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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위에 사람이 있다. 집을 짓고 있다. 위태위태하다. 앞쪽의 불교사원엔 빨래가 당연하게 걸려있다. 프놈펜 시내 곳곳엔 많은 불교사원이 있다.
▲ 집짓기 저 위에 사람이 있다. 집을 짓고 있다. 위태위태하다. 앞쪽의 불교사원엔 빨래가 당연하게 걸려있다. 프놈펜 시내 곳곳엔 많은 불교사원이 있다.
ⓒ 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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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놈펜 도착 첫 아침이다. 아침 산책과 식사를 부랴부랴 끝내고, 앞으로 머무를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나섰다. 먼저 캄보디아 현지 인터넷 사용과 전화통화를 위해 근처 편의점에서 유심칩을 구입(7$)했다. 편의점 직원의 도움으로 장착한 후, 한 통의 전화를 걸었다.

쏘티 그가 받았다. 한국에서 4년 10개월 동안 일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그가, 우리가 만날 첫 번째 친구다. 저녁 약속을 잡고, 호텔에서 받은 지도와 인터넷 정보를 이용하여 강가 근처의 게스트하우스 밀집 지역을 찾아보기로 한다. 여행객으로 가득한 나라답게, 주요 도시의 무료 관광책자가 튼실하다.

책자는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 여행자 안내소에서 받을 수 있다. 보통 캄보디아 여행은 앙코르와트가 있는 씨엠립을 중심으로 하거나, 인도차이나반도(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등)를 여행하기 때문인지, 프놈펜 단독 여행 정보는 생각보다 찾기 어려웠다. 지도에서 게스트하우스가 잘 안 보인다. 아예 체크아웃을 하고 본격적으로 찾아나서기로 한다.

캄보디아 사람은 게으르다?

아침 산책 중에 만난 그들. 평화롭다.
▲ 불교사원에 사는 아이들과 고양이 아침 산책 중에 만난 그들. 평화롭다.
ⓒ 김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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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사이드로 향했다. 어느 여행기서 이쪽에 게스트하우스가 밀집해 있다고 하더니만, 도통 찾을 수가 없다. 뜨거운 태양 아래 큰 배낭을 메고 한참을 걷다가 지쳐버린다. 일단, 저 멀리 보이는 자몽(Grape fruit, 1$)을 먹으며 쉬기로 했다.

한국에서 혹한의 영하 기온을 온몸으로 버티다가 하루만에 32도의 열기를 받아들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길가에 쪼르르 앉아 열대과일의 기운을 만끽하고 있자니, 자전거 고치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방인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자전거를 가리키며 한바탕 영어를 퍼붓고 어디론가 간다.

'여기서 빌렸는데 고장이 난 건가?' 하면서 지켜보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뒤집어놓고 뭐가 문제인지 한참을 상의하다가 바로 세운다. 되돌아온 여자는 여전히 자전거가 이상하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다시 자전거를 맡긴다.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녀는 프놈펜에 6년째 살고 있는 이주노동자였다.

유럽에서 왔고,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한다. 인도차이나 반도는 물가가 싸서 여행하기 좋다고 한다. 게스트하우스를 찾고 있다고 하니, 자신이 머무른 곳 중에 가장 싸고 괜찮은 곳을 소개해 준다. 뚝뚝이를 타고 10분 정도 가야 하는 곳이다. 아직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조차 잘 모르지만, 대책 없이 일단 믿어보기로 한다.

아침 산책길에 보았던 한국어 학교. 프놈펜 곳곳에 이런 학교가 있다.
▲ 프놈펜 왕궁 근처 한국어 학교 아침 산책길에 보았던 한국어 학교. 프놈펜 곳곳에 이런 학교가 있다.
ⓒ 김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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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잠시 수다를 떤다. 한국에서 만났던, 지금은 고향으로 돌아간 친구들을 찾아 왔다고 하니 그녀의 대답은 "캄보디아 사람들은 모두 다 게을러! 한국에서도 많이 게을렀지?" 한다. 그땐, 그녀만 가지고 있는 편견이려니 생각했다. 내가 본 친구들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을 모두 고향으로 돈을 부쳤고, 임금을 떼이거나 다치게 되면 가까스로 쉬게 되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말을 하니 못 믿는 눈치다. 자신이 캄보디아에 살면서 이 사람들이 얼마나 게으른 걸 많이 봤는지 말한다. 여행 내내 만난 유럽 여행자들은 공통적으로 캄보디아 사람들이 게으르다는 말을 많이 했다. 공공교통 하나 변변하게 없는 곳, 29년째 장기집권 중인 총리와 허울뿐인 왕이 있는 나라, 1년 내내 무더운 나라인 캄보디아에서 온 내 친구들은 전혀 게으르지 않았다.

대체 이들은 무얼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몇 년 전, 인도 여행 당시 유럽 여행자들 역시 똑같은 말을 했음이 기억 났다. 대체 어떤 편견일까? 처음 본 사람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어서 한국에서 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말로 대화를 끝낸다.

여행 마지막에 만난 미국 여행자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1년에 한 달 이상씩 휴가를 쓰고, 임금이 이 곳보다 열 배, 스무 배는 높은 곳에서 운좋게 태어나 사는 그들이, 물가가 싼 이곳으로 여행 와 온갖 혜택은 다 누리면서 그런 말을 할 처지인가? 신기하다"라는 답을 내놓는다. 그래도 그녀가 알려준 게스트하우스는 저렴하고 깔끔했다(캐피톨 게스트하우스, 3인실, 1박 14$)

대학생이 된 그, 다시 한국으로 온 동생

한국이 아닌 프놈펜에서 쏘티를 만났다. 언제나 한국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을 만나다가, 이번엔 캄보디아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를 그가 맞이해주었다.
▲ 쏘티와 함께 한국이 아닌 프놈펜에서 쏘티를 만났다. 언제나 한국에 익숙하지 않은 그들을 만나다가, 이번엔 캄보디아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를 그가 맞이해주었다.
ⓒ 김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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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를 타고 40분을 달려왔다. 한국에서 알고 지낸 그의 동생과 많이 닮아, 단번에 그의 형임을 알아봤다.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일행 중 한 명은 쏘티와 한국에서 잘 알고 지낸 사이다. 모두의 얼굴이 밝다. 무작정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장남이다. 4형제 중 2명이 한국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었다. 대학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가장이 된 그는 돈을 벌기위해 한국으로 왔고, 곧 이어 남동생도 왔다. 둘은 시화공단의 한 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4년 10개월을 다 채우고 캄보디아로 돌아왔고, 동생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안산에서 일하는 중이다. 쏘티는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살면서 못다 한 공부를 한다. 컴퓨터공학 전공이다.

그의 이야기는 한국에서 70~80년대를 살아낸 어른들의 이야기와 흡사했다.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기 위해 아주 멀리 떠났고, 그 돈으로 집을 짓고, 땅도 샀다. 동네 사람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 익숙한 이야기에 흠칫 놀란다. 길가의 풍경도, 그의 이야기도, 30년~40년 전 한국의 어느 시골 마을에 시간여행을 온 기분 같았다.

우리 일행의 궁금증 중 하나는, 이주노동자가 한국에서 버는 돈이 얼마나 많은 돈인가, 캄보디아에서는 어느 정도의 돈을 벌어야 적당한 생활이 유지되는가 였다. 2014년 1월에 최저임금 인상 투쟁으로 5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몇 년째 계속되는 최저임금 인상투쟁, 대체 그들의 임금은 얼마일까?

쏘티가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그래밍을 하게 된다면 200$(22만400원) 정도의 돈을 번다고 한다. 임금 수준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을 하는 어린 사람들은 보통 70~80$(7만7140원~8만8160),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은행 노동자가 150~200$ 정도라고 한다. 현지 물가는 US달러와 캄보디아 화폐인 리엘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 쏘티 말로는, 캄보디아 사람들이 리엘을 잘 못 믿어서 그렇단다.

대도시 월세 비용은 버는 돈의 전부나 절반 가까이로 지출된다. 일자리가 많이 없을 뿐 아니라 사회간접자본은 찾기 힘들다. 그들의 임금 수준에 놀라고 나니, 캄보디아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너무도 적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버는 돈은, 가족에게 상당히 큰 돈이었다.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돈 벌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가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쏘티와의 길고 반가웠던 대화를 끝냈다.

페이스북으로 찾은 친구 만나러 갑니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구인광고, 일본 연구자가 이 광고를 보고, 한국에서 연락이 두절되었던 라이의 캄보디아 현지 연락처를 보내온다.
▲ 라이를 찾습니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구인광고, 일본 연구자가 이 광고를 보고, 한국에서 연락이 두절되었던 라이의 캄보디아 현지 연락처를 보내온다.
ⓒ 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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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티를 만나러 나가기 전, 페이스북에 구인광고를 올렸다. 나와 동갑내기인 라이를 찾는 광고다. 안산에서 캄보디아 노동권 협회의 초석을 다지는 일을 했고, 임금이나 어떤 문제가 생긴 캄보디아 노동자들을 도와주는 일을 함께 했다. 그러던 그가 언젠가부터 연락이 뚝 끊겼고, 아무도 라이의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본국으로 돌아갔거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 틀어박혀 일을 하고 있노라 추측할 뿐이었다. 그가 씨엠립에 살고 있다는 정보는 멀리서 들은 터였다. 혹시나 싶어 올린 글에 화답이 왔다. 일본에 살고 있는 한 연구자가 그의 전화번호를 보내줬다. 맞을지 모르겠다며 보내준 두 개의 전화번호를 들고 밤 늦은 시간, 우리 일행은 환호성을 질렀다.

"진짜로 만날 수 있는 거야? 연락이 되면 정말 좋겠다."

다음날 아침 일찍, 먼저 하나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아마도 없는 전화번호라고 말하는 듯한 안내메시지가 나온다. 다음 전화번호를 눌렀다. 캄보디아 말이 들리는데, 분명히 라이 목소리다.

"라이! 여보세요!"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전화기에 말을 했다. 건너편에서 전화를 뚝 끊었다. 그래, 이 전화번호가 아닌가봐, 상심하다가, 다시 걸었다. 뚝 끊겼다. "안 되나보다." 일행 셋은 시무룩해졌다. 세 개의 침대에 나란히 앉아 전화기만 서로 쳐다본다. 10분 정도 지났던가? 왠지 억울해서 다시 전화를 걸었고, 또 무조건 소리지른다.

"라이! 나 행이에요! 라이! 여보세요! 여보세요?"

수화기 저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온다.

"네? 선생님? 박혜영 선생님이라고요?"

눈물이 다 났다. 혹시나 해서 한 번 해봤는데 드디어 연결이 되었다. 씨엠립 근처에 살고 있다고 한다. 당장에 가겠다고 말했다. 빨리 오라고, 진짜 선생님들 맞냐고, 신기하다고, 어떻게 오게 되었냐며 질문이 쏟아진다.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지. 그렇게 우리의 다음 여정은, 씨엠립으로 결정되었다.

첫날 프놈펜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읽은 신문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보통의 여행자는 새로 당도한 곳에서 그 사회의 선한 풍경만을 풍문으로 변주한다. 눈 밝은 여행자는 그 사회의 풍경과 풍습에서 숨은 악을 발견하고 놀란다. 그리고 가장 훌륭한 여행자는 한 사회의 선이 만들어낸 뜻하지 않은 악들과 악이 만들어낸 거짓된 선들을 발견하고 전율한다."

수첩에 곱게 옮겨두고 생각해본다. 나는 어떤 여행자인가.


태그:#프놈펜, #배낭여행, #게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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