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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도 더운데 그냥 갈 수 없다.

"부인 커피 한잔 하시겠습니까?"

사실 전날 숙소 문제로 다툰 뒤라 어지러진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커피를 마시며 서로에게 편지를 한 통 쓰기로 했다. 잘쓰지 않는 편지다. 그런데 한번 시작하니 글이 술술 나온다. 쓰고보니 장문이었다.

카페에서 바라본 분수가 놓인 중정
▲ 굼(GUM) 백화점 카페에서 바라본 분수가 놓인 중정
ⓒ 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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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대하여
인생이 한 편의 연극이라 한다면 인생에도 장면과 장면이 열리고 닫히는 막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결혼은 분명 우리 인생에서 하나의 막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대를 준비하기까지 그대와 나는 무대장치자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연주가, 배우가 되어야 했습니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고, 쏟아야 할 시간도 많이 필요했습니다. 정신적인 소모도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나는 피곤해 했고, 결혼에 앞서 지쳤습니다. 그대는 나와 달랐습니다. 그대는 이 모든 과정을 즐거워 했습니다. 그것은 행복이었습니다. 그대와 나는 달랐습니다. 태도의 문제였습니다. 나는 내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순간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먼 훗날 돌이켜보고서야 그때가 행복한 때였다고 깨달았을지 모릅니다. 나는 머리로만 행복을 좇았습니다. 그리고 눈 앞에서 행복을 놓쳤습니다. 그러나 그대 덕분에, 깨달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때라는 것을.

균형에 대하여
지금 그대보다 1년 늦게 읽고 있는 '오래된 미래'에서 라다크 사람들의 건강에 대한 부분을 읽었습니다. 영양학적인 눈으로 보면 라다크사람들의 식사는 굉장히 불균형하고 소금의 섭취 또한 과다하게 높지만 라다크 사람들이 매우 건강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살아있는 것들은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지만 모두가 똑같은 지점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생명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전자 하나를 제거하는 실험이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체에서 그 유전자를 제거하였을 때 그 생명체는 얼마 있지 않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 유전자를 제거한 상태로 태어난 생명체는 마치 그 유전자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정상적으로 살았습니다. 생명은 그 자체의 결함을 다른 유전자들을 통하여 커버하는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만들어내는 동적인 평형상태입니다.

삶과 사랑에 대하여
인생을 살아오며 내가 만들어낸 균형의 지점이 있고, 그대가 만들어낸 균형이 지점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그 지점은 분명 똑같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균형 지점을 움직이기 쉽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힘이 그리고 사랑하는 힘이, 나는 그대에게로 그대는 나에게로 조금씩 움직이게 만들거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에 대한 깨달음은 바로 그런 것일 겁니다. 사랑이 바로 우리의 균형 지점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는 쫌생이입니다. 그것은 제가 그동안 이루어 온 균형된 지점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와 함께 사랑하며 사는 동안 그 지점은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모든 과정을 행복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진심을 담은 글이었지만, 아직은 머리가 앞선다. 글에서 멋진 척은 혼자 다하지만, 가슴은 머리만큼 여물지 못했다. 다음 날 우리는 더 심하게 다툰다. 모스크바에서 8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해 내리자마자. 20킬로그램의 배낭을 맨 채로. 모스크바 역을 나가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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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싸운 이유 : 신혼여행 첫 날 밤 숙소가 트윈 베드였기 때문. 오마이갓.

"남편, 그러니까 내가 첫날밤은 호텔에서 묵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도 변명의 여지는 있었다.

"이거 저 혼자 고른 곳이 아닙니다. 분명 같이 보고, 괜찮다고 해서 예약한 곳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경과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결과다. 러시아인 체형에 전혀 맞지 않을 거 같은 폭 1미터 미만의 싱글 침대 두 개. 싸구려에다 체중이 실릴 때마다 스프링이 삐걱댔다. 작동이 의심스러운 구식 컴퓨터 한 대와 CCTV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만큼 조그만 TV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숙소가 요 모양 요 꼴이니. 솔직히 나도 많이 당황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둘째날 밤은 기차 침대칸이었다. 그것도 6인실. 그야말로 오마이갓. 여기저기서 소리지르는 여자분들의 목소리, 나도 들린다. 쌤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횡단열차를 타는 건 쌤의 로망이었다.

밤열차를 타고 난 다음 날 쌤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을 해보지 못한 후회가 말끔히 사라졌다."

열차에서의 밤은, 하루면 족했다. 로망은 역시, 깨지라고 있는 거다.

이말을 들은 쌤은 격분해 소리쳤다.

"로망은 깨지라고 있는 게 아니라 실현하라고 있는 거라고!"


왼쪽 열차가 우리가 타고 온 열차다
▲ 뻬쩨르부르그의 모스크바 역 왼쪽 열차가 우리가 타고 온 열차다
ⓒ 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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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러시아, #여행, #모스크바, #뻬쩨르부르그, #신혼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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