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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간 인질피랍사태를 겪으면서 한국교회의 선교 방식을 둘러싸고 사회의 비판적 눈길이 따갑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자성론이 일고 있다. 타인의 의식과 문화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따르지 않는 타 국가에서의 공격적인 선교 방식은 예수님의 뜻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의 반발만 불러 일으켜 선교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번 일로 말미암아 한국 기독교계는 선교 대상 국가의 사람들 보다 오히려 한국 국내에서 더 많은 비판에 부딛쳐야만 했고 그런 까닭에 어쨌든 반성하는 모양새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런 와중에서도 보수적인 기독교계 일각에서는 탈레반과 한국정부의 협상 내용에 불만을 표시하며 이러한 방식의 선교를 계속하겠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서 또 한 번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다보니 비판자들 중에서는 기독교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성론에 대해서조차 이번 사건에 대한 사회적 비난을 일시적으로 피해보고자 하는 면피용 태도일 것이라는 의구심조차 제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 반성적 성찰이 해외 선교에 국한되어서는 안 될 것임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제의 본질로부터 파생되는 하나의 양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의 선교도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불신지옥, 예수천국’이라고 외쳐대는 극단적인 교단과 그 신도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겠지만 다른 믿음에 대한 일반 기독교계의 배타적 태도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심지어 그것은 타종교에 대해서 만도 아니다. 교회에 얼마 다니지 않았고 성경이나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사람들도 곧잘 ‘이단’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어느 교단은 이단, 또 어느 교단은 이단이라고 쉽게 말한다. 어떤 좀 잘 알려지지 않은 교단, 소수파 교단 이름을 대면 대뜸 하는 이야기가 그 교회 ‘이단’ 아니냐고 한다. 그래서 이단은 대부분 국내에서 교세가 약한 소수파들이다. 그리고 이단에 대한 태도는 보다 더 공격적이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선교와 설득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잘못된 믿음을 가진 자’들은 비난과 공격의 대상으로 쉽게 간주되기 때문이다.

 

자기의 믿음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타인의 믿음에 대한 절대적 불신과 불관용을 핵심으로 하는 배타적인 의식과 태도가 결국 이런 사고방식과 행위를 가능케 하고 그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다른 믿음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가 마치 굳건한 신앙의 표상이 되고, 유화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는 믿음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되는 한국교회 문화가 그 토양이 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배타적·폐쇄적 집단주의는 교회 안과 밖의 원활한 소통을 막아 교인 사회를 건전한 공동체가 아닌 자기만의 이익을 좇는 패거리로 고착시키고 있다. 

 

그런데 사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런 배타적 집단주의, 패거리 문화는 우리 사회에서 비단 기독교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서 만연화 된 이런 의식이 기독교단이라는 조직 속에서 신앙이라는 믿음체계를 통해 보다 특징적인 외양을 띠고 나타나기 때문에 두드러져 보이는 것일 뿐이다.

 

이번 인질 사건을 두고 기독교에 대해 비난한 상당수의 사람들도 그들이 한국 기독교를 규정했던 것과 똑 같은 방식과 행태로 기독교를 공격했다. 처음 인질 사태가 나자 평소 한국 기독교단에 좋지 않은 감정들을 가진 사람들 중 일부는 인터넷 공간을 통해 또 다른 하나의 패거리를 형성하여 그동안 쌓였든 감정에 대해 화풀이라도 하듯 섬뜩할 정도로 기독교와 납치된 인질들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들을 쏟아 부었다. 그간 조직화된 기독교단에 비해 뿔뿔이 흩어져 약자였던 그들이 일시에 강자의 지위에 올랐다. 인질들로 잡힌 사람들의 인격과 생명의 존엄은 무참하게 뭉개졌다. 당해도 싸다는 것이었다. 불신하는 사람들이 지옥에 떨어져도 싼 것처럼….

 

이런 배타적 집단주의, 패거리 의식과 문화는 심지어는 진보적인 단체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한국에서의 대표적 진보적 단체 중의 하나인 민주노동당의 게시판을 한번 죽 훑어보더라도 곧 드러난다.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집단(각 정파)과 사람에 대한 태도는 우리 사회 다른 부분에서 나타나는 양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때론 더 험악하다. 교회에서 다른 신앙에 대한 배타적 태도가 신앙의 증표가 되듯이 진보적 단체의 각 정파에서도 이런 태도가 사상적 견결성의 증표가 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지식 사회 일각에서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진지한 반성적 성찰들을 해보자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 어떤 이는 똘레랑스를 이야기하고(홍세화) 또 어떤 이는 관계론을 이야기 한다(신영복). 그러나 반향은 그다지 큰 것 같지 않다. 그냥 듣기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실천 내용들을 담지 못하고 있다거나 공자님 말씀 같은 소리라는 것이다. 그 보다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날선 공격적 언사들이 훨씬 더 위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이 장밋빛 미래에 대한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국민 소득이 수만 불이 되고 산업 대국이 된다고 국민들이 진정으로 행복해질까? 생각이나 처지가 다른 집단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에서는 결국 생산력 발전에 의해 형성된 엄청난 부(富)들이 소수의 힘 있는 자들의 몫으로 떨어지고 이로부터 소외된 자들은 분노만 쌓아갈 게 뻔할 텐데 말이다.       


태그:#인질피랍, #패거리 문화, #똘레랑스, #배타적 집단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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