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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시대를 잘못타고 태어났다 생각되는 인물이 몇 있다. 타고난 지략과 여성으로서의 자존심 그리고 질투를 겸비했으나, 우둔하고 보수적인 조선시대가 허락치 않았던 명성황후가 대표적 인물. 반면 시대를 제대로 만났다 생각하는 인물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팍스 아메리카나'의 쇠퇴기를 새 시각으로 만들어 내야하는 시대, 범상치 않은 '흑인 엘리트'는 시대를 순행하는 인물인 것이다.

 

2월 초 대형서점 한 구석에 마련된 노무현 관련 서적들 중 나는 '최대한 감성적이지 않은 책'을 선택하고자 했다. 그의 서거에 대한 슬픔과 분노는 이미 온 세상을 한 바탕 휩쓸고, 그 여진마저 남아있으니 책으로 다시 그 서정을 만난다면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그 중 이 책은 그의 서거 전에 이미 원고가 완성되다시피 했으므로 가장 객관적으로 그의 생각이 담겨 있을 듯 해서 선택됐다.

 

 

내가 노 전대통령 임기 중 놀랐거나 그에게 화가났던 시기가 몇 번 있었는데, 첫째는 임기 초 공무원 인사청탁 금지에 관한 담화문 발표시 '인사청탁 하다 걸리면 패가망신 시키겠다'는 표현을 했을 때다. 생방송 중 최고 통수권자가 저런 언어를 쓰다니, 상당히 놀랐었다.

 

두 번째는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을 때다. 옳지 않은 길을 가는 그의 행적에 적잖이 실망했다. 나중에 청와대 비서관이 써낸 책에서 그가 파병을 발표하기 전날 밤까지도 반대 뜻을 굽히지 않았으나 비서관들이 겨우 설득해 그 다음 날 아침 겨우 처리했다는 글을 읽었다. 미국과의 불공정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그의 마음을 알고 측은해지긴 했지만, 어쨌든 당시의 실망감은 굉장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책에서 역시 그 상황을 '괴로웠다'고 회고했다. 자신의 신념 뿐 아니라 국가의 장기적인 이익이 아닌 길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당장 얼굴을 들이대는 부시 행정부를 외면할 수 없다는 사실. 그런데 괴로운 상황은 그의 임기 내내 있었다. 언론과의 싸움, 거대 야당과의 불편한 관계, 다 필요없고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는 사회 분위기. 여기에 임기 말엔 지지층도 그에게 등을 돌렸다. 노 전 대통령은 그들의 심정을 이해한다면서도 이렇게 반문한다.

 

'그런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잘못은 없었다. 그러나 아쉬움은 짙었다. 그가 지지자들에게  '조금 더 가 봅시다. 작은 오류들은 있었지만 큰 틀에서는 제대로 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5년은 그 과정 속에 있었던 것이다. 너무 짧은 과정이었기에 우리가 겪었다시피 많은 혼란이 있었다. 문제는, 나처럼 그의 노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의 노선을 이해하는 지지자들이 있는 반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상당수였다는 것이다. 그들에겐 노 전대통령의 모습이 '개혁'이 아니라 '혁명'을 원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5·16 쿠테타, 12·12 사태 등 예고치 않은 이들의 출현으로 나라가 바뀐 현대사를 가진 한국 사람들에겐 '혁명'은 상당히 거부감을 일으킨다. 여기에 그를 미워하는 세력들이 더해져 노 전 대통령은 반란 쿠테타를 하는 사람처럼 왜곡돼 보여졌다.

 

중도 우파적인 정책을 자주 실현했던 그에게 '좌파 정권'이라는 표현이 따라다녔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물론 좌파 혹은 빨갱이라는 표현은 수구 보수 세력에서 상대에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붙이는 이름이기에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하겠다).

 

서론으로 돌아가보자. 그렇다면 노무현은 시대를 잘 타고난 인물인가? 불운하게 잘못 타고난 인물일까? 나는 그가 최고로 시대를 잘 탄 인물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선 그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외신이 평가하는 대로 그는 온라인 미디어의 장점을 이용할 줄 아는 똑똑한 대통령이었고, 구 시대 낡은 유물에 집착하지 않는 혜안을 지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역사 상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될 뻔 했던 그의 역사는 비극으로 끝났다. 비극을 만든 주인공은 수구세력일 수도 있고, 그가 손을 내밀 때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주지 못한 나 같은 사람들일 수도 있겠다. 지나고 후회하는 바보같은 일을 내가 저지른 것 같아 죄인이 된 느낌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 책 서문에 못한 추도사를 대신해 '우리가 살아있으면 노무현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고 했는데, 많은 이들이 살아있는 요즘 노무현은 과연 죽지 않았을까? 하긴 바람이 다시 불고 있으니 아직 살아계신지도 모르겠다.

 

추신. 책에서 노 전 대통령은 이명박을 '불공정한 시대에 성공한 CEO. 공정거래와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 투자가 요구되는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아, 한숨이 나온다. 어쩜 이리 똑 떨어질까.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 대통령 노무현과 기자 오연호의 3일간 심층 대화, 개정판

오연호 지음, 오마이북(2017)


태그:#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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