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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쌀쌀해졌다. 예전에 대추리지킴이를 했던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우연히 텃밭에 들어선 것을 계기로, 나는 벌써 세 번째 계절을 맞고 있다. 봄, 여름 그리고 가을. 그전까지 농사라면 나랑 상관없는 일, 아무 관계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몸 쓰는 것도 싫고 피부 그을리게 햇빛 아래서 일하는 건 더 싫어했으니 말이다. 그런 내가, 사무실 주차장 옆 버려진 비탈땅에서 친구와 함께 농사를 짓게 되었다. "같이 하자, 해 보면 재밌어"라는 그녀의 말에 홀랑 넘어가서.

나를 농사의 세계로 이끌어준 그녀
▲ 농사꾼 친구 나를 농사의 세계로 이끌어준 그녀
ⓒ 안티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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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일은 과연 재미있었다. 땅을 고르고, 잡초를 뽑고, 작은 모종화분에서 싹을 틔었다. 내가 씨뿌린 화분이 왠지 싹이 늦게 나는 거 같아 어찌나 조바심이 나던지! 너무 얕게 심어 비둘기가 와서 먹어버렸나 아니면 너무 깊게 심어 흙 속에서 그냥 썩어버렸나, 역시 씨앗도 초짜를 알아보는구나 하면서 혼자 발을 동동 구른 적도 여러 번. 그렇게 나는 친구와 함께 여름 내내 대파, 풋고추, 청량고추, 방울토마토, 오이, 가지, 고구마, 상추, 깻잎, 치커리, 쑥갓, 청경채, 열무, 엇갈이 배추를 키웠다.

종류를 이것저것 많이 심어서 그런지, 텃밭에 매일 한 두시간은 꼬박 매달려야 했다. 그 작은 땅에서도 낙엽이 켜켜이 쌓여 기름진 쪽이 있는가 하면 삽 하나만 뜨면 쓰레기와 자갈만 즐비한 곳도 있어서 원두커피 찌꺼기며 탕약 끓인 약재를 얻어다가 흙에 섞어주기도 했다. 이거 먹고 잘 자라다오, 하고 속으로 되뇌이면서 말이다. 김 매랴 흙 고르랴 깻잎이며 상추 뜯으랴, 밭일은 꼭 집안일처럼 끝이 없다.

그러니 모자를 쓰고 썬크림을 발라도 얼굴이며 팔뚝이 새까맣게 탈 수밖에. 하지만 덕분에 여름 내내 부드러운 쌈채거리로 식탁은 풍성했고, 직접 기른 열무며 엇갈이배추로 김치도 몇 번 담가먹었다. 그리고 신선한 식탁보다도 더 나를 감동시킨 것은 텃밭에서 얻는 신기한 힘이었다. 생명이 자라는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즐거움과 기쁨이라고나 할까?

열무 수확 중
▲ 열무 농사 열무 수확 중
ⓒ 안티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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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농사일에 끌어들인 그녀도 사실 1년 정도밖에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러니 시골에 계신 어르신들 눈으로 보기엔 영락없이 초짜끼리 모여 소꿉장난하듯 농사를 지은 셈. 가을에 고구마 캐서 먹으면 맛있겠다고 인터넷으로 고구마 줄기를 50줄기 주문했다. 마침 고구마 줄기가 '비 오는 날' 배송되어 왔고, 우리는 비가 오기에 하루 쯤 그늘에 넣어뒀다가 다음날 '해가 쨍쨍 날 때' 고구마 줄기를 심었다.

그런데 왠 걸? 파릇파릇 잎도 틔우고 줄기도 뻗어야 할 고구마 줄기들이 심은지 한나절 만에 완전히 축 늘어져서 내다버린 쓰레기 마냥 된 것이다. 이걸 어째야 하나, 또 발을 동동 구르다가 우리는 결국 매우 비장하게 물동이를 지고 날라 이랑고랑 할거 없이 물을 그득그득 주기 시작했다. 해 날 때 물 주면 잎이 탄다는 건 알았지만, 더 놔뒀다간 정말이지 '드라이 플라워'가 될 지경이었으니 선택의 도리가 없었던 것.

이 무렵부터는 남자 선배 하나가 농사에 합세하여, 남자 하나 여자 둘이서 아침 저녁으로 양동이에 물을 져 나르는 진풍경을 연출하곤 했다. 남들은 혀를 차며 비웃었지만, 우린 그때 정말 절박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고구마는 원래 비오는 날 심어야 잘 자란단다. 땅이 축축하고 부드러워야 뿌리를 금방 내린다는 거였는데, 우린 그것도 몰랐던 것이다. 다행히 그렇게 공을 들인 보람이 있어서, 고구마 줄기들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추석이 지난 무렵 자랑스런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물론 50줄기나 심은 것 치고는 턱없이 적은 양이었지만, 나는 마냥 자랑스럽고 고구마들이 기특하기만 했다.

먹을거리 농사터 틈새에는 우리들의 예쁜 허브밭이 있었다. 파인애플 세이지, 애플민트, 레몬 버베너 등 익히 알려진 허브들과 함께 휘버휴, 레이디스맨틀처럼 약재로도 쓰이는 허브도 심었다. 허브잎을 따다가 잘 씻고 줄기는 잘라내고 곱게 잎만 말려 허브차를 만들어 마신다. 비록 잔 손은 많이 가지만 직접 키운 허브차를 친구들과 함께 마시면 또 어찌나 향기로운지! 앙증맞고 향기 좋은 허브를 키우는 것도 도시 텃밭 농사의 즐거움 중 하나다.

여름 내내 향기를 전해주던 허브들은 이미 화분으로 다 옮겨 놓았다. 겨울을 따뜻한 실내에서 보내고, 내년 봄에 다시 밭으로 돌려보내줄 생각이다. 여름 내내 여러 작물들로 복작복작했던 텃밭에는 요즘 딱 2종류, 콩과 김장배추가 심겨져 있다. 배추도 콩도 씨앗에서부터 직접 키운 거다. 직접 키워보기 전에는 왜 엇갈이 배추는 푸른데 김장배추 속은 하얀지 난 정말 그 이유를 몰랐었다. 그저 막연히 "품종이 다른거 아냐" 라고 말했다가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을 정도로 말이다.

허브들 월동준비도 해 놓았고 배추도 이제 다 묶었으니, 이제 슬슬 올해 농사 다 지었다 싶은 기분이 드는 게 나도 조금은 농부가 되었구나 싶다. 이제 햇빛 잘 나고 물만 잘 주면 얼마 후엔 속이 꽉 찬 배추들을 볼 수 있겠지,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인다. 내년에도 다시 텃밭 농사를 지을 생각이다. 한 해 해 보았으니  내년엔 더 잘할 수 있을까. 땀 흘리면서 해와 바람과 비를 맞이하는 정직한 노동 농사. 텃밭농사는 바쁜 일상 속에 나를 돌아보게 해주는 소중한 시간이다.


태그:#텃밭, #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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