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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임 끝에 담배를 꺼내 물었다. 초등생 우리 꼬마하고 약속한 것이 있어 요즘 들어 무척 자제하는 중이었다. 함양 독바위 빨치산루트란다. 특히 이번 원행만큼은 특별히 야심 찬 기획 산행이므로 기대해도 좋다는 집행부의 포부가 있었다.

잠시 고민이 앞선다. 사실 이런식으로 지리산을 찾는 것은 그렇게 유쾌하지 않다. 왜냐하면 일종의 역사적 죄인 같은 편치 않는 마음의 빚이 들씌워져 있기 때문이다. 피아를 불문하고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간 억울한 영령들 앞에 왁자하게 한바탕 바람 같은 유흥으로 이렇듯 아무렇게나 준비 없이 대면해도 될까 하는 무형의 죄의식이랄까? 뭐 하여튼….

중산간 마을인 송대마을 초입에 있는 지리산공비토벌 안내도이다. 오랜기간 정비가 없었는지 색이 많이 바래져 있다.
▲ 송대마을 초입의 지리산공비토벌 안내도 중산간 마을인 송대마을 초입에 있는 지리산공비토벌 안내도이다. 오랜기간 정비가 없었는지 색이 많이 바래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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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독바위 오름 길 중산간 마을인 송대마을 입구에 큰 입간판에 걸렸다. 일명 지리산공비토벌안내도다. 형태나 크기나 글 행간들이 어딘가 낮이 익다. 예전 진주 중산리 들머리와 건너편 피아골 입구에서도 면식이 있는 것 같고 반선 뱀사골 입구에 떡 버티고 있는 그것들과 꽤나 닮았다. 여기서 우리 공무원 사회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약간 씁쓸하다. 공무원이 무너지면 나라가 망한다더니 이쯤 되면 당분간 나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문득 정지아의 말이 떠오른다. 1990년 그녀는 빨치산의 딸로 살아온 인내의 삶과 굴절된 역사를 엮어 한편의 <빨치산의 딸>이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펴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이 일로 국가보안법에 기소당했다. 즉각 책은 금서로 되었고 판매 중지됐다. 더불어 빨치산의 진실과 현대사는 그대로 당분간 지리산에 묻혀있어야 했다.

"법은 의복과 같다. 법과 의복은 봉사해야 할 사람 몸에 꼭 맞게 만들어져야 한다."

이것은 민주주의 정신을 강조한 사상가 존 로크의 말이다. 우리 사회가 민주사회로서 역동성이 있고 진정성이 있다면 보다 개방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다소 불편하다고 해서 역사를 적당히 둘러대고 사실 관계를 왜곡한다면 결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억지춤을 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히 체제의 희망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부끄럽지 않을까?

<빨치산들의 보투<보급투쟁> 배후지로 한때 단단히 곤욕을 치렀을 중산간 마을 송대마을 전경이다. 어김없이 이곳에도 역사의 아픔을 딛고 새 생명의 진녹색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
▲ 빨치산의 보투 대상지였을 송대 마을 전경이다. <빨치산들의 보투<보급투쟁> 배후지로 한때 단단히 곤욕을 치렀을 중산간 마을 송대마을 전경이다. 어김없이 이곳에도 역사의 아픔을 딛고 새 생명의 진녹색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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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빨치산'이란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san)에서 유래된 말로 특정 정당이나 단체를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는데, 점차 비정규 유격대를 뜻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독 우리나라에선 산 속에 숨어 공산주의 하는 '산사람'이란 용어로 굳어졌다. 그래서 대표적인 빨치산이라면 일제강점기 백두산을 근거로 활약하던 항일 김일성 유격부대와 쿠바혁명의 주역 카스트로와 전설적인 체 게바라가 그 예라 할 수 있다.

몇 년 전 장꼬르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을 읽으며 가슴이 뭉클한 적이 있다. 체가 볼리비아정글에서 부상당한 몸으로 사로잡혔는데 그 고통과 죽음 앞에 그의 마지막 행동은 적을 향한 상냥한 미소와 한 모금의 끽연이었다.

34년간이라는 기록적인 수형생활을 한 비전향장기수 리인모 노인의 수기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열흘을 굶어 한 조각 밥 덩어리를 구했는데 굶는 동지들 생각이 나서 감히 입에 대지를 못했다. 소설 <태백산맥>엔 이런 문구도 있다. 빨치산은 세 번 죽는다. 총에 맞아 죽고 얼어 죽으며 굶어 죽는다. 하지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동지들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이다.

60여 년이 훌쩍 흐른 지금,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들 빨치산을 다 이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해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의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는 '단순한 사실(?)'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죽어가면서 웃을 줄 알고 동료들의 배고픔에 감히 주먹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릴 줄 알았으며 함께 아파했던 이들이고 보면 우리와 똑 같은 누이고 아우이며 이웃의 정겨운 아저씨와 아낙들이었다.

< 빨치산 최후의 인물 3인중 이은조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선녀바위굴이다. 그 안으로 골이 깊다. 아래로 물이 마르지 않는 선녀샘이 있어 그윽한 생명의 신비를 자아낸다. >
▲ 마지막 빨치산 이은조가 사살당했다는 선녀굴 비트 < 빨치산 최후의 인물 3인중 이은조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는 선녀바위굴이다. 그 안으로 골이 깊다. 아래로 물이 마르지 않는 선녀샘이 있어 그윽한 생명의 신비를 자아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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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빨치산의 얼굴표정이라고 감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우울하고 침울하다. 과연 빨치산 그들의 표정이 이러했을까?
▲ 선녀굴 비트를 지키는 여빨치산 마지막 빨치산의 얼굴표정이라고 감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우울하고 침울하다. 과연 빨치산 그들의 표정이 이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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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최소한의 휴머니즘적 감성과 이성이 작동되는 사회라면 여기 이 선녀굴의 생뚱 맞아 보이는 이 빨치산의 모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특히나 마지막 빨치산이라는 이은조 등은 형상화한 것이라면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그들이 과연 저런 우울(?)한 모습으로 십 수년간 사선(射線)을 넘나들었다고 과연 믿으라는 이야기인가?

한국 전사에 보면 이곳 노장대 골짜기를 중심으로에서 피아의 전투가 치열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역사의 아픔과 상처가 깊은 곳이다
▲ 일명 노장대라고 불리는 함양 독바위 한국 전사에 보면 이곳 노장대 골짜기를 중심으로에서 피아의 전투가 치열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역사의 아픔과 상처가 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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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함양 독바위 위에 올라서면 그 조망이 참으로 장쾌하다. 아래 세동마을이 가깝고 우리가 올라온 용유 송대마을이 정겹다. 숨바꼭질하듯 꼬리치는 임천강이 유유한데 문득 발 아래를 내려다보곤 이내 기겁한다.

<진달래의 붉기가 유난히 선연하다. 그 이유는 노장대라 불리는 그 역사만이 알 것이다. >
▲ 독바위 암벽에 선연한 진달래 <진달래의 붉기가 유난히 선연하다. 그 이유는 노장대라 불리는 그 역사만이 알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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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한발 재겨 디딜 곳이 마땅치 않음을 뒤늦게 안다. 긴장 속 심장 소리가 유별스러운데 문득 암벽을 등지고 가지런한 진달래가 눈에 선연하다. 붉기가 유난한 것으로 보아 그 사연도 적지 않아 보인다. 그러고 보면 초입 안내입간판의 자세한 설명이 참고가 될 듯하다.

<일명 노장대라고도 하는 곳이데 한 때(6.25) 토벌대와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된 곳이다. 적의 저항이 드세 아군의 피해가 막심하였다>

만약 나에게 이 문구를 고칠 작은 권한이 있기나 한다면 이렇게 고치면 어떨까?

<전쟁시기 한동안 이곳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서로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눠 산화해 간 곳이다. 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명문으로 싸웠으나 결국 민족의 아픔과 상처만 남았다. 이곳을 교훈 삼아 다시는 민족의 뼈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 >

독바위를 지나면 얼마지나지 않아 마주치는 거대한 석문이다. 입구에 안락문이라  각자되어 있다.
▲ 안락문 독바위를 지나면 얼마지나지 않아 마주치는 거대한 석문이다. 입구에 안락문이라 각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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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대를 지나 1210 고지로 향해 조금 올라가다 보면 단박에 질겁하게 만드는 거대한 석문이 나온다. 석문 정면에 안락문(安樂門)이라 각자되어 있다. 설명에 의하면 '산사람'들이 이문을 통과해 하산하면 안락한 생활을 보장받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런데 문득 여기서 하나. 제발 여기서의 안락이 단순히 물질적 안락만을 이야기하지 말기를…….

벽송사 하산길에서 만나는 정겨운 "지리산길" 표식이다. 새겨 놓은 분의 하심(下心)을 읽을 수 있다.
▲ 지리산길의 표식 벽송사 하산길에서 만나는 정겨운 "지리산길" 표식이다. 새겨 놓은 분의 하심(下心)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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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길' 벽송사 내림 길에서 만나는 반가운 손님이다. 크기도 앙증맞고 생김도 가식적이지 않으며 가리키는 방향 또한 명료하다. 키가 적당히 낮은 것으로 보아 순례객들에게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타이르는 것 같다.

반대로 위의 껑충한 밤색 이정표는 너무 무표정하다 못해 꼭 하산 명령을 집행하는 병정을 닮아 보인다. 문득 지리산길을 구상하고 기획한 사람들의 풋풋하고 훈훈한 마음을 읽는 것 같아 못내 흐뭇하다. 뭇 생명들 속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여있는다는 실상사를 중심으로 한 생명평화결사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아이디어다.

벽송사 하산길의 산죽비트에서 만나는 빨치산 모형이다. 그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둡고 스산하다.
▲ 산죽비트 속 빨치산 모형 벽송사 하산길의 산죽비트에서 만나는 빨치산 모형이다. 그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어둡고 스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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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들의 야전병원으로 쓰여졌다는 천년 거찰 벽송사! 그런 이유로 방화 소실되어 모든 전각이 새로 신축되었다.
▲ 벽송사 전경 빨치산 들의 야전병원으로 쓰여졌다는 천년 거찰 벽송사! 그런 이유로 방화 소실되어 모든 전각이 새로 신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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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벽송사다. 벽송사! 한때 수백 명의 선승들로 분주했던 신라의 거찰이었으나 결국 한국전쟁 시기 빨치산 소탕 명분하에 국군 방화로 전소했다. 지금의 전각과 도량은 1960년대에 전부 새로 신축한 것이다. 한때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서 빨치산 중요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사에 의하면 이곳 벽송사를 중심으로 토벌군과 빨치산의 전투가 매우 치열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개인에 따라 억울한 죽음도 있었을 것이고 명예로운 죽음도 있었을 이곳에 어김없이 반세기가 훌쩍 넘긴 지금, 봄이 찬연한 가운데 부처님을 기리는 봉축 연등이 등을 맞대며 나란히 걸려있다. 모두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자비와 사랑 안에 그 치유되지 않은 많은 역사의 아픔과 상처가 함께 용서되고 화해되며 이해되기를 간곡히 빌어본다.

<사람이 부처요 부처가 사람이다>

마음이 부처요 사람이 부처다란 문구가 선명하다.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마음처럼 모든 역사의 아픔과 상처을 거대한 화해의 용광로로 서로 녹혀야 한다.
▲ 벽송사 오름 길 마음이 부처요 사람이 부처다란 문구가 선명하다.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마음처럼 모든 역사의 아픔과 상처을 거대한 화해의 용광로로 서로 녹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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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산행에 이 6.15 공동선언이행이라는 문구를 배낭에 달고 다녔다. 많은 사람들이 보았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 한가닥 봄바람이 되었길 빈다.
▲ 6.15 공동선언이행 이번 산행에 이 6.15 공동선언이행이라는 문구를 배낭에 달고 다녔다. 많은 사람들이 보았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 한가닥 봄바람이 되었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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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함양 독바위 빨치산루트 산행 내내 '6.15 공동선언 이행' 문구가 선명한 위의 배낭을 지고 다녔다. 우리 일행이 30여 명이 넘었고 또 산행 중에 오르고 내리는 길이 서로 섞이고 뒤엉켰으니 분명히 내 등뒤에 붙은 이 독특한(?) 문구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보여주는 이, 보는 이 분명 서로 마음이 편치 않았을 수도 있겠다. 혼란스런 우리 현대사가 아직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결코 적지 않은 세월의 부침 속에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역사적 감각도 많이 무뎌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와서 빨치산을 다시 이야기한다는 것은 오히려 듣기에 따라 생경스럽거나 또는 뜨악해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리되지 않거나 치유되지 않은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때에 그 누가 있어 정의와 도덕과 양심의 총을 들 것인가? 다소 고통스럽고 불편하더라도 진실 가운데 화해와 용서로서 거대한 화합의 용광로를 지펴 올리는 것이 순리라 믿는다. 그 순리를 믿기에 오늘의 빨치산 기획 산행을 용기(?) 있게 끝마칠 수 있었다.


태그:#지리산 빨치산루트, #함양 독바위, #지리산 선녀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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