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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여 년 전 일이다. 그때가 87∼88년쯤이었을까? 집값이 전세금보다 쌌을 때가 그때였다. 그때 우리는 13평짜리 주공 아파트에 전세를 살고 있을 때였는데 집주인이 전세계약 만료 며칠 전에 전세금을 올리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전셋돈 천만 원에서 이백만 원을 올리겠다는데 기가 찼다. 기세등등하게, 재계약을 하든지 이사를 나가든지 양단 간에 택일을 하라는 주인의 최후통첩을 받고도 사정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집주인이 마음껏 배짱을 부릴 만큼 전세 구하기가 집 사기보다 어려웠으니 사정이 먹히겠는가.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할 수 없이 집을 사기로 했다. 한 달에 사만 몇 천원 들어가는 부금이 부담스러워 전세를 고집했지만 전세금보다 집값이 백만원이 더 싸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남편 명의 아닌 내 명의로 집 등기를 하겠다고 통보한 두 가지 이유

울며 겨자 먹기로 내 집 마련을 했을 때, 집 명의는 내 이름으로 등기를 하겠다고 남편에게 통보를 했다. 사실 결혼 후 처음 마련한 내 집인데 기분 좋게 남편 명의로 해주거나 그도 아니면 공동 명의로 하는 게 마땅했지만 내 명의로 하고 싶은 속셈이 따로 있었다.

내 명의로 등기를 해서 주변에 보증인 못 구해 애를 태우는 지인들에게 마음껏 보증을 서주고 싶은 마음. 지금 생각하면 참 세상물정 모르고 뜨거운 국물 맛을 모른 철부지였구나 싶지만 그때는 그것이 제일 하고 싶은 것이었다.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금융권에서 신용대출을 받을 때 보증인을 세우라는 주문만큼 괴로운 경우가 없다. 월세보다 은행 이자가 더 싸 대출을 받아 전세를 얻으려고 했을 때였다.

은행에서 오백만원을 빌리려는데 무려 두 명의 보증인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한 명은 우리 친정 엄마를 세우면 되겠는데 나머지 한 명이 문제였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가까운 친구 중에 제 집을 가진 사람이 흔치 않았다.

또 집을 가졌다 해도 명의가 남편 앞으로 되어 있으면 부탁하기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안정된 직업이라도 있으면 보증서는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덜 안겨줄 텐데 우리는 언제 감옥으로 들어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잘못 하다간 덤터기 쓸지도 모르는 상황에 막역한 사이 아니면 보증을 부탁하는 자체가 큰 실례였다. 그때 보증인을 찾는 데 얼마나 힘들었던지 내 집을 사면 꼭 내 이름으로 등기해 맘껏 보증을 서주겠다는 야무진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드디어 그 꿈을 이룬 것이다.

하여튼 내 명의로 해서 '솔찮이' 보증을 서줬지만 다행히 빚을 떠안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맘껏 보증 서주겠다는 마음, 그리고 또다른 이유는 바로 '피난처'

두 번째, 부부싸움을 하고 뛰쳐나왔는데 딱히 갈 곳이 없는 막막한 지인들에게 내 집을 잠시 동안의 피난처로 제공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이것도 체험에서 우러나온 희망사항이었는데 내가 겪고 보니 막상 갈 곳이 너무 없더라는 것이다. 남편 때문에 너무 열 받아 무작정 뛰쳐나오긴 했는데 돈도 없고, 갈 곳도 없고 참으로 막막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가 89년도였던가? (유일무이한 가출이라 연도까지 기억난다) 내 성질에 못 이겨 가방만 하나 들쳐 매고 뛰쳐나오긴 했는데, 밤 12시가 조금 넘어 버스도 끊어진 상태지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이었다. 지갑을 열어보니 만원 조금 넘는 돈이 들어 있었다.

집 가까이 사는 지인들이 있었지만 자정 넘은 시간에 그것도 부부싸움 하고 뛰쳐나온 상태로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를 수가 없었다. 일단 택시부터 탔다. 택시를 타기는 했는데 어디로 가자고 해야 하나?

머릿속에 떠오른 대로 집에서 제일 가까운 영등포역으로 가자고 했다. 자정이 넘었지만 역 주변은 불빛도 휘황하고 사람들도 분주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무섭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룻밤 숙소가 그 근처 여관 아니면 갈 곳이 없었다.

으슥한 여관에 그것도 여자 혼자서,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가장 만만한 게 친정 아니면 동생집인데 야밤에 집을 나온 몰골로 찾아가면 부모형제가 얼마나 놀랄까 생각하니 그도 못 할 일이었다.

역 안에 들어가 어슬렁거리자니 열차시간 안내표에 마침 새벽 1시 즈음에 부산까지 가는 무궁화 열차가 있었다. 부산까지 요금이 9천원 조금 넘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에휴, 자더라도 여관 보다는 열차가 낫겠다 싶어 나중엔 삼수갑산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표를 끊고 보기로 했다.

부산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여튼 제일 시간이 길어 타고 봤는데 주중 그것도 새벽 기차니 승객이 별로 없었다. 내가 탄 객차에 손님이 고작 서너 명. 에라 모르겠다. 의자 두 칸을 차지하고 완전 대자로 뻗어 실컷 잠을 잤다.

새벽에 부산 역에 떨어지니 또 갈 곳이 없었다. 어찌 갈 곳뿐이랴. 지갑을 탈탈 털어보니 천 몇백 원이 남은 상태였다. 내 특기가 평소 땐 멍청하다가도 위기일발에는 순발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새벽에 문 여는 곳. 목욕탕밖에 없었다. 그 즉시 목욕탕으로 달려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밖으로 나왔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돈 꾸는 전화를 이른 아침부터 때릴 수는 없지 않은가.

친구 남편이 출근을 하고 나서도 충분한 여유를 준 뒤 전화를 했다. 자존심에 부부싸움 끝에 돈도 없이 가출을 감행했다는 말은 하기 싫어 적당히 둘러댔다.

"야, 내가 갑자기 부산 내려올 일이 생겨 오긴 했는데 돈이 없다. 그러니까 은행 문 열자마자 내 통장으로 십만 원만 부쳐다고."

친구가 보내 준 돈으로 부산으로, 진주로, 지리산 등반까지…. 3박 4일 신나게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영등포 역에서 갈 곳은 없지, 여관은 싫지 얼마나 막막했는지 나중에 여건이 되면 내 집을 나처럼 답답한 지인들의 피난처로 제공하리라 꿈 한 자락을 숨기게 되었다.

가출 하고 싶을 때 쉽게 갈 곳 있다는 것 얼마나 큰 '빽'이냐!

지방으로, 그것도 휴양하기 딱 좋은 한적한 시골로 이사 왔을 때 친구, 선후배들에게 이사 신고와 함께 "부부싸움을 하거나 마음이 시끄러워 집을 나오고 싶을 때 언제든지 오라"고 사정없이 광고를 해댔다.

아무리 시골이라도 부부가 함께 사는 곳이라면 마음 편하게 찾아오기 힘들지만 우리는 주말 부부라 나 혼자 살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조건이냐. 생각보다 부부싸움 하는 지인이 적었든지 놀러 오면 놀러 왔지 피난처로 오는 지인은 없었다. 하지만 가출은 하고 싶을 때 쉽게 갈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빽'이냐?

후배가 전화를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속이 시끄러워 내려오고 싶은데 가도 되냐는 전화였다. 물론, 대환영을 했다. 언제든지 내려와서 남도순례도 하고, 수다도 떨면서 시간을 보내자고 그랬더니 그렇게 행복해한다.

누추하지만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사랑방 같은 곳, 후배가 오기 전 집 청소도 하고 마당의 꽃도 손보면서 새삼 흐뭇하다. 이럴 땐 우리 집이 어느 동네든지 꼭 있게 마련인 한 그루 느티나무 같다. 드넓은 품새로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의 쉼터가 되어 주는 느티나무.

태그:#등기, #부부싸움, #빚보증, #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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