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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동거 스토리, 이들의 진심은 무엇일까
▲ 그림 1 기이한 동거 스토리, 이들의 진심은 무엇일까
ⓒ 김신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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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와 야요이의 원작 만화 <너는 펫>의 내용을 실화 형식으로 재구성한 <애완남 키우기, 나는 펫>이 화제다. 사실 이런 프로그램에서 시청자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표출하는 의구심은 이 ‘남자 셋 여자 셋’이 보여주는 기이한 동거 이야기가 진짜냐, 가짜냐다.

그러나 지상파든 케이블이든 '실제상황'을 표방한 프로그램이 무분별하게 쏟아져 나오는 지금, 진위 여부만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이제는 그리 생산적인 관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는 문제는 해당 프로그램의 의미가 과연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환경을 얼마나 고려하고 있는지, 그 맥락을 찾는 일일 것이다. 그 맥락이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또 다른 차원의 실제 현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진정한 '알파걸'은 없다. 단지 재미를 위해 그녀들
의 능력은 무시되고, 육체성을 위시한 남성들의 판타지는 배가된다.
▲ 그림 2 이 프로그램에서 진정한 '알파걸'은 없다. 단지 재미를 위해 그녀들 의 능력은 무시되고, 육체성을 위시한 남성들의 판타지는 배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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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그램이 밀고 가는 초점은 제한된 공간 내에 남자와 여자가 벌이는 일종의 생체 실험이다. 혹 시청자는 조이스틱 혹은 키보드를 누르면서 이들을 하나의 아바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시청자들은 회마다 이어지는 이 실험의 자극들을 공유하며, 그 자극의 세기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를 예측한다.

각기 다른 세 쌍의 특징은 원작에선 스미레와 그녀의 펫인 모모에게 다 압축되어 있다. 스미레와 모모의 일상을 세 가지 스타일로 분리하여, 희주 - 숭민, 청미 - 세혁, 동근 - 목련이란 ‘각기 다른 방’으로 만든 점은 본 프로그램이 추구하려는 재미의 다각화를 꾀하는 수단이다.

서로의 육체성 탐닉에만 몰두하는 카메라
▲ 그림 3 서로의 육체성 탐닉에만 몰두하는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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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남 키우기 나는 펫>은 원작 만화의 여주인공 스미레가 갖는 사회적 위치에 대한 심적 갈등을 삭제했다. (만화에서 스미레는 뛰어난 외모, 고학력, 출중한 실력을 가진 팔방미인이지만, 때론 그 점이 자신의 사회관계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본 프로그램에 나오는 희주, 청미, 목련이 가진 사회적 위치가 그녀들이 단순히 능력 있는 ‘싱글녀’라는 것을 짐작하게 만드는 겉치레처럼 인식하게 만든다. 프로그램에서 그녀들의 능력은 제대로 표출된 적이 거의 없고, 단지 그녀들의 생생한 육체만이 카메라에 포착된다.

사실 상자에 담긴 세 남성들을 다루는 여성들의 행위가 이 프로그램의 주된 핵심인 것 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청자들이 연 상자엔 희주, 청미, 목련이 들어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착각을 뒷받침하는 단서는 동거라는 상황 속에서 부딪히는 일상의 단순한 조명 때문이다.

비록 이 프로그램이 만들어진 케이블 채널이 코메디 TV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재미가 최우선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그 재미를 더욱 북돋을 수 있는 요소는 각 인물들이 처한 현실적 위치를 더욱 깊게 고려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본 프로그램은 그러한 고려를 애초에 잘라버리고, 재미라는 목적을 위해 남녀관계의 이성애적 이데올로기를 부각시키는 것만 몰두한다. (첫 회에 희주가 펫인 숭민에게 아버지, 어머니랑 떨어져 사는 이유를 물어보지만, 그것은 단지 자신에게 찾아온 펫의 현재 상황만을 요약해줄 뿐, 앞으로 전개될 스토리엔 별 영향을 주지 않는다. 울고 있는 목련에게 동근이 다가가서 건네는 위로는 그녀의 슬픔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것보다는, 동거라는 상황 속에서 시청자들의 환상을 충족시키는 남녀 간의 접촉일 뿐이다.)

전혀 알지 못했던 서로의 육체성에 대한 반응 - 재반응이 관음증적 시선과 상호간의 육체적 접촉과 어우러져, 시청자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투영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투사가 브라운관을 통해 재현될 때, 본 프로그램은 자신의 소임을 다 했다고 자부할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밀고 가는 초점은 제한된 공간 내에 남자와 여자가 
벌이는 일종의 생체 실험이다.
▲ 그림 4 이 프로그램이 밀고 가는 초점은 제한된 공간 내에 남자와 여자가 벌이는 일종의 생체 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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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자부심 뒤에는 보이지 않는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문화 소비의 주요 대상층으로 주목받아온 30대 여성들의 주체성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행위들이 등장인물 속에서 전혀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펫의 떨어진 용돈을 채워주고, 그들을 재워주는 것을 통해, 남녀관계의 사회적 역전이라는 인식과 여성의 능력으로 표현된 ‘싱글녀’라는 위치를 등가화시키는 단순함은 위험한 발상이다. 

문화 소비 주체로서의 여성을 좀 더 세밀하게 묘사하지 못한 부분은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다. 즉, <애완남 키우기, 나는 펫>은 남성이 기존에 갖고 있던 사회적 위치와 그것을 통해 나타나는 일상을 일시적인 실험을 통해, 여성이 기존 사회의 남성이 하던 역할을 맡았을 때, 여성은 어떤 반응과 행위를 보이는가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일 뿐이다.

본 프로그램에 깊이 개입된 남성성의 판타지는 결국 ‘알파 누님’들의 육체성을 잠식하면서, 그들이 실제로 쌓아온 사회적 경력마저 허상으로 보이게 만드는 무서운 기제로 작동한다. 결국 이 프로그램에 알파걸이란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씨네 21 블로그 '독설가의 자취방'(http://blog.cine21.com/jjcrowex)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코메디TV, #애완남 키우기, #알파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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