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빛내는 또 다른 주역을 찾습니다. 연기하는 배우라는 점에서 '주'와 '조'는 따로 없습니다. 혹시 연기는 잘하는데 그동안 이름을 잘 몰랐다고요? 가만 보니 이 사람 확 뜰 것 같다고요? 자신의 길을 최선을 다해 걸어온 이들을 <오마이스타>가 직접 '픽업'합니다. [편집자말]

"얼마전 요가 하러 횡단보도에 서 있었는데 옆 사람들이 402호 얘길하더라. '설마 <곤지암> 얘긴 아니겠지?' 생각하던 찰나 계속 얘기를 들으니 <곤지암> 얘기였다. 아무래도 다수의 관객 분들은 강렬한 장면을 기억하시니까 제가 <기담>에서 아사코 엄마였고, <곤지암>에서도 병원 원장이었던 건 잘 모르실 것이다. 게다가 귀신 역할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분장을 하고 나오니까(웃음)." 

 영화배우 박지아

영화배우 박지아 ⓒ 권우성


누적관객 200만을 돌파하며 한국 공포 영화 부활의 신호탄이 된 <곤지암>. 다수의 신인 배우와 함께 이 배우를 주목해야 한다. 힌트는 정범식 감독의 데뷔작 <기담>이다. 눈썰미 좋은 공포영화 마니아라면 배우 박지아가 <기담>에 이어 11년 만에 <곤지암>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200만 돌파를 목전에 둔 시점에 미리 <오마이뉴스>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감독의 문자

정범식 감독의 문자 하나가 시작이었다. "대본 하나 보낼 건데 읽어봐 줄래요?"라는 말과 함께 <곤지암>의 시나리오가 와 있었다. <기담>이 개봉한 지 10년 만인 상황에서 감독은 이미 기획 단계에서부터 박지아를 염두에 뒀다. 그렇게 곤지암 정신병원을 찾은 '호러타임즈' 7명을 공포에 질리게 한 병원 원장이 탄생할 수 있었다. 

"'역할이 마음에 들진 모르겠지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하셨다. 또 대외비였지만 그 원장의 비하인드 정보도 적어주셨다. 저야 물론 오케이였다. <기담> 때부터 감독님의 작업 스타일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잘 안 맞으면 힘들어 하는 배우도 있지만, 제 개인적으론 매우 고마운 분이셨다. <기담>과 이번 작업 중간에 감독님께 감동받은 일도 있고."  

우선, 병원 원장의 배경이다. <기담>이 그랬듯 정범식 감독은 <곤지암>에 다양한 상징을 숨겨 놨다. 영화 속 병원 개원일이 5월 16일로 설정된 점, 병원원장이 환자들과 함께 찍힌 사진 속 날짜 1979년 10월 26일 이라는 점은 박정희 대통령의 시작과 종말을 암시한다. 또한, 실험실 장면에 닭의 시체가 등장한다는 점, 병원 원장의 '올림머리 스타일', 호러타임즈 생중계 조회 수가 503명에서 멈춘다는 설정 등은 박근혜 대통령을 뜻한다. 여기에 더해 욕실에서 교복 입은 학생 귀신이 등장하고, 원장 귀신이 출몰한다는 방을 402호(본래 감독은 416호로 설정하려 했다-기자 주)로 설정했다는 건 세월호 참사를 암시하는 설정으로 볼 수 있다.

 영화배우 박지아

영화배우 박지아 ⓒ 권우성


"시나리오 작업이 공교롭게도 촛불집회 시작 직전에 끝난 걸로 알고 있다. 감독님이 워낙 정치, 시사에 관심이 많으셔서 영화 속 서브 텍스트를 통해 공감을 나누고 싶었던 것 같다. 아버지 때(박정희)를 부모 세대가 살아냈고, 그 딸을 지도자로 둔 상황을 자녀들이 살고 있다는 점에서 시간은 지났지만 반복되는 세월을 표현하신 것 같다. 정신병원에 들어간 7명의 호러타임즈 대원들은 누군가를 찾겠다고 했지만 실체가 잡히진 않았다. 하지만 분명 존재한다는 걸 느낀다. 현실 그대로를 모사할 순 없고, 은유와 영화 사이 균형을 고민하셨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박지아는 정범식 감독의 배려에 감동받은 사연을 더했다. 연극 <마술가게>를 기준으로 데뷔 27년 차 베테랑이지만 그에게도 부침이 있었다. 그는 "아무리 절친한 사이라도 업계에선 작품이 끝나거나 공백기엔 남이 되는 경우가 많더라"며 "감독님께 아쉬운 소리를 했던 때에 그 누구보다 인간적인 피드백을 주셨다"고 전했다.

"좀처럼 제가 그런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닌데 매우 절박했을 때였다. 주변의 몇몇 분들께 '저 일하고 싶다. 도와 달라'고 읍소했던 적이 있다. 다들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시곤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 정범식 감독님께 문자를 보냈다. <워킹걸>을 하신다는 소식에 '오디션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요' 조심스럽게 보낸 문자였다. '배우님이 하기엔 매우 작은 역할인데 혹시 보러 오실 수 있나요' 하시더라. 저의 상황을 아마 느끼신 것 같았다. 할 수 있는 역할이 없다고 하실 수도 있는데... 그만큼 인간에 대한 배려가 깊은 분이란 걸 알게 됐다.  

사실 흔쾌히 확답을 하고 연락을 안 주신 다른 분들이 잘못한 건 전혀 아니다. 제가 작품을 못하는 게 그 분들 탓이 아니니까. 다만 다르게 얘기하면 차라리 그렇게 흔쾌히 얘기 안 하셨다면 제가 어떤 희망이나 기대를 품지 않았을 텐데... 그걸 통해 저도 배웠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함부로 주는 게 반대로 힘든 시간을 갖게 할 수 있다는 걸. 그래서 정범식 감독님의 말이 정말 힘이 됐다. 세상이 그렇게 차가운 것만은 아니라는 걸 느꼈다."   

그는 <곤지암> 직전 출연한 <석조저택 살인사건> 정식 감독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했다. "투자사를 생각하면 더 인지도 있는 배우를 쓰는 게 나았을 텐데, 감독님이 제게 그 배역(성 마담)을 애초부터 주려고 생각하셨다고 들었다"며 "영화 자체가 감독님 의도와 달리 편집돼 저도 아쉽지만 꼭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전했다. 

 영화 <석조저택 살인사건>의 한 장면. 해당 작품에서 박지아는 성 마담 역을 맡았다.

영화 <석조저택 살인사건>의 한 장면. 해당 작품에서 박지아는 성 마담 역을 맡았다. ⓒ 씨네그루


귀신이 되어


이렇게 박지아는 <기담>과 <곤지암>의 연결고리가 됐다. <기담> 때 엄마 귀신이 던진 방언은 많은 관객들에게 공포감을 주기 충분했고, <곤지암> 속 병원 원장의 알 수 없는 소리 역시 그 연장선이었다. 해당 역할의 준비 과정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기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당시 시나리오를 다시 봤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로 돼 있더라. 즉흥으로 '얼렐레~' 이런 식을 해야 할까 생각했는데 그게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잖나. 굉장히 많이 생각하고 연습했던 것 같다. 딸인 아사코 대사를 다 써놓고 거꾸로 읽어보기도 했고, 문장을 바꿔서 연습하기도 했다. 그렇게 준비해 갔는데 현장에서 정말 긴장되더라(웃음). 딱 하나를 준비했는데 아니라고 하면 어떡하지? 근데 감독님이 현장에서 분위기를 잘 만들어주신다. 준비한 걸 하면서 중간에 하이톤으로 올라가는 걸 제가 본능적으로 했다. 그렇게 나온 게 그 결과물이었다. 

<곤지암>은 이렇게 준비했다. 시나리오엔 '곡소리를 내며 뒤에 서 있다'로 돼 있었다. 10년 전 것을 업그레이드 해볼까, 곡소리를 연구할까 하다가 둘 다 준비했다. 이게 반복된 죽음이잖나. 기담 때 방식으로 거칠게 내뱉는 것과 숨을 뱉고 들이는 걸 거칠 게 하는 것을 준비해갔다. 호흡 소리를 들으시곤 감독님이 '다른 건 더 안 하셔도 되겠다'고 하시더라." 

정작 박지아 본인은 공포영화 자체를 즐기진 않는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반대였다. "언제부턴가 공포영화를 보면 무섭지가 않아서 흥미를 잃었는데 <곤지암>은 보고 나서 무서웠다"며 그는 "<기담> 때보다 더 무서운 장면이 많았다"고 나름의 감상을 전했다.

 영화 <기담>의 한 장면. 엄마 귀신 역의 박지아가 보인다.

영화 <기담>의 한 장면. 엄마 귀신 역의 박지아가 보인다. ⓒ 영화사 도로시


 영화배우 박지아

영화배우 박지아 ⓒ 권우성


수줍었던 학생의 선택


앞선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박지아는 크고 작은 부침을 겪었다. 1992년 연극 <마술가게>를 기준으로 27년 차의 베테랑이지만 박지아는 언론 노출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극단 차이무와 연우무대 작품을 두루 경험하며 내공을 키워온 그다. 일부 대중에겐 영화 데뷔작 <해안선> 등 김기덕의 여성 페르소나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배우 입장에서 불편할 수도 있는 질문 몇 개를 던져야 했다. 방황의 시기에 대해서다.

"학창시절 워낙 성격이 어두웠고, 학교도 잘 안 가고 그랬다. 그런데 연극반이 생긴다는 말을 들었다. 가서 해보고는 싶은데 말은 못 하겠고, 그래서 오디션장에 가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오디션이 끝날 때까지 제가 청소만 하고 있으니 선생님이 눈치 채신 것 같더라. '한번 연기해볼래?' 그 말에 시작했다. 하면서 칭찬을 받으니 재능이 있는 줄 알고 시작했지. 근데 대학에 가니 안 되겠더라. 당시 제 동문이 안재욱, 신동엽, 류승룡씨 등이었는데 다 저보다 잘하고 멋져 보였다.

사춘기를 그때 앓았다. 방황하고 학교도 안 나갔다. 혼자 남산 주변을 걸어 다니곤 했다. 그때 박광정 오빠의 제안으로 <마술가게>를 했는데 와, 제가 방황할 틈이 없더라. 맨날 혼나고, 정신도 안 차려지고 그랬다. 선배들이 보시기에 제가 얼마나 성에 안 찼겠나. 그래서 편지를 써놓고 또 도망 나왔다. 다시 방황한 거지..."

두 번의 방황 끝에 박지아가 내린 결론은 "그래도 배우를 해야겠다"였다. "도망간 입장에서 면목이 없었다"면서도 겨우 용기를 내 자신을 무대로 이끈 선배 박광정에게 조심스럽게 연락했다. "절 미워하셨을 텐데 문을 조금 열어주셨다"며 박지아는 "그때 그 선배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전 연기를 못하고 있었을 것"이라 회상했다.

물론 그렇다고 꾸중과 질책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여러 선배들에게 혼나면서도 박지아는 버텼다. 할 수 있는 게 연기였고, 연기의 끈을 놓고 싶지 않다는 강한 바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과거를 돌아보고 앞을 생각해 봐도 연기란 건 평생 편하게 할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여전히 힘든 시기이긴 한데 달라진 게 있다면 버티는 방법이 생겼다는 점이지. 지금보다 인지도가 올라가도 연기는 힘들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귀신 역할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에만 전전긍긍했을 텐데 이젠 좋다. 제가 다른 걸 해내면 훨씬 돋보일 수 있으니까. 개인적으론 코미디 연기를 하고 싶다. 원래 코믹 연기를 했던 분이 코미디를 하면 식상할 테지만 제가 하면 신선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웃음).

그만큼 연기적으로도 생각을 많이 했다. 예전엔 작품에 임할 때 준비를 엄청 했던 때가 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 <날 보러 와요> 땐 화성에 두 세 번씩 가서 주변을 탐문하고 눈으로 직접 동네를 살피고 자료조사도 많이 했다. 근데 언제부턴가 이런 방식이 오히려 절 가둘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상대 배우에 대한 여지가 없어지기도 하고. 지금은 준비는 많이 하되 그걸 잘 소화시켜서 영양분으로 가지고 있자는 생각이다. 상대방에 따라 그걸 꺼내거나 받을 수 있게 말이다. 요즘은 여유에 대한 걸 많이 생각하고 있다." 

 영화배우 박지아

영화배우 박지아 ⓒ 권우성


강렬한 캐릭터를 맡았다는 굴레를 벗어나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그다. 그만큼 배우 박지아로서 오롯이 보일 영역이 더 커보였다. 박지아는 곧 개봉할 영화 <창궐>, 그리고 지상파 드라마로 대중과 만날 예정. 그는 "소박한 목표라면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라며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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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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