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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에는 강연내용 및 일정이 적혀있다.
▲ '제1회 3차원 지식포럼' 강연 포스터 포스터에는 강연내용 및 일정이 적혀있다.
ⓒ 정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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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계만의 '알'을 깨고 여러 분야의 지식을 입체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자세를 높게 평가한다. 대학생들 스스로가 알고 싶은 것을 디자인하는 것. 여기서 나는 우리나라 이공계 학생들의 '가능성'을 다시 발견했다."

정재승 교수(카이스트)는 '제1회 3차원 지식 포럼'을 이렇게 평가했다.

'3차원'이라는 희한한 포럼제목에다가 그것도 '1회'라니. 듣자하니 대학생들의 자발적 주체로 대형 강의를 기획했다고 한다. 강연 포스터를 보니 명사들의 이름이 가득 적혀있다. 강연은 지난달 29일부터 31일까지 3일간 진행되었다. 지난 30일, '조금 늦게' 이공계 대학생들이 떠나는 인문사회학 여행 대열에 줄을 섰다.

'제1회 3차원 지식포럼'이 열리는 고려대학교 과학도서관. 토요일 오전 10시, 이른 시간에도 500여개의 좌석은 꽉 차있었다. 보라색 티셔츠를 맞춰 입은 스태프들이 눈에 보였다. 그 중 누구는 늦게 온 학생들에게 자리를 안내해주고, 또 다른 이들은 강사의 에스코트 역할을 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1교시는 진중권(미학자)씨의 강연. 그 누구 하나 조는 이가 없었다. '현대 과학기술과 예술'이라는 강연 속에서 어느 누구도 더 이상 평범한 이공계 대학생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문사회학과 사랑에 빠진, 지적호기심이 가득한 예비지식인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질문시간, 여기저기서 이공계 대학생들이 가지고 있던 고민과 문제들이 쏟아져 나온다. 누가 대형 강의를 일방적 소통이라고 했던가? 그들은 어느새 진중권씨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기획부터 실무까지 학생이 모두 주도한다

강연을 하는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
 강연을 하는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
ⓒ 3차원지식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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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에 흔쾌히 응한 대부분의 강연자들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주최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첫째 날 강연을 맡은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이사는 "이공계 대학생들이 스스로 뭉쳐 이런 대형 강연을 준비한다는 소식에 망설임 없이 강연을 수락했다"며 학생들의 자발적 동기를 높이 평가했다. '제1회 3차원 지식포럼'은 기획부터 실무까지 모두 학생이 주도한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이번 지식포럼의 탄생은 고려대학교 지식공동체 'CUBE'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년 9월, 인문사회학 지식에 목마른 이공계 대학생들이 'CUBE'라는 동아리를 결성했다. 몸은 이공계에 담고 있지만, 그들은 입체적인 지식과 사고를 원했다. 반쪽자리 지식에만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지식을 접하고 나아가 더 넓은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다. 'CUBE' 동아리에 있던 열댓명의 학생들이 모여 '큰 일'을 벌인 것이다.

같은 취지 하나로 70여 명의 기획단들이 모였다. 기획단은 기획팀, 대외협력팀, 학술팀, 홍보팀으로 나누어 행사를 추진했다. 2개월 동안 학생들은 자신의 사비를 들여서까지 행사 준비에 힘썼다고 한다. 대외협력팀 박은솔(숙명여대 화학과, 08)씨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우리 힘으로 해냈다"며 "결국 학생들의 자발적 추진력이 이번 포럼의 큰 성과를 낸 것 같다"고 흡족해했다.

이공계 대학생, 인문사회학의 '열쇠'를 쥐다

강연을 듣고 있는 학생들
 강연을 듣고 있는 학생들
ⓒ 3차원지식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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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계 대학생들은 인문사회학을 접할 기회가 거의 드물다. 이런 '칙칙한' 이공계 문화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주고 싶었다. 이공계 학생들이 인간과 사회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번 지식포럼을 주최한 박재익(기획단장, 32)씨는 강연목표를 '인간과 사회를 위한 과학기술'이라고 밝혔다. 지식포럼에 참가한 이공계 학생들의 인문사회학에 대한 지적호기심은 그 누구 못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동안 인문사회학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손준영(성균관대 물리학과 04)씨는 "대부분 이공계 대학교 커리큘럼은 1학년 때 교양과목을 제외하곤 인문학을 접하기 힘들다"며 "인문사회학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전공과목에서 접하는 문제를 좀 더 다양한 시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자문교수를 맡은 우희종 서울대 교수(53)는 "우리나라 학문들은 과학이면 과학, 인문학이면 인문학, 이런 식으로 찢겨져 있다. 앞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융합학문인데, 이번 지식포럼은 융합학문을 지향하는 기점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공계 대학생들, 인문사회학에 도전장 내밀다

우희종 교수의 강연를 듣는 학생들
 우희종 교수의 강연를 듣는 학생들
ⓒ 3차원지식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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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주최 측에서 밝힌 수강생 목표는 500명. 하지만 7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이번 포럼에 참가했다. 04학번부터 10학번 새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강연을 들으러 왔다.

목포에서 온 김가이(울산과학기술대학 10)씨는 "하나의 지식포럼에서 다양하고 많은 명사들을 만날 수 있어서 참여했다"며 "인문사회학과 거리를 좁힌 것 같다"고 말했다. 한수연(성균관대 생명과학계열 09)씨는 "많은 이공계 학생들이 인문사회학에 관심이 많지만, 우리가 세상에 무심하다고 비춰지는 게 현실"이라며 "이공계 대학생들이 인문사회학을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게 바람"이라고 밝혔다.

정재승 교수는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으로서, 학문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라고 지적했다. "과거에는 자연과학적 방법이 '물질'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젠 '인간'과 '사회'를 다루는 데 사용된다"며 "결국 자연과학을 위해 인문사회학 지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마지막 강연날인 31일, 그 전날보다는 학생 수가 다소 적어보였다. 하지만 강연의 분위기는 더 뜨겁게 달궈졌다. 그들은 더 이상 '틀'에 갇힌 이공계 대학생이 아니었다. 어느 덧 강연의 주체가 되고, 인문사회학을 즐기고 있었다. 그 곳에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있었다.

"수동적인 이공계 대학문화, 우리가 변화시켜야 합니다"
[인터뷰] 박재익 '제1회 3차원 지식포럼' 기획단장
'제1회 3차원 지식포럼' 기획단장 박재익씨
 '제1회 3차원 지식포럼' 기획단장 박재익씨
ⓒ 정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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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만난 기획단장 박재익씨. 그는 "이제 대학원을 들어가는 10학번 새내기"라고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2달간 지식포럼을 기획하고 3일 동안 지휘하면 지칠 만도 한데, 그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 어떻게 이런 대형 강연을 준비하게 됐는가?
"평소 이공계 학도로 살아가면서 이공계 대학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교 1학년 무렵 선택한 '자연계', '인문계'라는 세 글자의 딱지가 폭 넓은 지식을 습득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흔히 "이공계 학생들은 세상에 무지하며 무관심하다"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편견과 오해를 깨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었다. 사실 많은 이공계열 학생들이 인문사회학 분야에 관심이 많음에도 이를 접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이공계 대학의 문화와 분위기를 탈바꿈해보고 싶었다." 

- 강연은 어떤 식으로 진행됐는가?
"우리는 강연을 위해 총 20여명의 명사들을 섭외했다. 3일 동안 학생들은 강좌를 선택해서 들을 수 있다. '재료를 선택해서 요리하는 것은 수강생의 몫'인 것이다. 성찰, 소통, 미래라는 큰 주제를 정해서 하위주제들을 묶었다. 강연 듣기 외에도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러 프로그램들을 준비했다."

-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준비했다고 들었는데, 준비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신이 나지 않나. 우리가 그랬다. 모두들 원하고 있었던 꿈을 실현시키는 일이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잘 진행됐다. 사실 후원금이 많이 들어오지 않아, 학생들이 자비를 써가며 행사준비를 했다. 하지만 수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성과에 만족한다. 강사 분들도 우리의 취지에 공감해주시고 대부분 흔쾌히 강연을 수락해주셔서 도움을 많이 받았다."

- '제 1회 3차원 지식포럼'의 의의는 뭔가?
"사실 '반쪽자리 전공지식을 넘어 인문사회를 아우르자'라는 우리의 행사 취지를 알리는 게 가장 큰 목표였다. 전국각지에서 학생들이 강연을 들으러 온 것을 보면 목표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짜여진 판에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대학생 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고 싶었다. 많은 학생들이 이공계 지식만으로는 풀지 못했던 문제의 실마리를 이번 강연에서 찾길 바란다."

- 강연을 준비하면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첫 회이고, 학생들끼리 모든 걸 준비하다보니 진행상 미흡한 점도 있었고 약간의 혼선도 빚어졌다. 또 강연을 들은 학생들끼리 토론하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다. 강연에서 나온 문제제기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나가는 자리가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문학'부분에서 강연자 섭외가 되지 않아, 인문사회학 전반을 골고루 다루지 못한 것 같다. '과학과 인문사회학'의 탄탄한 연결고리로 강연을 준비하는 것도 앞으로 개선해야할 점이다.

- 앞으로도 이런 강연을 계속 할 생각인가
"명색이 '1회'라고 적혀있는데, 적어도 '2회'까지는 해야 하지 않나.(웃음) 이번을 시작으로 앞으로도 한 학기에 한번씩, 방학 때마다 지식포럼을 개최할 생각이다. 강연평가를 통해서 이번 지식포럼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나갈 생각이다.

- 이공계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세상은 알면 알수록 더 재미있고, 함께해서 얻을 수 있는 가치들이 더 많다. 현재의 자리에만 머물지 말고 대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이공계 문화를 새로 창조하길 바란다. 인문사회학을 접해보는 것과 접해보지 않은 것은 이후의 삶에서 엄청난 차이를 가져다 줄 것이다. 어느 분야이든 통합적 지식 없이는 사회에서 바람직한 역할을 하기 힘들다. 이공계 대학생이여, 세상을 지휘하라!"


태그:#제 1회 3차원 지식포럼, #이공계 대학생, #인문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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