놓은 연락처들이었다. 매년 연락처를 옮겨 적느라 애를 먹었는데 구멍만 뚫어 끼워 넣으니 끝이었다. 연락처를 적는 난이 다 차면 종이를 필요한 만큼 끼워 넣으면 되는 것이다. 몇 년이고 이어서 쓸 수 있게 되었다.

 

내년에는 올해 쓴 일지들은 빼 내고 종이만 새로 끼워 넣어 쓰면 될 것이고 빼 낸 일지들을 잘 보관해 두면 좋은 개인 역사책이 될 것도 같았다.

 

일지의 맨 앞에 있는 월별 기록장은 엑셀프로그램을 이용해서 크기에 맞게 만들었다.

 

접히는 부분에 여백을 충분히 주고 인쇄를 했더니 한 번에 성공이었다. 내 마음에 딱 맞는 모양새로 만들어 넣으니 크게 만족스러웠다.

 

두 번째 떠 오른 생각에 따라 산으로 갔다.

 

당시에도 누가 어떤 이유에서 그랬는지 도무지 짐작을 할 수 없었는데, 이유야 어쨌든 나무를 잘록하게 파고 들어간 나일론 끈을 잘라냈다. 아예 문구용 면도칼을 가지고 가서 의사가 수술하듯이 나무가 안 다치게 조심스레 한 올도 안 남기고 나일론 끈을 풀어 낼 수 있었다.

 

다시 나무가 숨을 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라도 하고 나니 비로소 새 해를 맞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태그:#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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