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작품을 빛내는 또 다른 주역을 찾습니다. 연기하는 배우라는 점에서 '주'와 '조'는 따로 없습니다. 혹시 연기는 잘하는데 그동안 이름을 잘 몰랐다고요? 가만 보니 이 사람 확 뜰 것 같다고요? 자신의 길을 최선을 다해 걸어온 이들을 <오마이스타>가 직접 '픽업'합니다. [편집자말]

 영화 <재심>에서 악질 형사 백철기 역의 배우 한재영이 14일 오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재심>에서 악질 형사 백철기. 배우 한재영은 그를 연기하며 "악역의 정점을 찍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정민


모든 일의 시작은 그에게 잘못 걸리면서부터다. 살인사건을 목격하고 경찰 앞에서 증언까지 했지만, 오히려 형사들은 그를 의심하고 겁박했다. 여기에 검찰과 법원의 안일함까지 보태져 결국 그 소년은 인생의 황금기를 고스란히 교도소에서 보내야 했다. 영화 <재심>의 일부 줄거리이자, 실제로 벌어진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의 전말이다.

"악하게 표현하려고 안 했다. 근데 또 악하지 않게 하면 오히려 더 악하게 보일 거 같더라. 백철기라는 사람도 그렇게 막 때리고 잡아넣고 싶어 혈안이 됐다기보단 상부의 눈치도 있고, 관계된 이들도 많아서 그랬을 거로 생각했다. 영화에서 표현되진 않았지만 일말의 양심의 가책은 있지 않았을까. 집에 가면 아내도 있고, 잔소리도 듣고 그런 가장이었을 거다."

그 악질 형사 백철기 역을 맡은 배우 한재영의 변이다. 연기 경력만 벌써 15년이 넘어가는 그가 해석한 인물은 평범한 나머지 너무 삶의 논리에 충실해 버린 사내였다. 그간 다수의 영화에서 건달, 경찰을 반복해서 맡아온 그였기에 내심 수긍이 간다. 기능적으로 소모되고 마는 캐릭터가 아니라 이야기에서 살아 있는 캐릭터가 한재영의 재현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지난 14일 상암동 <오마이뉴스>에서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로 했다.

악역의 정점

 영화 <재심>에서 악질 형사 백철기 역의 배우 한재영이 14일 오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재심> 촬영 전보다 그는 살이 꽤 빠졌다. "악역은 이제 그만하고 뭔가 새로운 역할을 해봐야 하지 않겠냐"며 그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이정민


인상만 놓고 보면 움찔하는 게 사실이다. 큰 덩치에 입 주위를 둘러싼 수염이 전형적인 '범죄형 얼굴'이다. "얼굴이 너무 밋밋해 기르기 시작했다"며 그가 너털웃음을 짓는다. 같은 소속사 배우인 황정민이 '좀 깎으라'고 장난 섞인 핀잔을 준다지만 그의 의지는 꿋꿋해 보였다.

"건달 역도, 경찰역도 그간 꽤 했다(웃음). 관객분들이 어찌 볼지 모르겠지만 <재심>에서 백철기는 마냥 윽박지르는 형사와는 다르게 표현하려 했다. 식상해 보이기 싫었고, 그저 그의 입장에선 정당하게 하는 일이라는 인식을 주고 싶었다. 전부터 그 생각을 했다. 이런 악역을 맡으면 정말 일상생활인 것처럼 해야겠다고. <살인의 추억> 속 송강호 선배같이 말이다. 실제 사건을 일부러 공부하진 않았다. 정보를 보게 되면 연기도 그쪽으로 쏠릴까 봐 내 상상력에 맡겼다. 아, <그것이 알고 싶다>는 봤다. 대충 어떤 느낌일지 감은 오더라."

전라남도 영광 출신인 그는 표준어로 제시된 대사를 노련하게 사투리로 다 바꿔 연기했다. 전작 <친구2>에선 계부로 등장했기에 혹시 물으니, 청소년기를 또 부산에서 보냈단다. 호남과 영남 사투리를 함께 탑재한 '드문' 배우였다. 그는 <재심> 시나리오를 읽고 정말 출연하고 싶어 제작사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꼭 하고 싶다는 의지를 강하게 밝힐 정도로 욕심을 냈다. "아무래도 조연 캐릭터 중에선 가장 매력 있는 역이었고, 백철기를 통해 악역의 정점을 찍고 싶었다"고 그가 고백했다. 그만큼 애착이 갔던 작품인 건 분명하다.

당근과 채찍

 영화 <재심>에서 악질 형사 백철기 역의 배우 한재영이 14일 오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에선 주로 악역이었지만 여러 무대 작품에서 그는 누군가의 아빠이거나 선생님 등의 역을 주로 맡았다. 이것 또한 반전 매력.ⓒ 이정민


오랜 경력의 배우들이 저마다 연기가 꿈이라고 고백하곤 했다. 한재영은 보다 더 담담했다. "고등학교 때 자습하기 싫어하는 모습에 선생님이 연기는 어떠냐고 권유해 접하게 됐다"고 시작점을 그가 설명했다. 그렇다고 절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2002년 뮤지컬 <55 사이즈> 이후 대학로 극단 신화에 몸담았고, 외길을 걸었다. 불과 3년 전까지 고시원에서 살 정도로 생활이 풍족하진 않았지만, 버티고 또 실력을 닦으며 지금에 이르렀다.

"어릴 땐 중상위권 정도 성적이었는데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공부가 재미가 없었다. 집안 환경도 그리 좋진 않았지. 그렇다고 사고를 치진 않았고, 그저 꿈이 없었을 따름이다. 그러다 문학 선생님의 친구가 연기학원을 하신다고 들어 연기를 시작했는데 잘 맞더라. 주위에서도 곧잘 한다는 말을 해주니까 신도 났고. 극단도 교수님 권유로 들어간 거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서 고시원, 극단 사무실 생활을 전전했다.

서른여섯 때였나. 10년 넘게 연기했는데 앞이 안 보여서 포기하려고도 했다. 근데 이렇게 인터뷰를 하고 있을 줄 알았을까. 연극을 하면서 나름 강하게 배웠다. 맞기도 많이 맞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 많이 지적받았다. 나 스스로 그래서 좀 엄격한 편이다. 제대로 연기에 대해 생각한 게 <강남1970> 때다. 내 이름을 걸고 연기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지. 그럴수록 연기는 더 어려워지더라. 이번에 <재심>도 60점 정도밖에 못 주겠더라. 그분이 오려다 말았어! (웃음)"

홀로 점검하는 습관이 들어있기에 한재영은 당근보다는 채찍을 더 많이 적용한다. 연극 무대를 서는 후배들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다. "뭔가 건드려서 더 잘 될 거 같으면 당근보다는 채찍을 더 쓰는 편"이라며 "그런 말을 하는 게 쉽진 않지만, 더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에서 꺼낸다"고 말했다.

"2008년까지인가. 영화를 몇 편하긴 했지만 주로 연극만 팠다. 영화에 좋은 역할로 논의가 되다가 꼭 최종에서 미끄러지더라. 그땐 내가 아무런 줄도 없고, 믿는 구석이 없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근데 돌아보면 내 실력이 부족했던 거다. 내공 부족이지. 그걸 서른 초반에 느꼈다. 물론 잘 되기 위해선 실력도 중요하고 운도 따라줘야 한다. 그땐 내가 그냥 너무 닫혀 있던 건 아니었을까 돌아보긴 한다.

여전히 초야에 묻힌 고수가 많다. 그분들도 좀 마음을 열고 나왔으면 한다. 영화계도 너무 젊은 친구들 위주로만 쓰지 말고 고수를 찾으러 돌아다녔으면 좋겠다. 냉정한 기준으로 잘한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이들을 찾아야지."

연기의 짜릿함

 영화 <재심>에서 악질 형사 백철기 역의 배우 한재영이 14일 오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무대와 영화로 그는 "이미 짜릿함을 맛봤기에 다른 길로 돌아가긴 힘들다"고 말했다. 어쩌면 이게 그가 연기하는 솔직한 이유일 것이다. 연극 <서쪽나라에서 온 플레이보이> 등 몇 가지 작품을 언급하며 한재영은 "어떤 계기 없이 그냥 작품이 쭉 받아들여지고 캐릭터가 잡힐 때가 있다"며 "영화에서도 그런 순간을 맞는 게 꿈"이라 밝혔다.

그렇다고 애써 무리하진 않는다. 스스로 최고 경지의 연기라고 생각하는 게 '평범함의 연기'니까. "무대에서든 화면에서든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연기를 하고 싶다"고 한재영은 속마음을 꺼냈다.

"달리 말하면 평범하게 보이는 연기다. 그게 제일 힘들다. <재심>도 평범한 시민처럼 보이려 했는데 그게 좀 부족했던 거 같다. 평범함의 연기 그게 내 목표다. 천천히 해나가야지. 뭔가 이루고픈 욕심이야 있지만, 사람은 다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매 작품 내 인생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해나가겠다."


"몰래한 혼인신고에 대리만족" 연기의 맛 알아버린 미술학도

[오마이픽업] <불어라 미풍아> 장세현, 8년간 한 계단씩 오르다

주연으로 전면에 선 배우들 모두 주말극이 처음이었다. 걱정이 많았고, 일종의 모험이었으나 MBC 드라마 <불어라 미풍아> 속 이들은 주어진 역할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의 보상일까. 종영을 앞두고 평균 시청률 20%를 상회하며 경쟁작과 함께 제법 준수한 성적을 내고 있다.손호준과 임지영이 각각 장고-미풍 커플로 분하며 각종 사건에 얽히는 동안 꾸준하게 시청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 커플이 있었으니 바로 장세현의 이장수와 황보라의 조희라 커플이다. 이들은 일명 고구마 전개라며 드라마의 주요 사건이 막힐 때도, 급박한 전환점을 맞을 때도 꾸준히 사랑했고, 시원한 모습을 유지했다. 시청자들이 그만큼 감정 이입하기 좋은 캐릭터였다. 이 두 사람 중 장세현을 21일 서울 충무로 인근에서 만날 수 있었다.연습량이 곧 분량 종영까지 2화가 남은 가운데 <불어라 미풍아>는 지난 20일 마지막 촬영을 끝냈다.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 것 같았는데 막상 마치니 공허하더라"며 장세현이 이른 종영 소감부터 전했다."드라마 내용 자체가 이산가족상봉이잖아요. 지난 7개월간 매주 두 번씩은 다들 만났는데 이제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되게 마음이 이상하더라고요.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함께 한 선생님들, 또 파트너로 함께 했던 보라 누나에게도 참 감사해요. 대본 리딩이 있는 날이면 저희끼리 따로 모여 연습하곤 했거든요. 분량이 적으면 적은 대로 연습량을 늘려서 이것저것 시도하려 했어요."극 중 이장수는 달래 할머니(김영옥 분)와 유대 관계가 깊고, 정이 많은 인물로 묘사된다. 막내아들로서 엄마 황금실(금보라 분)과 장남 이장고(손호준 분)에겐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을 터. 장세현은 "실제 집에선 장남이지만 애교가 많은 편이라 스스로 장수와 비슷한 면이 많다고 생각했다"며 "시청자분들이 이입하기 가장 쉬운 캐릭터라고 봤고, 그렇게 준비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런 정이 많은 면은 저랑 비슷한데 또 어떤 면에선 완전 다르기도 해요. 사랑에 빠져 몰래 혼인신고하기가 사실 쉽지 않잖아요. 그런 면을 연기할 땐 나름대로 대리만족을 느꼈다랄까(웃음). 집에서 부모님이 제가 출연한 걸 종종 보셨는데 '장수가 그냥 네 모습인데?' 이런 반응이었어요. 굉장히 모범적 인물이면서 또 백수기도 한데, 적극적인 면도 있는 인물이에요. 제겐 색다른 경험이었죠."주말극이 처음인 만큼 세세하게 준비한 흔적이 보인다. 짝꿍인 황보라와 이런저런 호흡을 미리 맞춰보는 과정에서 지금의 커플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극 중 애착이 가는 장면으로 장세현은 "혼인신고 사실 때문에 놀이터에서 장고 형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는데 그게 계속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이 역시 기존 설정에 아이디어를 보태 코믹하게 재탄생한 경우였다.다재다능함 시청자들에게 다소 낯설 수 있지만, 장세현은 영화 <바람>과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로 데뷔해 벌써 8년 차 경력이 쌓였다. 올해로 서른하나, 데뷔 이후 여러 작품에서 크고 작은 역할을 고루 경험했다. 대학에서 전공은 산업디자인으로 이 또한 이색 이력이다. 연기에 전념하기 위해 입대 전 학교를 나왔고, 말 그대로 한 계단씩 올라오고 있는 전형적인 노력파다. 한 달에 평균 4, 5번의 오디션을 다니며 선택과 배제의 과정을 겪었고, 그로 인해 나름 굳은살 역시 튼실하게 배어있다."디자인도 연기도 모두 제 꿈이었어요. 학교는 나왔지만 그렇다고 그림을 포기한 건 아닙니다. 꾸준히 그리고 있어요. 오디션 볼 때도 이걸 장점으로 사용할 수도 있어요. 캐릭터 분석표를 드릴 때 제가 상상한 캐릭터를 직접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드린 경우도 있었죠. <화랑> 땐 주령구(주사위의 일종)라고 대본에 나온 소품을 직접 만들어 가기도 했고요(웃음).어렸을 때부터 반에서 그림 하면 제가 손꼽히는 편이었어요. 특별활동 부서도 만화부에 들 정도로 좋아했죠. 예술고등학교에 떨어진 이후 제대로 준비하고 싶어서 부모님과 상의했고, 흔쾌히 지원해주셨어요. 사실 집안 환경이 그리 풍족하지 않았는데 믿고 맡겨주신 거죠. 그러다 대학교에서 갑자기 연기한다고 하니 어떻겠어요? 그런데도 '후회하지 않을 거냐'라고 물어보시곤 그 이후로 쭉 믿어주셨어요. 다른 친구들은 이 이야기에 되게 놀라거든요. 제가 생각해도 감사한 일입니다.오디션은 일단 볼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제겐 소중하죠. 그런 점에서 회사에 참 감사합니다. 저만 잘하면 돼요! (웃음) 너무 떨어져서 오히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붙으면 같이 즐거워해 주고 떨어지면 슬퍼해 줄 분이 곁에 있다는 자체가 큰 힘이에요."그림이란 게 흰 도화지에 자신의 생각과 감성을 표현하는 행동이라면 연기 역시 장세현에겐 빈 도화지에 몸으로 생각과 감정을 그리는 일이었다. "어떤 도구가 아닌 온몸을 쓸 수 있다는 게 더 크게 다가왔다"며 그가 전환의 계기를 설명했다.시작은 할 수 있어도 버티기 어려운 게 이쪽 업계의 생리다. 재능 있고 젊은 자원이 끊임없이 등장하지만, 작품 자체는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스물여섯에 뒤늦게 입대하면서도 그는 군악대, 군 행사 진행 등을 거치며 끼를 숨기지 않았고,느리지만 길게 이런 이유로 장세현은 급히 부상한 스타보단 "과정을 거쳐 하나씩 배워가는 배우"가 되고 싶어 했다. "역할을 떠나 일단 연기할 수 있는 자체가 감사하다"며 "조급증은 이미 버렸고, 주어진 기회를 좀 더 많이 살리는 게 내 숙제"라고 답했다."빠르게 주목받고 인지도가 올라갈수록 그 반대의 경우도 더 빨리 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스타 분들이 어깨에 진 짐이 그만큼 무겁겠죠? 전 비행기보단 계단으로 올라가고 싶어요! (웃음) 친한 친구와 꿈에 관해 얘기할 때 서로 이루면 꼭 방송국에서 만나자고 했거든요. 그 친구는 아나운서 지망생이었고, 마침 지난해에 KBS에 합격해서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었어요. 저도 마침 KBS 드라마를 했고요. 아, 우리가 좀 느리긴 해도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구나! 생각이 들어 뿌듯했습니다."밝은 어투로 말했지만, 장세현의 이 말엔 그가 지금까지 해온 고민의 시간이 담겨있었다. 오디션을 보든 섭외가 오든 장세현은 "열린 자세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보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설경구 아내'이자 '김윤석의 동생', 나 누군지 몰라요?

[오마이픽업] 15년 내공, 배우 김수진이 말하는 최고 배우의 경지... '정직함'

이름만 놓고 보면 사실 참 평범하다. 그가 출연작에서 맡은 역할? 영화 <타워>(2012)에서 설경구의 아내, 영화 <화차>(2012)에서 조성하의 아내, 영화 <검은 사제들>(2015)에선 김윤석의 동생. 게다가 지난 9월 개봉한 <나홀로 휴가>에서도 박혁권의 아내였다. 누군가의 아내 혹은 가족으로 짧게 등장하던 배우 김수진을 지난 3일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옥에서 만났다. 짧지만 굵다. 잘 알려진 얼굴이 아니라지만 벌써 연극 무대에서 15년 이상 내공을 쌓은 베테랑 아닌 베테랑이다. 지난해부터 대중 매체에 등장했을 뿐이지 대학로 거리를 걷다 보면 수 명 중 다수가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넨다. "한 3년간 바짝 뛰어 보려고요"라며 그가 대수롭지 않은 듯 기자에게 웃어보였다. 눈썰미 좋은 관객이라면 영화 <아수라>에서 그의 모습을 봤을 것이다. 재개발에 반대하던 목소리 걸걸한 시의원이 바로 김수진이었다. 배우 김수진은 누구?정식 데뷔, 그러니까 오디션을 통과해 돈을 받으며 연기하기 시작한 건 2001년부터다. 극단 한양레퍼토리 출신으로 김민기 연출의 연극 <의형제>가 데뷔작이다. 김윤석, 조승우, 배성우 등이 거쳐 간 바로 그 작품이다. "작년에 운이 좋아서 올해까지 치면 10작품 정도 한 거 같다.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났고, 드라마와 영화를 하면서 배운 게 많다. 연극만 팔 때는 부끄럽지만 이쪽 일을 크게 염두에 두진 못했다. 평생 연극만 고집할 거 같았는데 허리를 다쳐 2년 동안 공백이 생겼었다. 연기는 계속 하고 싶고, 스크린이든 TV든 같이 호흡하고픈 욕망이 커지더라. 20대가 연기의 기본을 다지는 시기였다면, 30대는 돈이 안 되는 여러 것들에 도전하던 시기였고, 40대가 되어서야 어떤 작품이나 캐릭터를 만날 때 접근법이 조금 보이더라. 이제야 작업하고 싶은 감독님과 함께 맞춰 보고픈 배우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 아직 멀었지(웃음).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면서 깊이도 가져가야 하니까. 일단 지금 과정은 괜찮다. 내가 하고 싶은 역할이 있다고 다 소화할 수 있는 건 아니기에 때를 기다리고 있다. 내 잠재력이 터질 작품을."작품 준비 과정 <아수라>에서 단 2회 차 촬영이지만 김수진은 허투루 준비하지 않았다. "조폭출신 박성배 시장(황정민 분)에 반대하며 재개발을 막는 모습이 어찌 보면 선한 쪽 같지만 그 역시 자기 이권을 위해 아귀다툼 하는 거였다"고 김수진은 해석했다. 시나리오만 팔 수 있었지만 그는 유튜브 등을 통해 재개발 과정에서 벌어지는 갈등 양상을 공부했다. 최근까지 몇몇 국회의원의 행태를 보며 현실감 또한 담보했다. "잔인한 거 마초적인 걸 싫어하는데 <아수라>는 좋았다. 폭력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지 않았다. 여러 면에서 방점을 찍을 수 있는 영화 같다. 일단 자본의 입김으로 요즘 영화들이 감독의 원하는 바를 이루기 어려운 환경인데 <아수라>는 끝까지 감독의 생각을 밀고 갔다. 또 메시지 면에서 검‧경‧정치인들이 양심을 버리고 돈만 쫓을 때 벌어지는 일들을 역설적으로 한 방 보여줬다. 관객 입장에선 감정이입할 대상이 마땅치 않으니 배신당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신념이나 반성을 잊게 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수라일 수 있다는 걸 제시하고 있다. 영화에 참여한 후 그런 점이 난 좋았다."짧게 참여한 영화에 강한 애정을 보였다. 그만큼 한 작품 한 작품이 그에겐 소중하기 때문일 터. 수차례 오디션을 보며 겪었던 그만의 복잡다단한 감정과 나름의 깨달음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직 특정 역할을 따내기 위한 오디션 경험은 없고 불특정 캐릭터 중 하나가 주어지면 소화하는 식이었지만 김수진은 매번 자기만의 무기를 들고 오디션 장을 찾는다. 연륜의 힘일까. 한번 눈도장을 찍으면 줄줄이 다른 작품 오디션 기회가 주어진다. "나름 독백을 준비해 가거나 내 장점을 보일 수 있는 특정 상황을 가져가 보기도 한다"며 그가 영업 비밀도 살짝 공개했다.양질 전환 법칙 그런 그에게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40대 여배우의 현실에 대해 물었다. 무거울 수 있는 질문인데 김수진은 짐짓 "여자 배우 입장을 대변할 처지는 아니"라 조심스러워 하면서도 "새로운 여성 캐릭터가 요구되는 때인 것 같다"는 답을 내놓았다. 일리 있다. 40대 50대 남자배우들은 '명품배우'라며 추앙받고 다양한 작품에서 다양한 캐릭터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상대적으로 그 또래 여성배우들이 할 수 있는 작품은 적다."여성 관객들이 늘고 있으니 남자가 나오는 걸 많이 볼 거라 생각하기 쉬운데 여성의 워너비(wanna be)는 여성이라는 면에서 보면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20, 30, 40대 여성들이 좋아할 것이다. 여성 관객이 많아진다는 건 감정 이입할 대상을 다양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거기에 맞춰 변모하는 거 같다. <시그널>의 김혜수 선배도 그렇잖나. 굳이 연애감을 내세우지 않고 주도적인 여성을 그려도 통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한 거 같다. 오히려 그게 남성 관객에게도 어필할 수 있지 않을까.나도 누구의 아내 역을 많이 했지만 조금씩 넓혀나가고 있는 거 같다. 오디션을 보러 들어가면 그래서 떳떳하고 기분이 좋다. 물론 떨어지면 마음이 쓰지(웃음). 그럴 땐 동료나 선배의 조언이 많은 도움이 되더라."이 대목에서 김수진은 "양이 질을 능가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양질전환의 법칙'이다. 충분히 양을 쌓으면 질이 확 달라진다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 각종 영화와 드라마의 조연과 단역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다. "<시그널>에 출연했을 때 (세상의 불의에) 마음의 화가 잔뜩 있었는데 다행히 연기로 담아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기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광장으로 뛰쳐나갈 것 같은 에너지가 그에게 있었다. 양심과 반성의 힘그 에너지를 구체적으로 파보자. 이는 김수진이 15년 간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연기를 포기하지 않은 원동력이기도 하다. "때가 있는 것 같다"고 담백하게 말하는 그에게 재차 물었다. 그 동력이 무엇인지. "어릴 때부터 어디 가면 혹시 연출가냐, 작가냐, 아니면 기자냐는 말을 들었다. 실제로 기자나 법조인이 꿈이기도 했다. 내가 정의 구현에 좀 관심이 많다(웃음). 자기주장 하는 걸 어색해하지 않아서 그런가. 5남매 중 맏이인데 아버지가 그렇게 키웠다. 그래서 건방지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배우라는 직업은 선택받는 입장이라 그래서 답답할 때가 많았다. 사실 고등학생 때 선배들 꾐에 연극반에 들어간 게 계기였는데 할수록 재밌더라. 고민도 많았지. 대학 졸업할 때까지도 고민했다. 20대엔 그저 10년만 버텨보자는 마음이었는데 그만큼 버텼더니 다른 할 수 있는 게 없더라(웃음). 성격상 감정이입을 잘하는 편이고 다른 사람의 삶을 기웃거려도 이상하지 않은 직업이 배우 같다. 연기자는 자기 자신이 곧 재료지 않나. 좋은 재료가 되도록 갈고 닦아야 좋은 연기가 나오는 것 같다. 사회적 지위가 없기에 자신과도 싸워야 하고 공부도 많이 해야 한다. 타인의 이야기도 잘 들어야 하고. 그래서 배우는 쉽게 늙지 않는 것 같다. 다만 쉽게 비교될 수 있는 만큼 자존감은 잘 들고 다녀야지! (웃음) 주변에 좋은 사람을 많이 두는 게 중요하다." 배우론 만 가지고도 밤을 샐 기세였다. 김수진은 차기작인 <침묵>에서 재판장으로 분한다. 역시 짧은 분량이지만 이를 위해 최근 네 차례 법원을 방문해 참관했다. 이 경험을 전하며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어쩌면 평생 그가 연기하는 이유일 수도 있는 말이었다. "변호사인 친구랑 법원을 다녔는데 매우 어려 보이는 판사가 있었다. 우리 보다 어려 보였는데 친구 말로는 적어도 우리 보단 훨씬 나이가 많아야 판사를 할 수 있다더라. 아마 본인 양심에 귀 기울이며 속이지 않는 삶을 살아서가 아닐까. 나 역시 정직한 배우가 되고 싶다. 그러면 안 늙을 것 같다. 사소한 것에 스트레스 받지 않고, 다양한 사람을 탐구하며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